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로 시대를 고민했던 박혜정 열사를 기억하다

끝없이 고뇌하고 부끄러워했던 열사의 삶

  1986년 5월 21일, 선배의 투신을 목격하고 울면서 돌을 던진 한 학생이 있었다. 그리고 그 학생은 23일 익사한 채로 발견됐다. 그는 암울한 사회 속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을 자책하고, 부끄러움과 무기력함을 토로하는 유서만을 남겼다. 철저하게 민중적인 삶을 살고자 했고 글 쓰는 일조차 부끄러워했던 故박혜정 열사. 무엇이 그토록 그를 괴롭게 했을까. 누구보다 처절하게 반성하고 고뇌했던 열사의 삶을 되돌아본다.

  삶에 대한 고민 속에서 운동을 결심하다

  박혜정 열사는 1965년 1월 19일 경기도 양평에서 2남 2녀 중 둘째로 태어났다. 그의 지인들은 하나같이 그가 착하고 심성이 고왔다고 기억한다. 평소 다른 사람 돕기를 좋아하고 겸손했던 그는 학창시절 줄반장을 할 정도로 친구들에게 인기도 많았다. 문학적 재능도 가지고 있었다. 중학교 시절 그의 시를 본 담당 선생이 다른 사람이 써준 것이 아니냐고 캐물을 정도였다. 한강여중을 거쳐 신광여고를 졸업한 그는 1983년 서울대 인문1계열에 입학하고 중문과와 연계된 LA2반에 배정됐다. 대학에 입학한 후에도 그의 삶은 이전과 같이 성실했다. 동기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했고, 써클 활동과 엠티, 농활 같은 행사에도 적극적으로 참가했다.

2학년이 되면서 선배로서 후배를 책임져야한다는 생각이 그의 머릿속을 맴돌았다. 동시에 그는 자신의 삶과 죽음에 대해 고뇌하기 시작했다. 생전에 열사가 남긴 글에 그 고민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무엇이 날 이렇게 虛虛롭게 하는가?
무엇 때문에 나는 이렇게 彷徨해야 하는가?
무엇 때문에 항상 불안하고 마음 한구석이 불편한 것인가?
고통스럽다.
산다는 건 아픔이다. 그렇다면 죽는다는 건 뭘까?
살기 위해서 난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하는 건가?
난 지금 어떤 삶을 말하고 싶은 것인가?
정말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일까?
내 존재의의는 어디서 찾아지는 것인가?

  1984년 박혜정 열사는 국문과에 진입하면서 자신의 삶에 대해 “용기가 없어서든 혹은 삶에 큰 의의를 느껴서든, 죽지 못하든, 죽을 수 없든, 안 죽는 것은 명백하다”고 결론 내렸다. 그리고서는 죽지 않는다면 열심히 살아야겠다고 결심했다. 학원자율화 조치로 교내 집회와 학생회 구성이 가능해진 상황에서 열사는 학생운동에 전념했다.

▲대학시절의 열사 ⓒ박혜원

  가족과 운동 사이의 자기모순

  자기관리가 철저해 평소 무단외박 한 번 하지 않던 박혜정 열사는 1984년 9월 19일 시위 도중 관악경찰서에 연행돼 다음날 풀려난다. 이 사건을 통해 그의 부모는 그가 학생운동에 가담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직업군인 출신이었던 박혜정의 아버지는 이내 그를 설득하고 통제하려 했다. 그렇게 열사는 학생운동과 가족 사이에서 심각한 고민에 빠지게 된다. 그 는 학교로부터도, 집으로부터도 떠나고 싶은 혼란에 휩싸였다.

한국적 상황에서 대학생에게 요구되는 역할 기대의 상충이라는 문제는, 용기없고 불성실한 나에게 있어서는 대학 생활 전반에 걸쳐 기본적인 자기 모순으로 일관되어 왔으면서도 아직 해결의 실마리조차 보이지 않고, 일상 속에서 반복되어 폐기되고 있다.
(중략)
입학 초기에 설득할 수 있을 것이라는 나의 기대와 설득해야만 한다는 의지는 …… 무산되고 말았다. 이제 남은 문제는 논리적 설득이 아니라 부모님의 기대와의 타협이냐 전면적인 거부냐 하는 것이다. 하나의 야누스가 내 얼굴 위에 얹힌다.
(중략)
사회적으로 규정된 제관계 속에서 은폐되고 왜곡되었던 나의 본래의 모습, 현상 속에서 감추어졌던 나의 본질은 결국 이것인 것이다. 용기없음과 비굴함, 이기성 그리고 위선, 이런 것들만이 나의 본질을 규정하고 있는 중요한 요소이지 않은가

<생전에 작성한 과제물 중>

  그는 가족들 모르게 휴학을 신청하고 제책공장에 들어갔다. 민중적인 삶을 살 수 있을지, 또 가족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지 스스로 시험해보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4주간 제책공장에서의 경험을 통해 그가 얻은 것은 좌절과 절망뿐이었다. 경찰서에 연행된 이후부터 가족에 대한 생각은 박혜정 열사에게 항상 짐이 됐다. 제책공장의 아침조회에서 상무가 어린 사원들 앞에서 일장연설을 하는 모습은 아버지를 연상시켰고, 그를 더욱 괴롭게 했다. 박혜정 열사의 아버지 역시 중소기업의 상무로 재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부모님, 가정을 비롯한 집안의 바람과 생각과 행동이 일치하는 삶, 학생운동 가운데서 계속 고민하던 그는 결국 복학을 결심한다.

