“보잘것없는 사람이지만 세상에 조금이나마 기여하고 싶다”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 지킴이, 이종란 노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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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11월 7일, 법원이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에서 일하다 뇌종양으로 숨진 고 이윤정 씨에 대해 산업재해를 인정했다.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을 지키기 위해 만들어진 단체 ‘반올림’이 노력한 결과다. 2007년 삼성 반도체에서 일하던 황유미 씨의 죽음이 계기가 돼 만들어진 반올림은 7년째 삼성과의 싸움을 계속해 오고 있다. 반올림의 시작부터 함께해온 이종란 노무사를 사당동 사무실에서 만났다. 

내성적이던 여대생의 변신

     누구보다 앞장서 노동자의 건강권을 외치는 지금과 다르게 이 씨는 90년대 대학교 입학 당시만 하더라도 발표를 시키면 울고, 교실에선 늘 뒷자리에 앉을 만큼 내성적인 성격이었다. 이런 그를 바꿔놓은 건 운동권 학회였다. ‘세상의 다른 반쪽을 보여주겠다’는 선배들의 말에 혹해 가입한 운동권 학회는 이 씨의 삶을 뒤바꾸어놓았다. 그는 학회에서 광주 5.18 민주화운동과 전태일 열사 등에 대해 들었다. 

     그는 “‘나’라는 고민에 머물렀던 삶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삶으로 바뀌는 전환점이었던 것 같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집회, 농활, 세미나 등을 하며 성격도 조금씩 바뀌어갔다. 이런저런 행사에서 사람들에게 유인물을 돌리는 건 얼굴에 ‘철판’을 깔지 않고선 힘든 일이었다. 바뀐 건 성격뿐이 아니었다. 막연하게나마 꿈이 생긴 것도 이 무렵이었다. 그는 “학회 활동을 하며 보잘것없는 나지만 세상에 기여하는 직업을 갖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며 웃어 보였다.

우연히 알게 된 직업 ‘노무사’, 천직이 되다

     이 씨는 ‘노무사’라는 직업을 알게 된 건 우연이라고 했다. 졸업 후 진로를 본격적으로 고민하던 중 친구를 통해 처음으로 그 직업에 대해 알게 됐다는 것이다. 이 씨는 무엇보다도 노무사가 되면 노동조합에서 일할 수 있단 사실에 매력을 느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사관계가 중요할 수밖에 없단 것이 그의 평소 생각이었기 때문이었다. 학회 활동을 하며 노동의 중요성에 눈뜨게 된 경험도 노무사가 되겠다는 그의 생각을 굳혔다. 

     노무사 자격증을 딴 후 민주노총에서 일하던 선배들이 민주노총 서울지역본부의 노동법률 지원센터에서 상담사로 자원 활동할 것을 제안했다. 이것을 받아들여 이 씨는 2002년 10월부터 4개월간 민주노총에서 상담사로 일했다. 상담사 일은 의외로 그의 적성에 꼭 맞았다. 상담하러 오는 노동자들은 자신의 삶을 풀어놓곤 했다. 이 씨는 “이야기 듣는 걸 좋아해 나에게 딱 맞는 직업이라 느꼈다”고 했다. 이 씨는 그렇게 자원 활동을 끝마치고 수습기간을 거쳐 2003년 3월 경기지역 일반노동조합의 법규부장으로 취업했다.

이마트 계산원으로 노동 현장을 직접 겪다

     이 씨가 노동자들을 위해 고군분투하게 된 데에는 노동 현장을 직접 겪었던 과거가 자리 잡고 있다. 그는 2004년 8월부터 약 1년간 이마트 계산원으로 근무했다. 당시 신세계 이마트 용인수 지점 계산원들이 노동조합을 꾸리는 것을 돕기 위해서였다. 

     노동조합의 정의와 사업주의 부당노동행위에 대해 설명하던 그에게 계산원들은 직접 들어와 도와 달라고 부탁했다. 이 씨는 ‘노동자들을 위해 일해 왔지만 노동자로서의 삶을 제대로 살아본 적은 없지 않았나’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생각에 그는 이마트 계산원으로 직접 노동 현장에 뛰어들게 됐다.

