움트는 민주주의 이면에는 크나큰 희생들이 있었다. 사람들은 이를 잊지 않기 위해 ‘다크 투어리즘’이란 이름으로 참사의 공간을 찾고 있다. 다크 투어리즘은 역사적으로 잔혹한 참사나 학살이 일어났던 현장을 방문하는 여행 형태를 이른다. 학계에서도 다크 투어리즘에 대한 연구가 초기 단계에 머무르고 있을 정도로 생소한 개념이다. 한국 내 다크 투어리즘 여행지는 식민지 시기, 전쟁, 민주 항쟁과 연관된 장소로 구성돼있다. 대표적으로 광주 전남도청, 거제 포로수용소, 서울 서대문 형무소 등을 들 수 있다.

  당시의 공간을 가로지르며 우리는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 아픔을 간직한 도시인 광주와 제주를 방문해봤다.

#1. 광주

  1980년 5월 20일 저녁 7시 30분, 광주시 외곽의 도로망이 전면 차단됐다. 완전봉쇄된 광주는 18일부터 27일까지 총 10일 동안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민들의 피로 물들었다. 5·18 광주 민주화운동 당시 군사반란을 일으킨 전두환의 신군부 세력은 비상계엄령에 반대해 민주화를 요구하던 광주 시민들을 대상으로 공수부대를 투입해 살상했다. 당시 계엄군은 곤봉과 대검으로 시민을 무차별적으로 살상했고 거리의 시민을 향해 수차례 집단발포했다. 시민들이 항쟁의 거점으로 삼은 전남도청 등의 빌딩에는 조준 사격이 이뤄졌다. 항쟁 과정에서의 공식 사망자 및 행방불명자는 200여 명, 암매장된 시신을 제외한 사상자는 4,500여 명에 달한다. 40년이 지났지만 광주 민주 항쟁에 대한 진상규명은 현재진행형이다. 계엄군의 헬기 사격과 진압과정에서의 여성 인권 침해 행위, 암매장 장소 확인 등 밝혀지지 않은 진실들이 여전히 남아있기 때문이다.

▲광주 도심 곳곳에는 민주 항쟁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광주 시민들에게 ‘시내’로 통하는 충장로의 중심에 위치한 구 전남도청이 대표적인 예다. 항쟁 당시 전남도청은 시민군의 본부이자 최후의 항전지였다. 5월 27일 아침, 계엄군은 전남도청을 향한 1만여 발의 무차별 사격을 마지막으로 진압 작전을 마무리했다.
▲전일빌딩은 구 전남도청의 건너편에 자리하고 있다. 광주일보의 전신인 전남일보가 한때 사용했던 전일빌딩은 민주 항쟁의 상처를 온몸으로 안고 있다. 당시 중앙정보부장이었던 전두환 씨는 헬기 사격의 존재를 부정했으나 빌딩 외벽에는 헬기 사격의 탄흔들이 남아있다. 사진 속 빌딩 외벽의 붉은 스티커는 탄흔을 표시해둔 것.
▲5·18 희생자의 묘지는 광주광역시 북구 운정동에 마련돼있다. 중앙에 설치된 5·18민주화운동 추모탑은 희망의 씨앗을 감싼 손 모양을 형상화했다.
▲묘지에는 5·18 영령의 묘 총 777기(2019년 기준)가 안치돼있다.
▲국립 5·18 민주묘지 안에 있는 유영봉안소는 묘역에 안장된 희생자들의 영정을 모신 공간이다. 벽에 걸린 액자 속 얼굴들은 어린아이부터 학생, 노인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광주 민주 항쟁 유적지는 과거에 머물지 않고 현재와 소통하고 있다. 2015년 ‘국립아시아문화전당’으로 탈바꿈한 구 전남도청은 5·18 민주평화기념관을 마련해 민주 항쟁의 정신을 담은 여러 예술작품을 전시하고 있다. 국립 5·18 민주묘지 안 ‘5·18 추모관’에는 항쟁 당시 발견된 총알과 시신을 감싸는 데 사용된 비닐 등을 전시한다. 도심 속 민주 항쟁의 흔적들은 도시개발이 진행될 때마다 존폐의 위기에 섰지만 광주시와 지자체는 역사의 상처를 추모의 공간으로 바꾸면서 그 존재 가치를 증명하고 있다.
  취재 장소 곳곳에 시민들의 발걸음도 무수히 이어졌다. 지나가던 행인들이 시가지 중앙에서 잠시 걸음을 멈추고 도청의 외관을 카메라에 담았다. 묘지 중앙에 세워진 추모탑 아래에선 단체방문객이 모여 해설자의 설명을 듣고 있었다. 민주 항쟁을 기리는 관광객이 많아지면서 광주시는 다크 투어리즘 상품 개발 및 시행을 추진 중이다.

