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업대란 속에서 인턴에 대한 관심도 날로 높아가고 있다. 하지만 인턴 일이 어떤 건지는 소문만 무성하다. 어디 갔더니 복사만 시켰다더라, 노가다만 시켰다 등등, 인턴 과정이 노동 착취의 수단이란 말도 많다. 취업을 위한 경력에 도움이 된단 말도 많다. 인턴 중에서도 기자 인턴은 어떨까? 살인적인 경쟁률을 자랑하는 기자 시험을 안 쳐도 기자일은 잠시 시켜준다는데 자연히 끌리지 않는가? 역시나 노가다일까봐 걱정되는가?
인턴 기자 지원과 선발 과정은?
처음 정보를 접한 건 ㄷ일보 독자이신 어머니를 통해서였다. 어떻게든 딸자식이 취업대란에서 유리한 고지를 차지했으면 하는 마음에 내게 얘길 하셨나보다. 다른 인턴 기자의 경우 대부분 언론고시 사이트에서 정보를 접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ㄷ사에 대해 평소에 그리 좋은 감정을 가졌던 건 아니지만 장래희망 중 하나가 기자였던 만큼 도전해 볼 필요를 느꼈다. 선발 인원은 약 20명 정도였으나 신청인원은 200명이 넘었다. 선발 절차는 서류, 면접 두 가지 단계로 진행됐다. 서류 전형은 자기소개서와 영어 점수(Teps의 경우 750이상)등으로 이루어졌다. 2차 면접은 의외로 간단했다. 5명 지원자들이 같이 면접실에 들어가 자기소개를 포함해 3개 정도의 질문을 받았다. 질문은 랜덤 했다. 추후에 다른 인턴 기자들과 이야기를 맞춰보니 “인생관이 무엇인가?”라는 질문도 있었다고 한다. 선발에 영향을 끼친 건 자기소개서와 면접이 컸던 듯 하다. 영어 점수는 필자가 붙은 것으로 추측할 때(Teps 770) 그다지 영향력이 없다고 생각된다.
“기자는 혼자 다니는게 원칙”
1월 3일 첫 출근을 한 날도 ‘역시’ 지각했다. 하지만 신문사에선 시간 준수가 큰 규약이다. 관악타임에 몸을 맞춰 살던 나였지만 여기선 2~3분이라도 늦다간 깨지기 십상이란 걸 직감했다. 첫 출근 날의 흥분됐던 마음과 당황스러움은 잊히지 않는다. 자신감 있고 당당하게 광화문으로 출근한다는 나의 시나리오는 007 가방만한 노트북 가방 앞에서 깨지고 말았다. 커리어 우먼처럼 폼이 나긴 커녕 아빠 가방을 메고 나온 어린애 같았다. 인턴 기간은 5주였다. 처음 3일 동안은 기사 쓰는 기본 방법, 편집장을 비롯한 각 부서 차장의 강의가 있었다. 그리고 4주 동안은 각각 경제부 2주, 사회부, 문화부를 1주 씩 돌았다. 기자 노릇 4주 동안 처음으로 다가왔던 사실은 기자는 꼭 혼자 다닌다는 사실이었다. 신문사엔 생각보다 기자 수가 많이 부족하다. 그래서 그런지 기자들이 같이 다니는 건 취재력의 낭비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나는 기자직 첫 날, 이마트의 새로 생긴 코너를 돌아보란 미션 하나만 받은 채 널따란 서울 시내에 혼자 수첩에 펜을 들고 버려졌다.
