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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AND’(에이랜드), ‘around the corner’, ‘culturestar’, ‘29cm’, ‘W concept’…. 온라인이든 오프라인이든 쇼핑을 하면서 누구나 한 번쯤 들러봤을, 들어봤을 매장이다. 이들의 공통점은 하나의 공간에 다양한 브랜드의 제품을 진열하고 있는 편집샵이라는 것이다. 고가의 최상급 상품을 취급하는 하이엔드 편집샵이 아니라 중저가의 상품을 취급하는 대형 편집샵이다. 매장에 들어가면 옷이나 신발, 가방이 브랜드별로 나뉘어 진열돼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최근 이런 편집샵의 문제점들이 드러나고 있다. 편집샵이 제공하는 다양성이 좋아 에이랜드를 자주 찾았던 전보성 씨(기계항공 13)는“ 요즘에는 (편집샵이) 초심을 잃은 것 같다”며 아쉬움을 표했다. 불행하게도 소비자만 싫증난 것이 아니다. 편집샵에 납품을 하는 신진디자이너들도 불만이 쌓일 대로 쌓였다.
편집샵은 어떻게 운영되나
한 매장에서 다수의 브랜드 제품을 판매하는 형태를 모두 편집샵이라고 할 순 없다. ‘편집샵’이라는 이름이 말해주듯 편집샵은 운영자의 확고한 취향으로 선별된 다양한 제품을 제공하는 매장이다. 소비자가 편집샵을 찾을 때 그는 매장에서 판매되는 물건이 주인의 취향을 바탕으로 선별돼 사입된 물건일 것이라고 기대한다. 이때 사입이란 직접 물건을 구매해 들여오는 것을 의미한다. 20년 전 우리나라에 처음 등장한 개인 편집샵 형태의 매장들은 그런 소비자의 기대를 충족시킬 수 있었을지 몰라도 지난 5년간 급속도로 성장한 대규모 편집샵들은 다르다. 이들에게 완사입 운영방식은 최우선적인 정책이 아니다.
* 완사입: 완전사입, 즉 편집샵에 들이는 모든 물건은 생산자에게 물건의 도매가액을 지불하고 들이는 것.
* 위탁판매: 브랜드 또는 디자이너에게 상품이 진열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주는 대가로 소매판매가에서 수수료를 취하는 것.
현재 대부분의 국내 편집샵들은 위탁 판매 방식을 사용하고 있다. 수수료는 매장마다 다르다. 온라인 편집샵의 경우 30% 내외이고 오프라인의 경우에는 30% 후반대로 책정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인기있고 매출이 큰 브랜드라면 수수료 0%, 완사입 계약이 이뤄지기도 한다. 결국 수수료는 철저히 시장의 논리에 따라 책정된다. 신생 브랜드나 신진 디자이너는 높은 수수료를 낼 수밖에 없다.
편집샵 입장에서는 위탁판매가 직접 물건을 도매가를 지불하고 사입하는 것보다 위험 부담이 적은 운영방식이다. 재고 처리의 부담이 디자이너에게 있기 때문이다. 매장이 30% 후반의 수수료를 취하는 위탁판매 형식은 사실 우리나라에서 백화점이 운영되는 방식과 같다. 이유리 교수(의류학과)는 편집샵이 백화점의 운영방식을 도입하고 있는 것에 대해“ (백화점은) 굉장히 바람직하지 못한 모델”이라며 “편집샵이 폭리를 취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높은 수수료에도 불구하고 신진 디자이너와 신생 브랜드가 대형 편집샵에 입점하려 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개인 매장을 열어 판매와 홍보를 하는 것 보다 편집샵에 의존하는 것이 경제적이라고 판단되기 때문이다.
디자이너 A씨는 1년이 조금 넘은 신생의류 브랜드를 혼자 경영하고 있다. 그동안 국내 편집샵 몇 곳에서 위탁판매를 하던 그는 지난 여름에 국내 편집샵과의 모든 계약을 해지했다. 그는 그 이유를 “위탁 판매를 하면 디자이너의 창의성이 제한받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또한 “편집샵이 완사입을하면 디자이너는 더 창작적이고 과감하게 시도할 수 있을 텐데 위탁판매를 하는 이상 어떤 것이 잘 팔리는지 눈치를 보게 된다”고 설명했다. 숨 막히는 이곳을 벗어나 A씨가 가려는 곳은 해외 시장이다.
