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의 여성운동은 오랜 역사를 갖고 있다. 1984년에는 전국 최초의 총여학생회가 만들어졌고, 1998년 화학과 신정휴 교수 성희롱을 인정하는 대법원 판결을 얻어냄으로써 ‘성희롱’이라는 개념을 한국 사회에 도입했다. 2000년에는 반성폭력 학칙 제정 운동을 벌여 ‘서울대학교 성희롱·성폭력 예방과 처리에 관한 규정’을 시행시킬 수 있었다. 새로운 10년이 오기까지 얼마 남지 않은 지금, 2010년대 학내 여성주의의 계보를 헤아려봤다.
2010년대 초반의 여성운동
2010년 당선된 53대 총학생회는 이듬해 여성의 날을 맞아 ‘페미니즘 온 마치’ 포럼을 열어 여성 노동자를 다룬 연극과 임신중지에 관한 토론회를 진행했다. 2013년 사회대 학생회장이었던 이동우(사회 10) 씨는 2010년대 초에 “여성주의는 학생회의 기본 문법이었다”고 회상했다. 새맞이에서 반성폭력 내규를 작성하는 것도 이미 인문대와 사회대에서는 당연한 것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러나 2000년대 말은 여성운동이 저물어가던 시기이기도 했다. 1993년 신정휴 교수 성희롱 사건을 계기로 1997년 출범한 ‘관악여성주의자모임(관악여모)’은 2009년 봄 페미니즘 문화제 개최를 끝으로 종적을 감췄다. 2002년 만들어진 여성주의 자치언론 ‘쥬이쌍스’도 2008년 폐간했다. ‘사회대여성주의연대’는 2008년 해산했고, ‘사범대여성주의자모임’도 2009년을 마지막으로 기록을 남기지 못했다. 90년대 말부터 이어진 여성운동의 성과는 학생사회에 녹아들었지만 여성운동은 전과 같은 조직의 형태로 남진 못한 것이다.

관악 여성주의 학회 ‘달’ 황강한(사회 14) 회장은 “2000년대 말 정치권에서 여성주의자들의 자리가 축소되면서 다른 여성단체들도 덩달아 어려움을 겪었다”며 서울대뿐 아니라 사회 전반에 걸쳐 페미니즘이 끝났다는 우려가 있었다고 설명했다. 사회 전반적인 여성주의의 퇴조 속에서 관악에는 결정적인 위기가 찾아왔다. 2012년 말 총학생회 선거는 물론이고 사회대·인문대 등 수많은 단과대 선거를 무산시키는 후폭풍을 불러온 ‘성폭력 대책위 사건(대책위 사건)’이 바로 그것이다.
‘서울대 성폭력 대책위 사건 진상조사보고서’에 따른 대책위 사건의 전말은 이렇다. 2011년 3월, ‘사회주의노동자정당건설 공동실천위원회 학생위원회(준) 관악분회(사노위)’ 소속 B가 연애관계에 있던 A에게 이별을 통보했다. 이 과정에서 A는 평소 자신 앞에서 흡연한 적이 없던 B가 이별 통보 당시 면전에서 연거푸 흡연한 것에 모멸감을 느꼈고, 당시 사노위 소속이던 류한수진(사회 09) 씨를 통해 해당 사건을 성폭력으로 사노위에 제소하려 했다. 류한 씨는 이것은 성폭력이 아닌 것 같다며 A의 요청서를 반려했고, 이에 A는 당시 소속돼있던 여성주의 자치모임 ‘공간’에 도움을 요청해 이듬해 2월 사노위와 공간, ‘서울대 학생행진(행진)’의 구성원이 모여 ‘사노위 성폭력 사건의 올바른 해결을 위한 공동대책위원회(성폭력 대책위)’를 꾸렸다. 성폭력 대책위가 계속되던 동안 사회대 학생회장이던 류한 씨는 2차 가해자로 규정돼 공간 분리를 요구받고 언어폭력에 노출되는 등 성폭력 대책위 운영 전반에서 고통을 겪었고, 같은 해 10월 사회대 학생회장을 사퇴하며 대책위 사건을 대중공개하기에 이른다.
