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월 8일, 중앙도서관 6층 난간에서 시위를 하던 학생이 떨어졌다. 커다란 덩치의 학생은 곧 전경들에 의해 둘러싸였고 그 위에 최루탄 가루가 하얗게 덮였다. 죽음을 보고 몰려든 학생들의 시위는 더욱 뜨겁게 달아올랐다. 암울한 시기, 지식인의 책임과 스스로의 삶의 무게 속에서 고뇌하던 한 평범한 대학생 황정하가 민주 열사로 산화한 순간이었다.
유복한 집안에서의 성장, 사회를 마주한 충격
황정하는 부산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일찍 돌아가셨지만, 할아버지는 독립운동가였고 어머니는 의사인 유복한 집안이었다. 경남고등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한 그는 서울대 치과대학에 합격했지만 색약으로 입학이 취소됐고, 다음 해 재수해서 서울대 공대에 입학했다.
80년대 초에는 대학생이 많지 않아서 대학생에 대한 사회적 기대감이 컸고, 지식인의 책임을 느끼고 노동운동과 야학에 투신한 대학생들이 많았다. 그런 점에서 황정하도 당시 학생운동을 하던 사람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는 고등학교 선배의 권유로‘ 국제경제학회’에 들어갔다. 금서를 읽고, 토론하고, 시위를 하는 소위 말해 ‘언더서클’이었다. 학회에서 암울한 시대를 처음 마주하고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를 고민하면서, 그는 중학교만 졸업하고 공장에 간 아이들을 가르치는 야학교사로 활동했다.
대학가에서는 전두환 군부독재정권에 대한 ‘반독재민주화투쟁’이 화두였고 연일 시위가 일어나고 있었다. 특히 80년도에 입학하면서 5·18광주민주화운동을 목격한 황정하는 내내 광주시민들에 대한 미안함을 이야기하곤 했다. 또한 유복한 가정에서 막내로 자라 명문대에 입학한 자신에게 예견되는 삶의 모습과, 새롭게 다가오는 한국의 정치·경제적 시대상황이 요구하는 모습의 괴리로 무척 괴로워하곤 했다. 학교 공부를 하는 것조차 자기를 위하는 일로 생각해 도덕적으로 힘들어했고, 어떻게‘ 지식인의 허위의식’을 깨고 실천적인 삶을 살아갈 것인가를 항상 고민했다. 시대적 상황이 요구하는 학생운동과 그 이후의 불확실한 미래가 주는 근원적인 고민은 그가 항상 토로하던 문제였다.

그렇지만 황정하는 수더분한 성격에 여린 마음씨를 지녔고, 본의 아닌 불효에 가슴 아파하는 보통의 학생이기도 했다. 황정하와 친하게 지냈던 학과 선후배들은 그를 덩치에 맞지 않게 애교 있던 후배로 회상했다. 180cm가 넘는 큰 키에 덩치도 듬직했지만 항상 “형, 형” 하며 친근하게 달라붙곤 했다. 막걸리도 잘 마시고, 담배도 잘 피웠다. 친구들과 모여 술을 마시면 2차, 3차, 끝까지 남아서 열띤 토론을 벌이곤 했다.
하지만 술자리에서 어머니 이야기를 하며 애절하게 서글퍼하는 얼굴 또한 황정하의 모습이었다. 그의 어머니는 아들이 학생운동을 하는 것을 탐탁치 않아했다. 그렇지만 민주화투쟁이라는 대의를 포기할 수는 없었다. 형과 방을 합치라는 편지를 받고는 학생운동하기가 자유롭지 않을 것 같아 가족과 연락을 끊고 친구 집을 전전하기도 했다. 어머니는 서울에 상경해 3일간 아들을 찾아 다녔다. 그럴수록 학회활동과 야학활동에 자신을 더욱 몰입시켜가는 모습은 이러한 갈등의 한 단면이었다.
‘민족의 생존과 번영을 위한 민주화 투쟁’ 을 주동하기까지
그러던 중 1983년 가을, 황정하는 야학 연합회 사건에 연루돼 심리적 압박과 고통을 받는다. 그와 함께 진로 문제와 가족 문제가 시위를 주동하는 중요한 계기가 됐다. 평범하게 졸업하고 그럭저럭 살아갈 것인가, 시위를 하고 감옥에 갈 것인가, 노동 현장에 투신할 것인가?