디자이너 김가영 씨는 이제 2년이 된 신생 의류 브랜드의 공동경영자이다. 그는 국내와 유럽 시장에서 판매를 하고 있다. 그는 “디자이너들이 성장하기에 우리나라 풍토가 너무 척박하다”며 우리나라와 외국시장을 비교했다. 해외 편집샵들도 위탁을 전혀 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그만큼 사입하는 비중이 매우 크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해외 편집샵이 위탁판매를 하는 경우는, 편집샵의 직원으로서 상품 기획을 담당하는 바이어나 머천다이저(MD)들이 판단하기에 제품 가격이 굉장히 높거나 제품이 너무 특이해 위험 부담이 큰 경우이다. 그는 “해외 바이어들이 세미나를 오면 항상 ‘더 과감하게 더 독창적으로’를 강조하는데, 우리나라 편집샵에서 팔 것을 생각하면 그렇게 못 한다”며 답답함을 토로했다.
위탁판매를 하느냐 완사입을 하느냐는 브랜드의 생산부터 시즌이 끝난 후 재고 처분까지 영향을 미친다. 완사입을 하는 편집샵과 계약하는 경우 어떤 상품을 얼마만큼 입점시킬 것인지가 정해져 브랜드는 편집샵의 주문을 받은 만큼 생산한다. 편집샵은 시즌 내내 주문한 상품의 판매를 하고 시즌이 끝난 후에는 재고 처분의 책임을 지게 된다. 반면에 위탁판매를 하는 편집샵과 계약하는 경우, 브랜드는 팔릴지 안 팔릴지 모르는 상태에서 바이어나 MD의 조언 없이 생산을 진행한다. 편집샵은 시즌이 끝난 후 팔리지 않고 남아있는 재고를 브랜드에 반송한다. 재고 처분의 책임이 브랜드에게 돌아온다. 모든 디자이너에게 불리한 방식이지만 특히 신진 디자이너들에게 가혹하다.
높은 수수료 역시 디자이너들을 압박하는 요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thCenturyForgottenBoyBand’의 이학림 디자이너는 디자이너 입장에서 완사입이 항상 좋고 위탁판매가 항상 나쁜 것은 아니라고 설명한다. 상품의 매출이 큰 경우에는 납품하는 브랜드 입장에서 완사입이 덜 반갑다는 것이다. 그는 “플랫폼을 빌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고 빌리는 것에 대해서 내가 수수료라는 형식으로 대가를 지불하는 것에 불만이 없다”고 했지만 “문제는 수수료가 너무 높다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대형 편집샵은 디자이너를 이해하고 존중하는 마음이 없다”
소비자 전보성 씨는 더 이상 대형 편집샵을 자주 찾지 않는다. 그는 “(에이랜드가)디자인도 별로고 예전만큼 좋은 브랜드를 데려오지 않는다”고 그 이유를 설명했다. 편집샵이 매장의 철학과 일치하는 브랜드와 상품을 선별하는 과정이 사라진 듯하다. 디자이너 A씨는 천편일률적이면서 낮은 가격에, 호불호가 크게 갈리지 않는 옷을 만들어 파는 것을 돌려 말해 ‘맨투맨 장사’라고 불렀다. 그는 편집이 사라진 편집샵의 기저에 판매를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팔자’주의가 있다”며 “브랜드와 디자이너를이해하고 존중하는 마음이 없다”는 점을 지적했다.
대형 편집매장에 납품해왔던 디자이너 A씨는 매장이 옷을 진열할 때에 한 진열대에 옷걸이를 너무 많이 걸어서 옷이 상하는 문제뿐만 아니라 소비자가 옷을 제대로 힘들다는 전시의 문제가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매 시즌이 끝나고 팔리지 않은 물품이 반송될 때마다 분실되는 물량이 있지만 계약조건에 의해 보상을 받지 못하는 재고 관리의 문제 또한 있다.
디자이너 김가영 씨는 “나는 매출로만 평가 받는다”며 피드백을 제공하지 않는 편집샵을 비판했다. 해외 유명 편집샵 중 ‘오프닝세레모니’는 그 독보적인 위치에도 불구하고 위탁판매를 한다. 위탁판매를 하고 있지만 바이어, MD가 디자이너와 소통한다. 이들은 무슨 제품이 수요가 클지 예측을 해주고, 어떤 고객들에게 무슨 제품이 인기가 있었는지 분석해준다. 편집샵에 대한 소비자의 신뢰가 필요한 것과 마찬가지로 편집샵의 피드백을 통해 디자이너와 신뢰를 쌓는 것 역시 필요하다. 김 씨는 “(편집샵이) 1~2주, 길게는 한두 달 보다가 안 팔리면 그냥 나가라고 한다”며 “고객을 직접 만날 수 없기 때문에 어떤 고객이 우리 브랜드를 찾는지 알기 힘들다”고 호소했다.