2013년 사노위·행진·공간은 토론회를 열어 성폭력과 피해자중심주의라는 개념의 재정의가 필요하다는 점을 확인했다. 이어 류한수진 씨에 대한 2차 가해자 규정이 잘못된 점을 인정해 사노위·행진·공간과 총학생회는 류한 씨 등 대책위 사건의 피해자들에게 손해배상을 하고 사과문을 게시했다. 이동우 당시 사회대 학생회장은 사건의 원인에 대해 “(피해자중심주의에 기반한) 당시의 ‘사회대 반성폭력 학생회칙(반성폭력 회칙)’이 피해자를 만드는 역할을 했다”고 분석했다. 문제의식을 느낀 이 씨는 2013년 7월 ‘사회대 반성폭력 학생회칙 개정 TF팀(TF팀)’을 소집해 같은 해 9월 사회대 학생대표자회의에서 반성폭력 회칙을 개정했다.
TF팀이 작성한 ‘반성폭력 학생회칙 개정안 Q&A’에서는 개정 이전 반성폭력 회칙이 ▲성폭력 개념이 모호하고 피해자의 주관에 달려있다는 점 ▲가해자의 인권을 침해할 여지가 있다는 점 ▲사건 해결 절차를 대책위원회 구성으로 한정하는 점 등이 문제라고 분석했고, 따라서 개정안에서 ▲성폭력을 성적 자기결정권의 침해로 재규정하고 ▲성폭력 여부를 성인지적 객관성에 입각해 판단하며 ▲가피해 선규정을 금지하는 방향으로 개정했다고 밝히고 있다.
개정된 반성폭력 회칙은 현재 사회대뿐 아니라 학생·소수자인권위원회에서도 인권침해사안에 준용하고 있다. 이처럼 대책위 사건은 성인지적 객관성이란 원칙을 남겼지만 동시에 학내에서 축소돼가던 여성주의가 완전히 끝날 것이라는 우려를 불렀다. 익명을 요청한 서울대학교 페미니즘 모임 ‘지금 여기: 관악의 페미들(관악의 페미들)’ 대표 J씨는 “2016년 이전엔 (학내에서) 페미니즘이라는 단어를 거의 들어본 적 없다”고 밝혔다. 페미니즘의 공백기가 도래한 것이다.
폐허 위에도 달은 뜬다
2015년의 메르스 갤러리와 2016년의 강남역 살인사건을 계기로 한국 사회는 큰 변화를 맞는다. 손희정 문화평론가는 논문을 통해 2015년 이후의 새로운 페미니즘 운동을 ‘페미니즘 리부트’로 명명했다. ‘리부트’라는 표현에 대해 손 문화평론가는 ‘단절과 접속의 지점들을 인식하기 위해서’라고 부연했다. 서울대에서도 2013년까지의 여성주의 운동과 2016년부터의 운동 사이에 나름의 단절과 접속이 존재했다. 그 공백기를 버텨온 것은 달이 유일하다.

달이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은 2013년 가을이다. 대책위 사건을 거치며 ‘사회대 여성주의자 모임’이라는 단체는 피해자중심주의를 비판하는 이론적 지향을 띠게 됐고, 해당 단체는 ‘달’이라는 이름으로 2013년의 대책위 사건 토론회에 참석했다. 이후 2013년 9월 ‘사회대’라는 명칭을 삭제하고 학회 체제로 재편되며 현재의 모습을 갖췄다. 그러나 페미니즘 리부트 이전까지만 해도 달은 사회대에 매여있었다. 당장 2016년까지 달은 세미나를 사회대 학생회실을 빌려 진행했고, 역대 회장 6명 모두 사회대 출신이기도 했다. 학생회관에 자치공간을 확보했던 공간과 전통적으로 인문대 학생회에 기반을 뒀던 행진이 대책위 사건을 거치고 사라지며 여성주의와 관련된 단체는 사실상 사회대에만 남게 된 것이다.
대책위 사건 이후 여성주의는 끝났다는 암담한 전망 속에서도, 군인권센터 소장을 초청해 강연회를 열고 2014년 수리과학부 K교수 사건을 맞아 꾸려진 ‘서울대학교 교수 성희롱·성폭력 문제해결을 위한 공동행동’에 학생회가 아닌 유일한 단위로 참여하는 등 달은 꿋꿋이 활동을 이어갔다. 관악에 홀로 남아 활동을 이어가던 누구도 2015년에 미러링이라는 여성혐오를 전복한 해방의 언어가 범람할 줄을, 2016년에 한 여성의 죽음을 자신의 일처럼 추모하는 여성들이 강남에 운집할 줄을 몰랐을 것이다. 조용히 그러나 소란하게 페미니즘 정국은 다시금 찾아왔다.
