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음악은 쓰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힘이 있다”

대중음악 웹진 ‘웨이브’ 정구원 편집장을 만나다
ⓒ구민채 사진기자

  장강명의 단편 소설 ‘음악의 가격’ 속 등장인물은 ‘음악이 그렇게 싸져서 모든 사람이 거의 공짜로 음악을 즐기게 됐는데 사람들이 음악으로부터 얻는 효용은 얼마나 늘어났나요?’라 묻는다. 음악이 보편적인 예술이 되면서 역설적으로 그 가치는 존중받지 못하게 됐다는 의미다. 그러나 이런 현실에서도 여전히 좋은 음악을 찾고 그 의미를 기록하려는 사람들은 존재한다. 1999년부터 운영되고 있는 대중음악 웹진 ‘웨이브’의 편집장을 맡고 있는 정구원 평론가를 만나 음악 평론을 계속 이어나가는 과정을 들었다.

ⓒ구민채 사진기자

음악을 듣고 글을 쓰다

  음악을 조금이나마 ‘진지하게’ 듣기 시작했던 때로 정구원 평론가는 중고등학교 시절을 꼽았다. 국내외에서 ‘인디 록’이란 이름으로 분류될 수 있는 음악의 존재를 처음 알게 된 시기다. 정 평론가는 “대중적인 음악보다 다양한 결을 보여주는 음악에 대해 일종의 ‘덕질’을 하는 느낌으로 (음악 감상을) 시작했다”고 설명했다. 듣는 사람들이 상대적으로 적어 정보를 얻기 어려운 영역이었지만, 자신의 취향과 공명하는 음악을 향한 관심은 계속됐다.

  음악을 들으며 느낀 흥미는 자연스럽게 음악을 다루는 글쓰기를 향한 관심으로 이어졌다. 정구원 평론가는 “보통은 그렇게 (음악을 창작하는) 방향으로 갈 거라고 생각하는데, 저는 음악에 대해 이야기를 해 보고 싶다는 욕망이 더 컸던 것 같다”고 당시의 감정을 돌이켰다. 대학에 입학한 뒤 정 평론가는 당시 웨이브에서 활동하던 차우진·최민우 평론가가 진행하는 음악 평론 강의에 참여했다. 청소년 때부터 봐 온 웹진의 필진을 직접 만날 수 있는 기회였다. 8주로 구성된 강의가 끝난 2010년 말, 정 평론가는 웨이브에 첫 글을 올리게 된다. 

좋아하는 음악을 목격하는 기쁨

 웨이브에서 활동을 시작한 이후엔 두리반에서의 경험이 글쓰기에 새로운 이정표를 제공했다. 두리반은 재개발 과정에서 세입자의 권리를 가시화했다는 사회적 의미가 있지만, 동시에 한국의 인디 음악 역사에서도 중요한 순간으로 남았다. 두리반을 홍대의 젠트리피케이션이라는 흐름의 일부로 인식한 음악가들이 두리반에서 공연을 이어나갔기 때문이다. 

  당시 직접 활동가로서 참여한 것은 아니지만 정구원 평론가는 두리반에서 자신이 관심이 있던, 약간은 “듣기 불편하고, 시끄럽고 거친” 음악이 어떻게 실현되고 있는지를 목격할 수 있었다. 두리반은 음악이 음악 외적으로 갖는 사회적 의미와 음악 자체의 미학적인 방향성이 결합하는 순간을 체험할 수 있는 공연장이었다. 이러한 인식은 두리반에서의 마지막 공연을 리뷰한 정 평론가의 글 ‘끝이 아닌, 더 많은’에서도 엿보인다. 두리반의 사회적 의미를 언급하면서도 밴드들의 공연에 대부분의 지면을 할애한 글은 두리반을 ‘현재 홍대의 어떤 공연장보다 ‘공연 공간으로서의 성격’이 확실한’, ‘음악인의 사회적 참여가 어떤 식으로 이뤄질 수 있는지에 대한 새로운 가능을 보여준 곳’이라 평가하며 마무리된다. 