  1985년 봄, 복학한 박혜정 열사는 학업에 충실했고 어느 때보다 글 쓰는 일에 열중했다. 늘 문학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지만 한 번도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다. 그는 언제나 문학을 좋아하는 동시에 부끄러워했다.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는 시간조차 그에겐 사치이자 허영이었다. 언제나 그는 민중과 함께인 삶을 살고자 했다. 그해 겨울 그는 택시 운전사가 되기 위해 운전면허를 따려고 했다. 공장현장활동 이후 그의 두 번째 시험이었다.

  그 시기 박혜정 열사의 부모는 그가 학생운동을 그만뒀다는 사실을 알고 안도했고, 자연스럽게 그들의 관계는 좋아졌다. 그러나 박혜정 열사가 어머니에게 택시 운전사가 되겠다고 이야기하자 그의 어머니는 “서울대 나와서 택시 운전을 하는 사람이 어디 있냐. 말도 안 된다”고 대답했다. 박혜정 열사의 어머니는 당시를 회상하며 “그때 택시 운전하겠다고 할 때 차라리 그냥 그러라고 할 것을…. 그렇게라도 살게 해줄 것을…”이라고 탄식했다. 서울대라는 이름조차 박혜정에겐 무거운 짐이었다.

  1986년 박혜정은 고민 끝에 다시 운동에 참여하기로 결심한다. 그는 무의미한 삶을 지속하고 있다는 부끄러움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그러나 당시 운동권에는 분열의 기운이 감돌고 있었고 외압도 심해졌다. 동시에 박혜정 열사는 자신에 대한 의심과 두려움 속에서 갈등하고 있었다. 결국 그는 운동을 다시 시작하려는 결심을 포기하고 홀로 여행을 떠났다. 여행에 떠나기 전 박혜정 열사는 목욕탕에서 무언가를 계속 태웠다. 무얼 태우냐고 어머니가 나무라자 그는 쓸데없는 것을 정리한다고 대답했다.

  함께하지 못하는 부끄러움에 투신하다

  그리고 그는 두 차례의 죽음을 목격한다. 1986년 4월 28일 김세진, 이재호 열사가 반전반핵을 외치며 분신했다. 그 모습을 본 박혜정 열사는 한동안 몸을 떨었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리고 5월 20일 문익환 목사의 강연이 있던 날, 경찰이 학내에 진입해 있던 상황이었다. 갑자기 엄청난 비명소리와 최루탄 폭발음이 들려왔다. 학생회관 4층에서 이동수 열사가 분신한 채로 투신한 것이다. 이후 격렬한 시위가 뒤따랐다. 박혜정 열사는 학생들과 함께 울면서 시위에 참여했고, 돌을 던졌다. 그날 새벽까지 술자리가 이어졌고, 다음날 그는 집에 돌아간다며 저녁 여덟시쯤 친구의 자취방을 나섰다. 신림동 버스정류장에서 박혜정 열사는 289번 버스를 타고 한남대교로 향했다.

아파하면서 살아갈 용기 없는 자, 부끄럽게 죽을 것.
살아감의 아픔을 함께 할 자신 없는 자, 부끄러운 삶일 뿐 아니라 죄지음이다.
절망과 무기력.
이 땅의 없는 자, 억눌린 자, 부당하게 빼앗김의 방관, 덧보태어 함께 빼앗음의 죄.
더 이상 죄지음을 빚짐을 감당할 수 없다.
아름답게 살아가는 모든 이들에게 부끄럽다.
사랑하지 못했던 빚갚음일 뿐이다.
앞으로도 사랑할 수 없기에.
욕해주기를…… 모든 관계의 방기의 죄를.
제발 나를 욕해주기를, 욕하고 잊기를……
(유서 중 발췌)

  투신 전날 밤 친구 자취방에서 적은 유서의 글씨는 그의 상태를 반영하듯 매우 불안정했다. 행동하지 않고 함께 아파하지 못한 자신의 삶을 부끄러워했고, 자살하는 것조차 도피하는 것은 아닐까 괴로워했다. 박혜정 열사의 동기인 권혜선(국문 83·졸업)씨 역시 그의 죽음을 예상하지 못했다. 권 씨는 박혜정 열사가 “유서에 쓴 것처럼 (자살은 도피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줄 알았고, 그 친구가 버텨낼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결국 한강에 투신했고 세상을 떠났다.

  박혜정이 가족들 품으로 돌아간 것은 그가 투신한 지 이틀 뒤인 23일이었다. 익사한 시신은 발견된 후 중앙대 부속병원 영안실에 안치됐고, 벽제 화장터에서 화장돼 뒷산에 재로 뿌려졌다. 가족들은 그 사건 이후 지금까지 그의 이름을 꺼내는 것조차 어려워한다. 박혜정 열사의 아버지는 유난히 딸의 죽음을 받아들이기 힘들어했다. 유가족 중 유일하게 추모활동에 참여하고 있는 동생 박혜원 씨는 “(그 사건에 대해) 길게 이야기하는 것뿐만 아니라 이름을 말하는 것도, 듣는 것도 어려웠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인문대 1동 근처에 있는 박혜정 열사의 추모비 ⓒ이지원 사진기자

  그의 시신이 뿌려진지 몇 년 후 근처에 군부대가 생기면서 뒷산에 접근하는 것이 어려워졌다. 함께 일했던 써클의 선후배들과 친구들은 돈을 모아 인문대 1동 옆에 나무를 심고 비목을 세웠고, 1995년 비목이 유실되자 이듬해 다시 추모비를 세우고 평전을 만들었다.

그의 이름 옆에 “학형”이라고 적힌 것은 순전히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의 뜻이다. 가족들은 물론이고 친구들조차 열사라는 호칭이 어색하다. 그들에게 박혜정은 딸이고 언니였으며, 친구이자 동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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