관악에 찾아온 페미니즘 리부트
달은 강남역 살인사건 직후 학내에서 오픈세미나를 열어 여성억압이라는 구조에 대해 토론했고, 몇 달 후엔 인권주간 행사를 계기로 관악의 페미들이 결성됐다. 여성주의의 불모지로 여겨졌던 경영대와 공대에도 각각 2017년과 2018년에 경영대 여성주의 학회 ‘여파’와 공과대학 페미니즘 동아리 ‘공해’가 만들어졌다. 공명반 페미니즘 학회 ‘가시’, 언론/꼼반 페미니즘 소모임 ‘꼼페미’, 윤리교육과 페미니즘 소모임 ‘나름’, 인문대 페미니즘 학회 ‘여담’, 한음반 여성주의 소모임 ‘한녀’도 2017년부터 2019년 사이에 생겨난 페미니즘 단체 중 하나다. 이들처럼 포스터를 붙이거나 온라인으로 홍보하지 않는 작은 모임들까지 고려하면 여성주의 단체가 그야말로 우후죽순 생겨난 것이다.

2016년 당시 달에서 활동한 이나경(윤리교육 16) 씨는 “페미니즘 단체가 좀 더 있어서 역할분배가 잘 됐다면 좋았을 것 같다”며 학회인 달이 거의 유일한 단체였던 것에 아쉬움을 표했다. 2016년에 관악의 페미들을 제외하곤 학내 페미니즘 단체들이 바로 생겨나지는 않았는데, 이 씨는 이에 대해 “온라인에서 페미니스트로 성장한 사람들이 오프라인 단체를 만드는 것이 쉽지 않았고 당시에는 학내에서 (페미니스트에 대한) 낙인도 지금보다 심했다”고 이유를 짚었다.
2017년부터 생겨난 페미니즘 모임들은 크게 학회와 소모임으로 구분된다. 올해 3월 만들어진 학회 여담은 매주 세미나를 갖는 것은 물론 책읽기 모임과 번역 모임도 운영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고, 여파도 승리 게이트나 낙태죄 헌법불합치 결정 등의 여성주의 의제가 있을 때마다 오픈세미나를 열어왔다. 여담을 만든 김영광(서양사 17) 부회장은 “인문대의 특징인지는 모르겠지만 (구성원들이) 공부하는 걸 재밌어하고 분위기가 좀 더 학구적이다”라며 학회 특유의 분위기를 설명했다. 한편, 여파의 허정은(경영 17) 회장은 “(여담과 달리) 여파는 세미나를 하면 거의 반은 자기성토였다”며 단과대의 성향에 따라 한계가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학회에 비해 소모임은 일상적인 생활공동체에 가깝다. 꼼페미를 만든 신영채(언론 16) 씨는 “미투가 한창일 때 어느 정도 (페미니즘을) 알고 입학하는 새내기들에게 안전한 공동체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고 꼼페미를 만든 계기를 설명했다. 꼼페미 권정연(언론 17) 대표도 “학술단체에 들어가기는 부담스러웠는데 편하게 질문하고 배울 수 있을 것 같아 들어왔다”고 말했다. 나름을 만든 이나경 씨는 “소모임은 이론을 다루는 학회와 편한 언어로 비판할 수 있는 온라인의 중간”이라며 “온라인에서 얘기하고 돌아서면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이 느껴지지만 (오프라인에) 공간이 존재하면 단순히 부정적 감정을 해소하는 걸 넘어 긍정적 지향을 만들 수 있다”고 밝혔다.
2020년을 맞이하는 각자의 자세
시간이 흐르자 활발했던 페미니즘 단체들의 활동도 점차 뜸해졌다. 관악의 페미들은 2019년 이후로 활동이 없고, 공해는 2018년 가을 회장이 개인 사정으로 활동을 중단하며 자연스럽게 해산했다. 당시 공해에 소속돼있던 김차령(언어 16) 씨는 “회장 외에는 활동을 주도할 경험이나 능력이 부족했고 시작한 지 얼마 안 돼 동아리원들끼리 친분이 없어 회장이 없으면 모이지 않았다”고 해산의 이유를 추측했다. 이어 김 씨는 “공대에 페미니즘 동아리가 있다는 것 자체로 발전할 여지가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며 공해가 유지되지 못한 것에 아쉬움을 표했다.
