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9시, 전국 각지에서 찾아온 관광버스가 서울대 정문을 통과했다. 정차한 버스에서는 앳된 얼굴의 중고생들이 우르르 내렸다. 정문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기 바쁜 견학생들에게 인터뷰를 위해 다가가자, 오히려 그들이 기자를 향해 질문하기 시작했다. “진짜 서울대에요?”,“아이큐는 몇이예요?”와 같은 질문들 속에는 이들이 생각하는 서울대의 이미지가 있었다.

서울대 견학이 함축하는 의미
‘말로만 듣던’ 서울대에 왔다는 사실에 학생들은 기대감을 감추지 못했다. 10명이 넘는 견학생들에게 물었지만, 서울대 견학이 기대되는 이유는 같았다. 이들은 “서울대학교는 공부 잘하는 사람들이 많이 오니까 좋아 보인다”, “‘넘사벽’같다”라는 말로 콕 집어 대학 서열 꼭대기에 있는 서울대가 “신기하다”고 말했다. 인터뷰 도중 서울대에 진학하고자 하는 학생을 만나기도 했다. 견학생 무리 속엔 자신을 ‘예비 서울대인’이라고 칭하는 아이도 있었다. 서울대에 오고 싶은 이유를 묻자 아이는 “멋있잖아요, 서울대라고 하면 누구나 다 알고. 그러니까 자부심도 생길 것 같아요”라고 대답했다.
대다수 학생들이 서울대까지 견학 온 경위는 “선생님이 오자고 해서” 또는 “학교에서 정해줘서”였다. 같은 질문을 반복했지만 서울대에 견학을 온 이유엔 학생들의 의사를 찾아 보기 힘들었다. 학교가 수학여행이나 진로 활동, 동아리 체험학습과 같은 행사 일정으로 서울대 캠퍼스 투어를 채택하면 아이들은 군말 없이 따라온 듯했다.
수동성에도 불구하고, 서울대에 온 학생들은 만족스러운 눈치였다. 교문에서는 아침 공기가 데워지기도 전에 견학을 마치고 학교를 떠나는 무리를 만날 수 있었다. 2시간 남짓한 견학에서 이들은 뭘 배웠을까. 오늘 견학 어땠냐는 말에 시간이 금방 지나가 “아쉬웠다”고 말하는 학생도 있었고, “다리 아팠어요”라고 답하는 학생도 있었다. 그러나 대다수는 활짝 웃으며 좋았다고 답했다. 끝에는 “공부 열심히 해서 서울대 오고 싶어요”라고 덧붙였다.
중고등학생들의 캠퍼스 투어는 학교의 체험학습 차원에서 진행된다. 그렇다면 학교는 체험학습의 장소로 서울대를 고른 이유는 무엇일까. 이른 아침부터 미술관 앞에서 분주히 아이들을 지도하 던 한 교사에게 그 이유를 물었다. 스스로를 체험활동 전문업체 직원이라고 밝힌 A 씨는 캠퍼스 투어를 “회사에서 설계하는 진로 활동 중 하나”라고 소개했다. 이들은 견학이 멘토링이나 강연과는 전혀 다른 효과를 가진다고 했다. A 씨는 (진로활동으로서의) 캠퍼스 투어가 “직접적인 경험을 통해 (학생들에게) 학습 동기를 부여”하는 역할을 한다고 말했다.
학교는 학생들의 학습 의지를 고양하는 방법으로 견학이란 손쉬운 방법을 택했다. 견학이 학생들에게 실질적인 효과가 있을지에 대한 고민은 선행됐을까. 아이들에게 특정 대학의 입학이란 분명한 목표를 제시하는 것이 무작정 공부하라고 강요하는 것보다는 나을지 모른다. 최고의 교육을 받고자 최고의 대학에 가고자 하는 결심이 모두 학벌주의의 산물인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학생들에게 학벌이라는 맹목적으로 목표를 제시하는 태도는 학생들이 학문을 목적이 아닌 수단으로 보게 만들기 쉽다.
‘최고’ 대학으로의 진학을 목표로 삼을 때, 학교와 학생은 그 의미를 명확히 설정해야 한다. 필요한 것은 교육기관으로서의 대학과 학벌 획득 도구로서의 대학의 분리다. 교육사회학을 강의하는 전은희 교수는 “최고(의 대학이)라 할 때, 학문적 의미의 최고와 세속적 의미의 최고가 구분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전 교수에 따르면, 학생들이 특정 학문 분야에서 최고의 위상을 가진 대학을 동경하는 마음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 경우 학생들의 선망은 대학의 위상이 아닌, 대학이 제공하는 교육을 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 교수는 세속적 의미의 최고 대학, 즉 학벌이란 신분을 얻기 위해 대학을 선망하는 현상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주장한다. 즉 교육기관으로서의 대학과 학벌 획득 도구로서의 대학을 분리해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전 교수는 “배움의 동기가 사회적 지위의 성취에 있다면 세속적 의미의 최고 대학 추구는 명백히 경계해야”한다고 지적했다.