  정구원 평론가는 자신의 글쓰기에 대해 “음악가들이 만들어내고 있는 흐름에 직접 참여하는 것”이라고 표현했다. 참여라는 점에선 관객과 유사하지만 글쓰기는 의미 전달의 차원에서 조금 더 능동적인 의의가 있을 것이다. 정 평론가는 “알려지지 않은 음악들을 어떻게 알릴 것이며, 그것이 가지고 있는 사회적·미학적 의미를 어떻게 전달할 것인가”에 대해 고민하게 된 계기로 두리반을 돌아봤다. 

▲웹진 ‘웨이브’의 로고. 흐름(wave)의 발음기호인 동시에, 관점(view)의 철자를 반대로 배치했다는 의미다. ⓒ웹진 ‘웨이브’ 홈페이지

기존 담론에 의문을 던지기

  다만 비평의 전달이 자기 성찰 없이 이뤄질 수는 없다. ‘느리고 점진적인: 록의 죽음에 대해’에서 정구원 평론가는 ‘오랫동안 청년 및 하위 문화를 해석하는 중요한 문화적 요인으로 받아들여졌던’ 록 음악이 오늘날엔 ‘과거에 천착하고 있고 그것을 숨기지 않으며 그를 통해 ‘훌륭하다’는 찬사를 얻어낸다’고 지적한다. 음악 비평이 혁신적이고 중요한 음악으로 인식했던 록이 ‘점진적으로’ 죽어가고 있을지 모른다는 질문이다. 정 평론가는 해당 글에 대해 록 음악 중심이었던 취향에 영향을 받았을지 모를 자신의 비평을 돌아보는 의미였다고 설명했다.

  기존 비평에 대한 검토와 이의 제기는 개인적인 수준에 그치지 않고 웨이브가 공유하는 가치기도 하다. 웨이브의 홈페이지는 웹진의 창간 취지를 ‘대중음악과 문화를 ‘다른 관점’에서 살펴보기‘라 적고 있다. 정 평론가는 “‘다른 관점’이라고 하면 이미 기존의 관점이 있다는 거니까 (웹진의 방향은) 시대에 따라서 많이 변하게 된다”고 설명했다. 예컨대 웹진이 처음 생긴 1999년엔 이제 막 활성화된 인디 음악을 조명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면, 케이팝이 성장한 2000년대엔 이를 단순히 상업적이고 진정성이 없는 음악으로만 여기는 비평에 의문을 제기하는 식이다. 정 평론가는 “음악을 관성적으로 볼 수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비판하며, 그런 길을 따르지 않도록 스스로 조심하려 한다”고 밝혔다.

▲웹진 ‘헤테로포니’의 두 번째 단행본

모른다면 솔직하게 쓰자

 현재 정구원 평론가의 활동의 다른 한 축은 비평 동인 ‘헤테로포니’다. 온라인으로 글이 게재된다는 점에선 웨이브와 유사하다. 다만 몇 가지 차이는 존재한다. 편집장이란 직책이 존재하는 웨이브와 달리 헤테로포니는 네 명의 필진이 동등한 위치에서 활동한다. 아울러 헤테로포니의 다른 필진은 서구 현대음악, 한국의 전통음악 등 대중음악이 아닌 영역을 연구한다. 

  새로운 시도를 하게 된 계기는 비교적 단순했다. 매체의 탄생 자체가 드물기에 환영할 만한 일이기도 했고, ‘대중음악’이란 영역에서 완전히 벗어난다는 사실이 재밌기도 했다. 다른 필진과 만남을 가지면서 목표는 조금 더 구체적으로 변했다. 정구원 평론가는 “다른 세 분은 전부 아카데믹한 영역에서 활동을 했기 때문에 좀 더 자유롭게 써보자는 의도가 있었다”며, 자신의 경우는 이들을 만나면서 “공부를 좀 더 하고 진지하게 써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당시를 돌아봤다. 다른 영역에 비해 학문적인 기반이 강하지 않은 대중음악 비평 영역을 벗어나 일종의 도전을 감행했던 셈이다.