학회 형태의 단체는 공부라는 뚜렷한 목표가 있어 단체의 존속에 유리하다. 그러나 이론 학습의 부담은 진입장벽을 높이기도 한다. 이나경 씨는 “(학회였던 달이) 입문하기 위해 냉큼 찾아오기는 힘든 단체였던 것 같다”며 “달이 가졌던 이론적 지향을 심화·발전시켜야 한다는 욕심이 있었지만 구성원들이 어렵다고 느끼는 경우가 많았다”고 당시의 고민을 전했다. 황강한 회장도 “(달을 운영하며) 학회의 색을 약화시키려 많이 노력했다”며 “사회운동가로 스스로를 정체화하지 않는 사람들도 임파워링(empowering)될 수 있는 공동체가 돼야 한다”고 말했다. 이런 문제의식 아래 달은 중앙동아리 등록을 추진하고 있다.
여파도 새로운 시도를 모색하고 있다. 허정은 회장은 “‘경영대’ 학회니 비즈니스를 해보려고 한다”고 밝혔다. 여파는 현재 대안 온라인 커뮤니티를 구상하고 있다. “게시물이 활발히 올라올지, 성공할 수 있을지 고민이 많다”는 허 회장은 “학내 여성운동은 각자가 무엇을 하는지도 모르는 채 넓은 학교에 산재해있는데, 다 같이 얘기할 수 있는 공론장으로서의 플랫폼을 만들고 싶다”고 포부를 밝혔다.

소모임의 형태로 운영되는 단체들은 뚜렷한 목표가 없다는 데에서 오는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이나경 씨는 “친한 친구들끼리 모이다 보니 우리 안에서만 갇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이 씨는 “일상의 언어로 정치적 비전을 고민하고 정치의 언어로 일상을 다시 바라보는 것은 정치와 일상이 결합한 소모임만 갖는 장점이지만 일상의 불만을 토로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도록 하는 고민도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관악의 페미들의 J씨는 “가벼운 단체라는 게 단점이 될 수도 있지만 가볍게 소속될 곳이 있다는 긍정적인 측면도 있다”며 “무언가 생산적인 것을 하지 않아도, 혹은 유구한 전통을 가진 모임이 되지 않아도 존재함으로써 갖는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꼼페미도 비슷한 상황이다. 권정연 대표는 “저학번 재생산이 되지 않는다”며 “편하게 얘기하는 모임인데 고학번이 많다 보니 친하지 않은 저학번에게 가입 권유를 하는 게 설득력이 없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권 대표는 “꼼페미 활동이 줄기는 했지만 페미니즘은 더 많이 얘기되는 것 같다”며 “친한 사람들끼리 모이는 이런 소모임은 사라졌다 생겼다 하는 게 오히려 쇄신이 이뤄지는 걸 수도 있다”고 낙관했다. 신영채 씨는 꼼페미 이전에도 ‘여우입술’이라는 소모임이 있었다면서 “언젠가 꼼페미가 사라지더라도 우리가 만든 기조들이, 나눴던 얘기들이 무의미할 것이란 생각은 들지 않는다”고 말했다.
무수한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학내의 페미니스트들은 2010년대 내내 존재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그러나 현존하는 페미니즘 모임들은 대부분 이전 세대와 단절됐다는 감각을 공유하고 있었다. 이나경 씨는 “매년 사람들이 새로 입학하고 졸업하는 대학의 특성일 수 있다”면서도 “계보를 남기고 역사를 물려주는 게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권정연 대표는 인터뷰 끄트머리에 이렇게 당부했다. “다른 페미니즘 모임의 단체장들도 공동체 운영을 제대로 하는 건지 모르겠다는 고민을 할 거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활동이 줄어드는 것은 어떻게 보면 자연스러운 것이고, 결코 당신의 잘못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공동체가 없어진다고 페미니즘이 없어지는 건 아니다. 공동체를 지키는 것보다 지치지 않도록 당신의 지속성을 지키시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