‘기사생산’을 위해 존재하는 기자의 하루
기존에 학내 언론 기자 노릇을 해봤다곤 하지만 인터뷰 전에 떨리는 건 어쩔 수가 없다. 게다가 담당 기자에게서 미션을 받는 건 항상 당일 아침이다. 아무것도 모른 채 처음 만나는 누군가와 인터뷰를 하고 결과물을 저녁까지 제출해야 한단 건 꽤 스트레스였다. 취재 둘째 날, 화장품 회사 담당자들과 처음 만나 웃고 설명도 듣고 점심도 먹었다. 말은 쉽지만 참 힘든 하루였다. 기자들의 하루는 결코 쉽지 않다. 물론 일선 기자들의 의견을 종합해 보면 회사 안에 꼭 들어올 필요가 없다는 결정적인 장점이 있다. 마감 시간 맞춰 기사를 전송하기만 하면 굳이 상사 얼굴 보며 기분 상할 필요가 없는 거다. 하지만 하루라는 시간 안에 기사가 나가는 만큼 기사를 갈고 닦는 과정은 전적으로 기자의 역량에 달렸다. 기자직을 뽑는 과정이 유독 복잡한 것도 기사의 질이 기자에게 달려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인턴 기자의 하루도 그다지 쉽지 않았다. 인턴 기자에게 뭘 잘하리라고 특별히 기대하진 않지만 분명 지시를 수행하긴 해야 했다. 보통 아침에 지시를 받고 오후 5시 정도까지 취재를 계획하고 진행하며 6시 쯤 정리한 자료를 담당 기자님께 드리는 것으로 하루가 진행됐다. 가끔은 내가 취재한 자료를 바탕으로 내 기사를 써보고 피드백도 받았다.
세상의 10대들은 모두 어디로 갔나
한 번은 10대 청소년의 트렌드를 분석하는 기획 기사에서 10대 인터뷰를 해오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막막했다. 세상에 그 많은 10대들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내가 지방 출신인 만큼 기껏 아는 후배나 친구 동생들도 서울에 있긴 만무했다. 그래도 누구에게 물어볼 수가 없다. 혹시 물어보더라도 돌아오는 대답은 “길가에 아무나 잡아”. 랜덤한 표본은 기자의 생명이다. 그래서 하루는 신촌 바닥을 헤매며 ‘도를 아십니까’ 행세를 했다. 왜 그날따라 사람들 발걸음이 모두 바빠 보이던지. 롯데리아, 버거킹, 맥도날드는 기본으로 순찰했고 영화관 앞에서도 10대로 보이는 학생들을 몇 번씩이나 잡았다. 결국 10 번이 넘게 거절당한 끝에 겨우 고등학생 3 명을 만나 인터뷰를 할 수 있었다. 그 때 느낀 뻘줌함 만큼이나 무언가 ‘섹시한 케이스’를 잡았단 기쁨도 말로 표현하기 힘들었다.
서울역 노숙자 취재에 뛰어들다
한 달 내내 하루 기본 5천원부터 많을 땐 만원까지 교통비가 들었다. 덕분에 서울 구경 하나는 제대로 했다. 이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건 무엇보다 사회부 취재다. 내가 사회부 사건팀에 배정된 날 서울역에서 노숙자 두 명이 사망한 사건이 발생했다. 설마설마 했지만 역시나 당일 취재 과제는 서울역이었다. 그 중에서도 가족이 단체로 노숙하는 예를 찾아오란 지시를 받았다. 지금 생각해도 막막했다. 그래도 뜻이 있으면 길은 있는지 서울역의 한 노숙자 분의 소개로 ‘쪽방’에서 생활하는 가족을 찾을 수 있었다. 쪽방촌은 아이러니하게도 힐튼 호텔이 올려다 보이는 길가에 위치했다. 이제 겨우 10개월 된 아기를 보며 “한 달 집세도 밀렸다. 고정적인 수입원이 없어 날씨가 풀리면 다시 노숙을 시작해야 될 듯”하다는 말이 그렇게 와 닿기는 처음이었다.