시위는 대학생들에게 가장 적극적인 자기선택 방식이었다. 학내에는 사복경찰이 깔려 있었고 단 서너 명의 학생이 모여 있지도 못했다. 그래서 의견을 표시하기 위해서는 대부분 기습시위를 했다. 주동자가 잘 보이는 곳에서 시선을 끌며 잡혀갈 때까지 버티는데, 어떤 사람은 10초밖에 못 버티기도 하고 대부분은 기껏해야 5분에 머물렀지만 그것이 신호가 돼 학생들이 모이고 구호를 외칠 수 있었다. 제대로 된 정당도, 이익집단도 없고 바른소리를 할 수 없는 시절이었기에, 의견을 펼치는 방식이 그러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4학년에 그는 시위 주동을 결심하고 소위‘ D팀(데모 팀)’에 들어갔다. 11월 11일로 예정된 레이건 미국 대통령 방한에 맞춰 전두환 군사독재정권의 횡포에 맞서고자 했다. 미국과 소련의 군사적 대결구도 속에서 동북아 정세를 확고히 하고자 하는 레이건 방문의 의미를 학우들에게 알리고 이를 규탄하려는 것이었다.
도서관 6층에서 추락하다
1983년 11월 8일, 황정하는 가방에 밧줄과 유인물, 확성기를 들고 ‘민족의 생존과 번영을 위한 민주화 투쟁’에 나섰다. 덩치가 큰 황정하와 다른 한 명이 중앙도서관 베란다에서 시선을 끄는 역할을 맡기로 하고, 나머지가 지상에서 횃불을 들고 사람들을 모으기로 했다. 황정하는 도서관 6층 창문을 통해 밧줄을 타고 내려가 5층 외벽의 튀어나온 곳에 서서 유인물을 뿌리고 시선을 끌기로 했다. 도서관 앞쪽 창문은 모두 막혀 있었지만 뒤편에 작은 빈틈이 있었기 때문에, 일단 뒤쪽 창문으로 나가서 앞쪽으로 돌아나갈 계획이었다.
하지만 황정하가 창문으로 내려가려 할 때에 도서관 열람실에 앉아 있던 사복경찰이 이미 눈치를 채고‘ 저놈 잡아라!’ 하며 달려들었다. 나중에 내려가기로 한 학생이 이어 난간으로 내려갔지만, 먼저 거기 도착해야 했을 황정하가 보이지 않았다. 이미 떨어져 사고를 당하고 말았던 것이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황정하가 떨어진 뒤, 웅성대는 학생들 사이로 몰려든 경찰이 급박하게 그의 윗옷을 벗겨 피가 흐르는 머리를 가렸다. 추락한 황정하를 향해 학생들이 몰려들었고, 시위는 격해졌다. 뿌연 최루탄 가루가 하얗게 그의 몸 위에 쌓였다. 하지만 밀려드는 전투경찰에 학생들은 뿔뿔이 흩어질 수밖에 없었다. 다른 두 명의 동지들은 이내 붙잡혀 관악경찰서로 끌려갔다. 다른 세 명은 현장에서 검거되지 않았지만 수배대상이 됐다가 11일에 다시 황정하를 기억하자는, ‘피의 대가 쟁취하자’라는 이름의 시위를 벌이고 검거됐다. 동지들 모두는 그날 구속이 확정되고 영등포 구치소로 옮겨졌다.

한편 황정하는 신림 양지병원에 옮겨졌다가 부상이 심각해 바로 혜화 서울대병원으로 옮겨졌다. 그곳에는 서울대 의대를 간 황정하의 형도 있었다. 간호 실습을 하던 여학생의 말에 따르면, 병원에 도착했을 때 이미 가망이 없었으며 병원에서는 억지로 인공호흡을 해 생명을 연장했을 뿐이었다. 소식을 듣고 찾아온 친구들은 그저 근처에 가서 서성일 수 밖에 없었다. 황정하는 같은 달 16일 끝내 운명했고, 곧 벽제 화장터에서 화장됐다. 친구들은 나중에야 그 소식을 전화로 들을 수 있었다.
본부 서클 소속이었던 강태호(경제 78·졸업) 씨는 “경찰이 정하를 밀었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경찰이 밀려들고 밧줄 하나에 의지한 채 매달려 있던 상황에서의 심리적 압박과 불안을 생각해보면, 결국은 사실상 타살이 아니었나 생각한다” 고 말했다.
한편 영등포 구치소로 잡혀간 동지들은 독방에 갇혀 있었다. 서로 대화조차 나눌 수 없었지만 황정하가 끝내 운명했다는 소식을 듣고 추모 행사를 올리고자 했다. 하지만 구치소 측이 허락하지 않자 단식 농성을 결행했다. 구치소 소장과 협상 끝에, 사회자 한 명이 나와서 추모 행사를 진행할 수 있게 되었다. 동지들은 각각 독방 안에서 황정하가 평소 좋아했던 사과 한 알씩을 들고 황정하를 추모했다.