     그가 본 계산원의 근무 환경은 최악에 가까웠다. 높은 근무 강도에서부터 낮은 임금, 점장과 고객의 인격 모독까지 어느 하나 좋은 것이 없었다. 점장은 장갑을 끼고 일하게 해달라는 계산원들의 사소한 부탁도 들어주지 않았다. 문제가 생기면 모든 상황은 손님 위주로만 돌아갔고, 계산원은 잘못한 것이 없는데도 ‘죄송하다’며 고개를 숙여야 했다. 

     고객들은 계산원을 하찮게 보기 일쑤였고 동전을 던지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그는 “심지어 ‘물건 다 올리셨어요?’라는 질문에 ‘네가 뭔데 이래라 저래라냐’고 화내는 고객들도 있었다”고 말했다. 

     결국 스물세 명을 시작으로 2004년 12월 노동조합이 조직됐고 창립총회 후 회사 측과의 상견례가 있었다. 이 노무사의 정체를 몰랐던 회사 측은 이 때 발칵 뒤집혔다. 상견례가 끝나기 무섭게 그에게는 ‘누군지 다 알고 있으니 회사로 오라’는 전화가 걸려왔다. 그는 “회사에 들어가자 바바리코트 입고 무전기를 꽂은 보안요원이 쭉 깔려 있었다”고 당시 분위기를 회상했다. 회사 측은 노동조합 탄압을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노동조합 탈퇴서를 쓸 때까지 일을 시키지 않겠다고 협박하며 조합원들의 가족들에게까지 손을 뻗치기도 했다. 그는 “한 분은 남편이 삼성 직원이었는데, 남편이 면담에 불려가 ‘사직서를 쓰거나 부인을 노동조합에서 탈퇴시켜라’라 압박을 받기도 했다”고 전했다.

     결국 노동조합의 23명 중 19명은 회사의 탄압을 견디지 못하고 노조에서 탈퇴했다. 회사는 남은 네 명마저 비정규직이라는 이유로 계약 기간이 끝나기 무섭게 해고해 버렸다. 이 씨를 해고하기 위해서는 편법이 동원됐다. 일을 하는 그에게 사람을 붙여 계속 실수를 유도하기도 했다. 이 씨는 손님들에게 ‘회사가 노동조합을 탄압하고 있다’고 전하며 대항했다. 그는 “손님들에게 말을 하고 있는데 ‘끌어내’라는 소리와 함께 내가 순식간에 번쩍 들렸고 나는 나대로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고 회상했다. 

     업무 문제가 아니라 노동조합을 한다는 것만으로 이렇게까지 가혹한 탄압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은 하나의 충격이었다. 이 씨가 삼성 문제에 관심을 갖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그는 “당시 이마트가 노동조합을 허용할 수 없는 것이 삼성의 족벌 회사이기 때문이라는 말을 들었다”며 “그 이후로 삼성 문제에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다”고 말했다. 

반올림의 시작을 함께하다

     이 씨와 삼성의 인연은 이후로도 계속됐다. 그는 “삼성과는 마치 인연인 것처럼 멀리서도 일이 들어왔다”고 말했다. 삼성과의 재회는 삼성 반도체 공장에서 근무하다 백혈병으로 사망한 황유미 씨 아버지와의 만남으로시작됐다. 딸의 죽음에 의문을 품은 황 씨의 아버지는 2007년 다산인권센터를 찾았고, 다산인권센터는 민주노총의 이종란 노무사를 소개했다. 당시 이 씨는 2006년 9월부터 민주노총 경기법률원에서 일하고 있었다. 민주노총 사무실 문을 두드리는 건 대부분 중소기업 노동자들이나 비정규직 노동자였기에 그는 대기업인 삼성의 노동자가 찾아오는 것이 이상하다고 느꼈다. 고속터미널의 한 커피숍에서 만난 황상기 씨는 “딸이 화학 약품을 담갔다 빼는 일을 하다 백혈병에 걸렸는데, 그 옆에서 근무하던 사람도 백혈병이더라”며 이종란 노무사에게 도움을 청했다. 

     그는 “누가 봐도 석연치 않은 일이니 꼭 규명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약속드렸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다산인권센터 활동가 박진 씨와 함께 노동건강권 관련 19개의 단체를 모아 ‘삼성반도체 집단 백혈병 진상 규명과 노동 기본권 확보를 위한 공동대책위원회’를 꾸렸다. 제보자 수가 늘자 이종란 노무사가 상임활동을 맡아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 지킴이, 반올림’이라는 단체로 발전시켰다. 이 씨는 지난 11월 20일 일곱 번째 생일을 맞은 반올림과 여전히 함께하고 있다.