대안을 찾아서
이유리 교수는 현 시장에 대해서 “모델로 삼을 만한 구조가 백화점 정도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2010년대 초반에 새로운 형태의 매장으로 소비자에게 재미와 다양성을 제공하며 대규모로 성장한 편집샵들은 이제 백화점을 흉내내고 있다. 백화점 식의 유통구조는 신진 디자이너의 자유로운 창의력이 발휘될 만한 환경이 아니다. 이 교수는 “패션업에서 점점 영향력이 약해져 백화점이 한계를 맞이한 것처럼 에이랜드를 위시한 몇 개의 대규모 편집샵도 한계를 맞이하게 될 것”이라고 예측했다. 소비자들이 편집샵이 제공하는 것에 대해 ‘진부하다’ 또는 ‘백화점이랑 다를 바가 없다’고 느끼고 구매를 꺼리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 교수는 “에이랜드 같이 규모가 커지면서 백화점 흉내를 내고 있는 편집샵들한테는 철퇴를 가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 힘은 법도 아니고 정책도 아니고, 소비자이거나 디자이너 스스로가 돼야 한다”며 현재의 구조를 바꾸기 위해서는 공평하게 이윤을 나누는 편집샵을 찾는 디자이너의 노력이 필요함을 강조했다. 신진 디자이너들이 노출과 성장을 위해 ‘울며 겨자먹기’로 편집샵에 남아 있음에도 편집샵은 문제 해결 없이 계속해서 이윤을 내며 규모를 부풀려간다. 규모가 커질수록 신진디자이너들에게는 매력적인 유통 채널이 되기 때문에 신진 디자이너들은 또 대거 납품하는 악순환이 반복된다. 신진 디자이너들이 악덕 편집샵과 계약을 하지 않는 것은 이 악순환을 끊는 한 가지 방법이다.
하지만 디자이너들은 “위탁 안 하는 곳 찾기 정말 힘들다”고 입을 모은다. 이학림 디자이너는 최근에 국내에서 완사입 형태로 운영되는 편집샵 ‘비이커’와 계약을 했다. ‘비이커’와 같은 편집샵은 매우 드물다. 위탁판매를 하지만 디자이너들이 요구하는 피드백을 제공하는 편집샵도 있다. 라이프스타일 편집샵 ‘삼각관계’는 디자이너와 함께 성장하자는 마음으로 소비자와 매장, 그리고 디자이너의 유대를 끈끈하게 유지하고 있다. 입소문을 타고 단골을 확보한 삼각관계는 2년 안에 3호점까지 열었다. 1호점에서 처음 전시한 상품의 디자이너들중 몇은 실제로 삼각관계와 함께 성장해 개인 매장을 열었다.

ⓒ 허상우 사진기자
편집샵 외에 신진디자이너들이 사용할만한 대안적 유통 채널이 없을까? 백화점 팝업 스토어로 입점해 백화점에서 판매를 하는 방법이 있다. 백화점은 단기적으로 판매를 할 수 있는 장소를 제공하지만 여전히 높은 수수료를 요구하고 디자이너 본인이 매장에 상주해야 한다는 조건을 붙이기도 해 소규모 인원으로 운영되는 신생 브랜드에게는 부담스럽다. 홍대나 이태원의 플리마켓을 이용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하지만 플리마켓은 수공예가들에게는 판매하기
에 괜찮은 장소일지 모르지만 의류 디자이너에게는 불편하다는 단점이 있다. 소비자들이 옷을 착용할 만한 여건이 나쁘기 때문이다.
대안적 유통 플랫폼에 대해 이유리 교수에게 묻자 그는 “무한한 가능성이 있는 인터넷이 있다”고 대답했다. 실제로 온라인 판매 플랫폼인 ‘shopify’(쇼피파이)는 블로그, 핀터레스트, 트위터, 페이스북을 통해 판매가 가능하게 한다. 쇼피파이는 누구나 원하는 채널을 통해 온라인 판매를 할 수 있게 한다. 예를 들면, 쇼피파이가 페이스북과 연동돼 페이스북 페이지에서 ‘buy’ 버튼을 눌러 결제가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하지만 편집샵에 대한 수요가 계속 있는 한 편집샵은 신진 디자이너들의 플랫폼 역할을 한다. 신진 디자이너가 편집샵을 통해 소비자들에게 어렵지 않게 다가갈 수 있다는 점에서 편집샵은 좋은 플랫폼이다. 이 교수는 “오프라인 매장은 온라인 매장이 제공할 수 없는 재미와 가치를 가지고 있다”며 편집샵의 강점을 설명했다. 단지, 그런 강점이 있는 플랫폼이 ‘악덕 기업주’로 변모하게 된 것에 대해서는 “소규모 창의성을 존중하지 않는 기업 문화를 탓한다”고 덧붙였다.
변화가 필요하다. 디자이너 A씨는 “세계 4대 패션위크에 서울 패션위크가 들어가게 노력한다는데, 전반적인 시스템부터 변하지 않으면 어림없다”며 “한국패션이 발전하려면 브랜드와 디자이너의 가치를 존중하는 문화가 만들어져야 한다”고 단호하게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