  홈페이지에 최근에 게재된 ‘함께 듣고 쓰기’란 코너는 이런 도전의 일환이라고 볼 수 있다. 해당 코너에서 네 명의 필진은 한 명이 제안한 공연을 본 뒤 자신만의 관점에서 글을 풀어나간다. 첫 번째로 선정된 공연은 국립국악원에서 진행된 ‘정악, 깊이 듣기’였다. 정구원 평론가는 “모르는 음악에 대해 지식 자랑을 하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며 다만 “제가 그것을 (실제로) 봤다는 사실이 (글쓰기의) 중요한 기반”이라고 설명했다. 잘 알지 못하는 국악의 음악적 양식에 주목하기보다는, 공연 과정에서 연주자가 지키는 의례와 같이 공연장에서 실제로 보고 느낄 수 있는 요소를 세밀하게 잡아내야 한다는 의미다. 정 평론가는 앞으로 자신이 제안한 공연 후기도 올라올 예정이라며 기대의 웃음을 보였다.

“느슨하더라도 꾸준하게”

글을 중심으로 운영되는 웹진, 특히 음악 비평을 싣는 웹진의 미래가 마냥 긍정적이진 않다. 웨이브는 현재 비영리로 운영되고 있으며 고정 필진 중 이 일을 전업으로 하는 사람은 없다. 긍정적으로 보면 자유로운 운영이 가능한 환경이지만, 나쁘게 말하면 꾸준히 글이 게재되기를 기대하긴 어려운 상황이다. 웨이브 내에서 명멸해 온 여러 코너에 대해 정구원 평론가는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그것이 어떤 반응을 얻었는지는 잘 모르겠다”며 아쉬움을 밝혔다. 글의 주제가 다분히 논쟁적이지 않은 이상, 대부분은 독자들의 반응이 잘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다.

  불확실한 미래는 글을 쓰는 행위 자체에도 적용될 수 있는 문제다. 글을 쓰는 원동력을 묻는 질문에 정구원 평론가는 음악을 향한 애정을 표출하면서도 “예측할 수 없는 부분이 동력이라고 생각한다”며 섣부른 자신(自信)을 경계했다. 그의 고민은 ‘새로운 음악적 경험의 역치는, 내가 상상했던 것보다도 훨씬 더 빠른 속도로 높아져 버렸다’고 고백하는 글 ‘음악의 역치, 동시대의 음악’에서도 묻어 나온다. 음악을 좋아하는 이유에 대해 즐겁게 적는 일이 언젠간 불가능해지리란 문제의식은 상존한다.
 
  다만 양가적인 감정의 결론이 마냥 비관적이지는 않다. 웨이브에 새로 합류한 필진은 왕성하게 글을 쓰고 있다. 웹진 차원에서 과거에 정구원 평론가가 강의를 들었듯이 세미나를 진행하기도 했다. 특히 헤테로포니는 두 차례에 걸쳐 온라인에 게재된 글을 모아 단행본으로 출간하기도 했다. 정구원 평론가는 “개개인의 부담을 줄이는 방향이면 계속 웹진 형태로 가도 괜찮다”며 “(단행본화를) 결정할 때 우리가 쓴 글을 어떤 형태로 쥐어 보고 싶다는 의지가 충만했었던 것 같다”고 밝혔다. 결과적으로 단행본은 웹진 독자의 긍정적인 반응을 가시화했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결과를 낳았다. 정 평론가는 네 명의 필진 모두 앞으로도 지금의 성과를 유지하고 싶어 한다며 여운을 남겼다.

  인터뷰 말미에 정구원 평론가는 “음악 평론을 하는 사람들이나 음악가하고 모였을 때 음악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경우는 생각보다 별로 없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가벼운 어조였지만 한편으론 음악 자체에 대해 나누는 대화가 부족함을 시사하는 말이기도 했다. ‘취향 존중’이란 말이 힘을 갖는 오늘날에 음악 비평은 일견 불필요한 행위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우리에겐 조금 더 좋은 음악을 찾아 나설 자유가 있지 않을까. 웨이브와 헤테로포니, 그리고 여타 웹진의 글들은 그 발판이 돼줄 것이다.

ⓒ구민채 사진기자
댓글 댓글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

Previous Post

강한 처벌은 누구를 보호하는가

Next Post

2010년대 관악 여성주의 되짚어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