추모비를 세우기까지
국제경제학회의 동료선후배들은 황정하가 떠난 뒤 매년 추모행사를 지내왔다. 화장된 뒤 유골은 길가에 뿌려졌고, 학교는 여전히 사복 경찰이 지키고 있었기 때문에 처음에는 황정하를 추모할 공간이 없었다. 그래서 이들은 우이동 유원지의‘ 사슴목장’에 매년 모여 황정하의 제사를 지냈다. 이후 1989년에 국제경제학회 동료선후배들의 주도 하에 경남고등학교 동창, 야학·토목공학과 동료들이 모금해 추모비를 제작했다. 양성용(조소 84·졸업) 씨가 디자인했고, 비문에는 백기완 선생의 헌정시‘벗이여 일어나라’가 새겨졌다.
그러나 제작된 추모비가 서울대 안으로 들어오는 과정에서도 곡절이 있었다. 교문 앞을 지키던 형사들에 의해 관악경찰서로 트럭 채 압송됐던 것이다. 그 후 경찰에 항의하고 학교 측과 협의한 끝에 결국 추모비를 되찾아 학내에 반입할 수 있게 됐고, 지금은 해동학술문화관 자리가 된 공대 연못 옆에 자리를 잡아 세웠다.
그 후 ‘민주화의 길’이 만들어지면서 열사들의 추모비들이 학교의 중심부로 옮겨졌다. 그 과정에서 황정하의 추모비도 현재의 중앙도서관 입구에 오게 됐다. 황정하의 추모비는 서울대 내에 세워진 첫 민주열사의 추모비였다.

가족들의 아픔
자식이 학생운동을 하다 죽었을 때, 부모의 반응은 대개 두 가지로 갈린다. 생전에는 학생 운동하는 것을 반대했으면서도 자식이 죽고 난 뒤에 어떤 생각에서 살아갔었는지를 되새기면서 적극적으로 유가족 모임에서 활동하기도 한다. 반면에 자식을 잃은 슬픔과 이해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서버린 현실에 자식을 가슴에 묻고 살아가는 경우도 있다. 황정하의 가족들은 후자였다.
가족들은 학생운동을 한다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고, 더군다나 그로 인해 죽음을 맞았다는 사실을 믿고 싶어 하지 않았다. 학회의 동료들과도 잘 만나지 않으려 했다. 이후 민주화 열사들의 명예를 회복하고 보상하던 시기가 있었는데 이 때 가족들을 만날 수 있었다. 황정하의 친한 선배였던 이재철(토목 79·졸업) 씨는 “황정하의 형을 만났다. 30여 년간 덮어두고 있으면서, 기회가 있었으면 뭔가를 하려 했지만 하지 못했는데, 동료·선후배들이 대신 해줘서 고맙다고 했다”고 회상했다.
살아 있는 사람들의 시선
황정하의 선후배, 동료들은 매년 11월 8일이 있는 주 토요일에 모여 황정하를 추모한다. 3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살아 있는 사람들은 여러 모습으로 삶의 길을 걸어왔다. 누구는 군대를 다녀와서 학업을 마쳤고 누구는 감옥을 다녀와서 회사를 세웠다. 누구는 학원 선생이 됐고 누구는 기자가 됐다. 살아가는 모습은 각기 다르지만 황정하의 죽음은 매년 이들을 다시 모이게 하는 계기가 되고 있다.
동료들이 바라보는 황정하는 ‘우리가 살아가는 과정이 중단돼있는 친구, 그 과정을 함께하지 못한 안타까움이 있는 친구’다. 30년이 흘러 추모 행사에 모인 친구들은 “우리는 중년의 모습이 됐지만 영정 속의 황정하는 늙지를 않는다”고 웃으며 말한다. 하지만 함께 일군 민주주의가 후퇴하고, 함께 만들어가려고 했던 사회가 부정당하는 현실에 답답함을 느끼기도 한다. 강태호 씨는 “우리는 30년간 이 사회의 일원으로서 활동해왔기 때문에 지금의 우리 사회의 모습에 대해서 책임이 있지 않나. 우리가 시위하던 그 시대는 더 암울했지만 더 순수했고 무엇인가를 하고자 했던 열망으로 가득 찼던 시대로 남아 있다”고 말했다. 황정하는 암울한 시대였지만 또한 가장 순수했던 시대 속, 고뇌하는 청년의 모습 그대로 영정 속에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