퀴어문학의 약진이 이어지고 있다. 김봉곤과 박상영이 각각 ‘Auto’와 ‘패리스 힐튼을 찾습니다’로 등단한 이후, ‘데이 포 나이트’(김봉곤), ‘알려지지 않은 예술가의 눈물과 자이툰 파스타’, ‘우럭 한 점 우주의 맛’(박상영)으로 젊은작가상을 수상하며 비평적 주목으로 확장됐다. 이는 단순히 작품에 등장하는 퀴어 인물의 양적 증가에 그치지 않는다. 그렇다면 문학적 지평이 넓어진 만큼 한국의 문학 영역에서 퀴어문학은 온당히 대우받고 있는가. 퀴어문학이 딛고 선 토대는 과연 안전한지, 퀴어문학의 현주소에 대해 짚어봤다.
질서로부터 해방을 외치다
‘퀴어문학’이 곧 ‘퀴어 인물이 등장하는 작품’이란 정의는 장르의 의의를 온전히 담아내지 못한다. 순천향대 정혜경 교수(국어국문학과)는 ‘퀴어소설의 탈식민주의적 서사 전략과 재현의 정치성’(2017)에서 퀴어소설이 ‘동성애 정체성을 동질적인 것이라고 보지 않는 것은 물론 정체성의 ‘본질’이라는 것 자체를 전제하지 않는다’며 이를 통해 ‘이성애 규범에 균열을 만들고자 한다’고 말했다. 한국 사회의 주를 이루는 이성애 규범은 이성애적 관계를 ‘정상’으로 보고 이를 벗어나는 모든 관계를 부정한다. 퀴어문학은 궁극적으로 이성애 규범적 질서의 해체를 목표로 하며, 여기엔 한국사회의 오랜 믿음인 전통적 가족관계를 배격하는 것 또한 포함된다.
그러나 퀴어문학은 자주 퀴어문학의 문제의식을 제한하려 하는 목소리에 직면한다. 퀴어문학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오혜진 평론가는 “그 질문이 계속 나오는 게 한국의 현실”이라며 “마치 퀴어문학을 특정하는 조건이 있는 것으로 상정하고 그 조건에 대해 묻는 듯하다”고 평했다. 퀴어문학에 대해 자주, 그러나 부당하게 상정되는 조건이란 무엇일까. 오 평론가는 “퀴어문학의 문제의식을 퀴어로서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에 한정”하거나, “이 문제의식을 담지 않은 퀴어문학은 보편성의 문학이지 퀴어문학이 아니”라고 보는 시선에 의문을 제기한다. 그에 따르면, 퀴어문학에 요구되는 ‘조건’엔 사회가 퀴어에 요구하는 특정한 방향성이 일정 부분 반영된다. 박상영의 소설 ‘알려지지 않은 예술가의 눈물과 자이툰 파스타’에 등장하는 평론가 김의 발언은 그 조건의 한 전형을 이룬다. 그는 동성애자에게 ‘가슴 속에 우물’이 있어야 한다고 말하며 퀴어서사에는 ‘보통의 사람들을 설득할 수 있는 치명적인 ‘지점’’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김건형 평론가가 ‘2018, 퀴어전사’에 쓰듯, 이는 사실 퀴어로 하여금 ‘치명적으로 취약한 존재가 되라는 명령’이다. 그러니까, ‘퀴어이기 때문에 겪는 고통’에 대해서만 논하라는 제언. 퀴어문학에 가해지는 이와 같은 요구는 퀴어문학의 범위를 축소시키고 고립시킬 뿐이다.
사회에서 퀴어의 존재는 종종 지워진다. 이런 이성애 규범은 문학 작품의 감상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차미령 문학평론가가 ‘너머의 퀴어’에서 퀴어가 지워진 사례로 뽑은 예를 따라가 보자. 차 평론가는 최은영 작가의 ‘그 여름’에 대해 비평적 논의를 든다. 그는 수이와 이경이 헤어진 이유는 그들이 레즈비언 커플이어서가 아니라 계급의 차이 때문이란 일반적인 해석에 동의하면서도, ‘‘그 여름’이 레즈비언이 아니더라도 이해할 수 있는 사랑 이야기로 읽힌다는 소감들은 두 인물의 성을 남성과 여성으로 치환하여 재구성하는 고정 관념이 발현된 것’이 아니냐 되묻는다. 이는 퀴어문학을 ‘보편적 사랑 이야기’로 치환하려는 시도는 결국 문학에서 퀴어의 존재를 지우려는 시도와 맥을 같이 한다는 해석이다. 따라서 ‘퀴어문학’은 이를 벗어나기 위한 전략적 명명이다. 오혜진 평론가는 “보편적 서사라는 말은 누구에게 보편인가”라고 질문하며 “퀴어의 존재를 가시화하기 위해 ‘퀴어문학’이란 용어를 쓸 뿐, 퀴어의 본질이 있다는 것은 아니”라고 말했다.