#2. 제주

  천혜의 경관을 갖춘 제주는 불과 몇십 년 전 거대한 ‘지옥도’였다. ‘제주 4·3사건 진상보고서’는 4·3 사건을 ‘1947년부터 1954년까지 7년 7개월 동안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력충돌과 주민의 희생’으로 정의하고 있다. 이동안 14,233명의 도민이 희생됐고 수많은 도민이 목숨의 위협에 시달렸다. 한국전쟁 다음으로 꼽히는 규모의 학살이었으나 수십 년간 이념 갈등을 이유로 문제 제기는 제대로 이뤄지지 못했다. 1990년대에 이르러서야 유족들을 주축으로 진상규명 및 기록 보존에 대한 요구가 등장했다. 현재 제주도는 피해를 겪은 중산간 마을을 중심으로 6개의 4·3길 코스를 운영 중이다. 

  201번 마을버스를 타고 북촌리해동 정류장에 내리면 북촌마을의 초입이 보인다. 제주시 조천읍 동쪽에 위치한 북촌마을은 4·3사건으로 가장 큰 피해를 입은 마을 중 하나다. 1949년 1월 17일, 북촌마을 너븐숭이(넓은 돌밭을 뜻하는 제주 방언) 인근에서 무장대의 습격을 받은 군인들이 주민 삼백여 명을 학살했다. 아픔을 기리듯 4·3의 흔적을 담은 올레길이 북촌마을을 두르고 있었다. 

▲북촌마을 코스의 입구에는 북촌 너븐숭이 4·3 기념관이 있다. ‘너븐숭이의 기억’을 주제로 당시의 사건을 재현하고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자리를 마련했다.
▲꺼지지 않는 촛불 위로 사망자들의 명단이 새겨진 비가 자리하고 있다.
▲벽 한 켠엔 북촌리 주민대학살 연대기가 기록돼있다. 1949년 1월 17일 일어난 대학살부터 주민들의 슬픔과 묵념조차 집단행동으로 낙인찍혀 금지된 향후 상황까지 기술돼있다.
▲제주 4·3사건을 근간으로 한 소설들이 진열돼있다.
▲제주 4·3사건을 수면 위로 드러낸 기록들
▲기념관 바로 옆엔 ‘애기무덤’ 유적지가 있다. 학살 당시 제대로 매장되지 못한 20여 기(基)의 어린 시신들은 임시 매장한 상태로 현재까지 보존돼있다.
▲희생자를 기리는 위령비
▲기념관에 놓인 책자를 들고 올레길을 따라간다. 돌담길과 팻말이 인도하는 곳으로 발걸음을 내딛자 바닷가 옆 한적한 마을이 나온다. 사진 속 북촌포구에서 경찰과 무장대의 충돌이 빚어졌다.
▲북촌대학살 당시 북촌국민학교를 중심으로 동쪽은 ‘당팟’, 서쪽은 ‘너븐숭이’에서 학살이 시행됐다. 당시 학살의 장소였던 당팟(제주 방언으로 당(堂)이 있었던 자리를 의미한다.)


  인가를 벗어나 도로를 따라 걸으면 적갈색을 띤 옴팡밭이 나타난다. 옴팡밭은 제주 방언으로 ‘오목하게 쏙 들어간 밭’을 말한다. 밭 한구석엔 현기영 작가의 소설 《순이 삼촌》의 구절이 새겨진 비석들이 누워있었다. 북촌대학살이 일어난 날, 사람들은 좁은 옴팡밭에 가둬져 무차별 총격으로 목숨을 잃었다. 당시의 참혹함을 묘사한 문장들을 지닌 여러 기의 비석들이 흐트러진 곳에서 한 무리의 여행객들이 해설사의 설명을 주의 깊게 듣고 있었다. 사람들은 사진을 찍거나 손을 모은 채 해설을 들으며 생각에 잠겨 있었다.

  광주와 제주의 시간이 흘렀다. 아픔의 공간이 여행지로 소비될 수 있는가에 대한 의문과 염려도 곳곳에서 나온다. 참사의 공간은 세대가 거듭될수록 일상의 공간으로 돌아간다. 그래서 누군가는 소설을 쓰고, 누군가는 사료를 정리하고, 누군가는 보존된 현장을 찾는다. ‘잊지 않는’ 것이 중요한 현장 속에서 방문객은 과거를 추모하고 사건을 기억하고 현재를 곱씹어본다. 다크 투어리즘을 염려하기보단 마중물을 부어볼 때다.

댓글 댓글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

Previous Post

세상의 어둠을 비추다, 범죄학회

Next Post

‘퀴어문학’의 목소리 듣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