견학이 체험이란 목적 되찾으려면
캠퍼스 투어의 본래 목적은 체험을 통해 예비 대학생의 궁금증을 해소하는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견학은 대학이 낯선 이들을 대상으로 캠퍼스를 개방하는 역할을 한다. 그러나 현행 캠퍼스 투어는 대학 생활의 체험보단 서울대 관광에 가깝다. 견학생들이 캠퍼스 투어를 통해 할 수 있는 활동은 박물관과 미술관을 비롯한 캠퍼스 주요 시설을 방문하고, 서울대 로고가 그려진 학용품을 사는 데 그치기 때문이다.
견학을 통해 서울대를 차창 밖으로만 체험하고 떠나는 학생들도 있다. 학생지원과에서 진행하는 대학탐방 프로그램이 그 예다. 서울대가 제공하는 공식 견학 프로그램은 서울대를 개괄적으로 소개하는 1부와 투어링을 제공하는 2부로 나뉜다. 1부는 64동에 위치한 견학실에서 진행된다. 견학생들은 이곳에서 1시간 동안 홍보대사의 설명을 듣는다. 이때 두세 번의 질문 기회가 제공된다. 이어지는 2부는 30분간 버스를 타고 정문에서 출발해 공과대학을 거쳐 경영대학에 도착하는 일정이다. 2부에서도 아이들은 홍보대사의 설명을 듣는다. 버스가 학교를 한 바퀴 돌면 이들은 정문을 통해 학교를 나가야 한다. 주마간산식의 일정이 반복되며 견학은 예비 대학생들을 위해 준비된 프로그램이 아닌, 서울대라는 랜드마크를 소개하는 관광에 가까워진다. 그렇기에 견학을 단지 개방의 맥락으로만 보는 태도는 캠퍼스 투어란 현상을 온전히 담아내지 못하다. 《서울대가 없어야 나라가 산다》의 저자 김동훈 교수는 학벌 사회에서의 견학이 “본래의 취지에서 일탈한다”고 분석했다.

견학이 대학 서열화의 맥락 속에서 이뤄지고 관광화됐다고 하더라도, 견학을 무작정 없애는 것이 문제를 해결하진 않는다. 견학은 서울대를 외부인인 견학생들에게 개방하고 안내하는 수단이기 때문이다. 어떤 이유에서든 견학 중단은 서울대의 폐쇄적 태도로 비춰질 가능성이 높다. 중고등학생을 비롯한 외부인의 대학 생활 체험 기회 박탈을 의미할 수 있다. 무엇보다 견학은 원인이 아닌 현상이다. 서울대를 찾는 이들의 발걸음이 계속되는 한, 견학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견학의 한계를 해결하기 위해선 학교를 방문하는 학생들에게 체험이란 본래의 의미를 돌려줄 필요가 있다. 나아가 견학이란 현상에서 학벌주의란 맥락을 분명히 하는 것이 필요하다. 김동훈 교수는 견학에 대한 문제의식이 “견학이라는 구체적 현상”에서 그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며 “학벌주의의 정점에 있는 서울대의 역할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전은희 교수는 “서울대라는 꼬리표를 단 이상 학벌주의의 가담자가 될 수밖에 없다”며 서울대생 역시 견학이란 현상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점을 강조한다. “서울대 개방은 의무인 동시에 과시”라는 전은희 교수의 분석과 같이, 학벌 사회 속에서 서울대 견학은 개방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진정으로 열린 서울대 견학을 만들기 위해 서울대 개방에서 과시의 측면을 줄이는 방법을 고민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