기자, 남 대신 세상을 봐주는 직업
이런저런 인터뷰 및 스케치 기사를 쓰며 든 생각은 기자란 독자들 대신 세상을 봐주는 사람이란 점이었다. 내가 여기서 양심적 병역거부 판결이 어떻게 나는지 궁금하면 기자가 법원에 가서 취재를 해오는 것이다. ‘그때 그 사람들’ 영화를 보러 갈지 고민될 때 기자는 먼저 영화를 보고 와 안내를 해줘야 한다. 다들 알고 있는 역할이지만 정작 잊혀지기 쉽다. 언론의 사회적 역할이 어쩐다는 추상적인 얘기들 속에서 기자는 엄청난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는 정의의 투사처럼 생각된다. 하지만 말단 중의 말단 인턴 기자를 경험하면서 내가 느낀 기자 본연의 역할은 남 대신 세상을 봐주는 직업이란 게 가장 컸다.
감정 노동은 곱빼기 알파다
현직 기자들에게 “기자 직업 좋으세요?”라고 물어보면 대부분 돌아오는 대답이 “너무 좋다”다. 물론 나이 들수록 남들보다 월급도 적고 승진하는 일도 거의 없고 자기 시간도 없다지만 천직이란 것이다. 기자란 직함을 걸고 평범한 직장인들이 만날 수 없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고 남들이 안 가본 곳에 가볼 수 있단다. 게다가 자기가 하루하루 쓰는 기사가 역사의 기록으로 남는 게 좋다고 한다. 즉 한 마디로 정리하면 기자 적성은 ‘따로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러 가지 악조건 속에서 견딜 수 있는 방법은 일에 대한 만족감 밖에 없다. 개인적으로 난 새로운 사람을 ‘매일’ 만나야 하고 항상 상대방을 편하게 말하도록 웃어야 하고 항상 나를 평가하는 결과물을 제출한다는 사실이 스트레스였다. 육체적 노동에 더하여 감정 노동도 곱빼기 알파가 됐던 거다. 인턴 과정을 시작하며 많이 받았던 질문 중 하나는 “왜 하필 ㄷ사냐”는 질문이다. ㄷ사의 논조에 대한 평가가 그다지 좋지 않고 나 역시 그랬다. 하지만 정작 내가 일하면서 ㄷ사의 보수적인 논조를 비판할 일은 한 번도 없었다. 말단 인턴 기자에게 논조를 얘기할 기회는 당연히 없다. 기자가 한 번 데스킹을 맡긴 기사를 다시 기자가 손 볼 기회는 시간상으로나 권한으로나 없다. 물론 편집권도 사설도 마찬가지다. 일간지의 한시가 바쁜 사이클 내에서는 일반 시민이 자기 살기 바빠 정치를 못하듯, 일반 기자들은 편집권에 대한 욕심이 없다. 일종의 역할 분담이란 것이다. 하지만 자기가 쓴 글에 대한 책임을 개인이 지지 못하는 역할 분담이 얼마나 의미가 있을진 아직 의문이다.
노트북만큼 무거웠던 팩트에 대한 부담감
한 달 간의 인턴을 마치고 10만원 수표가 6장 든 봉투를 받았을 때의 기쁨은 수료증을 받았을 때보다 컸다. 사실 이 돈은 일에 대한 수고비가 아니다. 노동부에서 제공하는 연수 지원금인 것. 난생 처음으로 수표를 통장에 입금하는 감동이 그 어려움(?)만큼이나 물결쳤다. 어깨를 짓누르던 노트북을 반납했을 때도 참 홀가분했다. 노트북의 무게만큼이나 내가 취재해 온 사실을 책임져야한단 부담감이 컸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게 인턴 과정이 끝났다. 1 달간의 과정이 끝난 후 내게 남은 건 사옥 앞에서 웃고 찍은 사진과 동료들, 돈과 수료증, 기자직에 대한 생각의 변화, 무엇보다 가장 큰 건 인생을 열심히 살아야겠단 열정이었다. 다양한 세상을 맛본 자극은 그렇게 내게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