힘들지만 보람된 노무사의 길

     노무사로 일하며 힘든 적은 없었을까. 이 씨는 “주어진 인적 풀이나 한정된 역량에 비해 일이 너무 많다”고 입을 뗐다. 피해자가 많은 만큼 늘 일할 수밖에 없고, 그만큼 체력적으로도 힘들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씨는 정말 힘든 것은 ‘사람’이라고 털어 놓았다. 외부 환경이 어려울 때 내부에서 사람들이 흩어지고 갈등하는 것이 가장 아프다는 것이었다. 또 이미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들의 죽음을 견디는 것도 쉽지 않다고 고백했다. 2011년처럼 3개월마다 노동자들의 죽음을 마주했을 땐 받아들이기가 정말 힘들었다.

     그럼에도 이 씨는 조금씩 변화가 생기는 데서 보람을 느끼기에 노무사 일을 계속하고 있다. 그는 “예전에는 선전물을 나누어 주면 냉담하던 노동자들이 이젠 ‘수고하신다’고 말한다”며 “잘 보이지 않더라도 분명 변화는 일어나고 있다”고 강조했다. 옛날에는 삼성 말을 그대로 믿어 ‘반올림’의 활동을 ‘선동’으로 치부하던 노동자들이 이젠 자신들의 환경에 대해 문제의식을 갖고 반올림의 말에 귀 기울이고 있다. 그는 피해자들이 ‘반올림’과 관계를 맺으며 조금씩 부드러워지는 모습을 볼 때도 보람을 느낀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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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종란 노무사는 ‘또 하나의 약속’ 주인공 노무사 난주의 실제 인물이다.

영화 ‘또 하나의 약속’

     올해 초 황유미 씨의 얘기를 다룬 영화 ‘또 하나의 약속’이 개봉했다. 이종란 노무사는 영화 속 주인공인 노무사 난주의 실제 인물이다. ‘또 하나의 약속’에 별점을 준다면 몇 점을 주겠냐는 질문에 그는 “5점 중 4.5점을 주고 싶다”고 답했다. 사실 이 씨는 ‘또 하나의 약속’에 큰 기대를 걸지 않았다. 그 전에도 여러 번 영화화에 실패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시나리오도 읽지 않았고, 촬영 현장에도 가지 않았지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처음 영화를 보고 깜짝 놀랐다고 한다. 

     지나친 극화로 현실 묘사가 제대로 되지 않을 것을 걱정했지만 영화는 반도체 노동자들이 처한 환경을 생생하게 잡아냈다. ‘또 하나의 약속’은 반올림의 활동에도 큰 도움을 줬다. 그는 “삼성이 이번에 사과하고 협상한 것도 그 덕분인지도 모르겠다”며 고마움을 표했다. 

“돈 말고 삶의 다른 가치를 얻을 수 있는 직업이 노무사”

     근황을 묻자 이 씨는 “아직도 20대같은 기분”이라며 웃어 보였다. 20대에 했던 고민들을 아직도 하고 있으니 정신연령만큼은 20대인 셈이라는 것이다. 향후 계획에 대해서는 ‘노동자의 알 권리’ 선전을 계속해나가겠다고 밝혔다. 그는 반도체 공장에서 쓰이는 수백 가지 화학물질의 유해성을 지역 주민들과 노동자들에게 알리기 위해 활동할 계획이다. 동시에 현행법에서 보장돼 있는 ‘알 권리’ 실현을 위해 제도상 미흡한 부분을 고치고자 노력하고 있다. 

     그는 노무사가 되기를 희망하는 학생들에게 “이 직업을 통해 돈을 많이 벌어야겠다고 생각하진 않았으면 한다”고 조언했다. 노무사는 노동자나 사용자 둘 중 한 편을 택해야 하는데, 돈을 벌고 싶다면 사용자를 선택해야 하기 때문이다.이는 곧 정리해고를 쉽게 하거나 임금을 깎는 것을 돕게 되는 셈이다. 그는 “돈 말고 다른 삶의 가치를 얻고 싶을 때 노무사가 돼야 한다고 생각한다”며 인터뷰를 마무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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