‘무엇’이 아닌 ‘어떻게’가
퀴어문학을 만든다
일단 ‘퀴어문학의 조건은 무엇인가’란 낡은 질문을 벗어나면, 오히려 더 자유롭게 퀴어서사를 발견할 수 있다. 퀴어문학은 ‘무엇을 읽고 쓰느냐’가 아닌 ‘어떻게 읽고 쓰느냐’로 결정되기 때문이다. 최은영의 소설 ‘고백’에는 레즈비언의 커밍아웃과 자살이 등장한다. 오혜진 평론가는 ‘지금 한국 퀴어문학장에서 ‘퀴어한 것’은 무엇인가’에서 ‘고백’의 서사가 미주, 주나의 오랜 친구이던 진희의 커밍아웃과 죽음에서부터 파생됨에도 불구하고 ‘그 누구도 커밍아웃에서 죽음에 이르기까지 진희가 경험했을 내면의 드라마를 궁금해하지 않는다’는 점에 주목한다. 이 과정에서 진희의 죽음은 미주와 주나가 ‘자신이 누군가에게 그토록 ‘유해한 존재’일 수 있음을 깨닫게 하는, 일종의 ‘영감을 주는 사건’으로 의미화’된다. 오 평론가는 ‘퀴어 판타지를 발명하는 영광’에서 이런 서사와 해석 속에는 ‘레즈비언 욕망’을 투영하기 어렵다고 말한다. 그는 ‘모든 서사의 목적’이 ‘레즈비언 독자성에 어필할 필요’는 없다고 당부하며 다만 “순수하게 레즈비언 욕망을 반영하는 성정체성이나 재현전략이 있다는 믿음은 허구에 불과”함을 지적한다.
따라서 오혜진 평론가는 특정한 형식보다 “서사를 통해 자기도 몰랐던 퀴어적 욕망을 발견하게 하는 것”을 퀴어문학의 핵심 목표로 설정한다. 그의 ‘퀴어판타지를 발명하는 영광’에 따르면 퀴어미학은 서사 속에 주어진 기호들을 사용하여 ‘작품을 ‘퀴어적’으로 해석하는 것’을 과제로 삼는다. 김봉곤의 ‘라스트 러브 송’은 서사적 기호의 활용 여부에 따라 극명한 해석의 차이를 보이는 작품이다. 소설 속 ‘나’는 만난 지 얼마 안 된 남자의 갑작스러운 부고를 듣고 장례식장에 가게 되는데, 오 평론가는 소설 속에 등장하는 ‘사인이 알려지지 않은 죽음, 설명되지 않는 고인의 신원, 말할 수 없는 고인과의 관계’ 등이 ‘게이 서사에서는 반복돼 온 코드’라고 읽어냈다. 누군가에게는 별다를 것 없는 장례식의 풍경으로 보일 수 있으나 ‘특정 문화에 대한 경험과 지식을 활용해 작품을 감상’하면‘라스트 러브 송’은 ‘퀴어문학’으로 읽기에 충분하다.
퀴어라는 이름 아래 퀴어는 하나인가
하지만 퀴어문학으로 한데 묶여 불린다고 해도 그 속에서 각각의 지위와 위상은 다르다. 최근 한국의 레즈비언문학에선 가난이나 계급 문제가 계속해서 언급된다. 김건형 평론가는 ‘2018, 퀴어전사’에서 ‘레즈비언 서사가 지속적으로 경제적 생존의 위기를 문제 삼는 것은 증상적’이라고 평하며 게이 서사보다 레즈비언 서사가 훨씬 자주 경제적 생존의 문제와 결부된다는 점을 지적했다. 김혜진의 《딸에 대하여》는 7년 된 애인이 있는 레즈비언 딸이 어머니의 집에 애인과 함께 얹혀살게 되는 이야기다. 김 평론가는 ‘불법 해고를 감당해야 하는 청년 비정규직이 아니고, 주거비를 감당하지 못하는 상황이 아니었다면 애초에 두 사람은 어머니와 만날 일이 없었을 것’이라며 ‘이들이 생존을 위협받는 청년으로 재현’된 것은 ‘필연적’이라 말한다. 한국 사회에서 레즈비언들은 여성이자 성 소수자의 신분으로 어려움을 겪는다. 이것이 다층적 측면에서의 약자가 겪는 이중고임을 레즈비언 문학은 여실히 보여준다.
문단의 주류를 차지하지 않을 뿐, 게이, 레즈비언문학이 아닌 퀴어문학 또한 존재한다. 자신을 트랜스젠더 여성이라 밝힌 김비 작가는 트랜스젠더를 주인공으로 하는 《입술나무》, 《플라스틱 여인》 등의 소설을 냈다. 2007년 여성동아 장편소설 공모 당선작인 《플라스틱 여인》은 트랜스젠더인 주인공 연이 사랑하는 남자와의 결혼을 위해 그의 부모를 만나는 자리에서 트랜스젠더임이 밝혀져 생기는 갈등을 담고 있다. 뿐만 아니라 크로스드레싱을 소재로 한 작품은 최근 퀴어문학이 급부상하기 전부터 반복적으로 등장했다. 김연수의 ‘구국의 꽃, 성승경’은 2000년대에 들어서기 이전부터 크로스드레싱이 소설 속에 나타났음을 보여주며, 천운영의 ‘엄마도 아시다시피’ 또한 ‘크로스드레싱’을 그려내고 있다.
이처럼 ‘퀴어문학’은 양가적인 개념이다. 기존의 이성애적 규범에 반발한다는 방향성을 공유하면서도, 몇 가지 정체성으로 환원되지 않는 다양한 스펙트럼의 인물들을 다룬다. 퀴어문학을 이성애규범 속 특정한 범주로 한정 짓는 시도는 이런 방향성과 다양성을 담을 수 없다. 그 틀에 누락되는 의미를 건져내기 위해서는, ‘퀴어’와 ‘퀴어문학’을 규정하려는 시도부터 멈춰야 한다. 가만히 그 목소리를 들으려 할 때에서야 비로소 퀴어문학을 읽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