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혹한 노동 환경에 대한 비판은, 아이돌에 닿으면 눈에 띄게 느슨해진다. 예능 방송은 유명 아이돌이 매니저 몰래 변기 위에서 밥을 먹은 일을 재미있는 일화로 소개하거나 아파서 쓰러지기 직전의 상태로도 무대를 끝마치는 모습을 두고 그 ‘프로다움’을 칭송한다. 미디어는 아이돌에 대한 인권 침해나 과도한 노동 강도를 공공연하게 전시하고 대중은 이를 대수롭지 않게 소비한다.
아이돌이 전속기획사에 대항하거나 권리를 보호받을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연습생과 아이돌이 놓인 인권 침해와 노동 실태를 들여다보고 관련 제도의 실효성을 살펴봤다.
정체가 불분명한 연습생 계약
한국 연예기획사는 아이돌 육성의 전 과정을 주도한다. 이 를 통해 효율적이고 경쟁력 있는 문화 컨텐츠가 제작되지만, 기획사와 아이돌의 종속 관계는 각종 인권 침해와 불공정 계약의 원인이 됐다. 본격적인 연습생 생활이 시작되면 보통 기획사는 연습생에게 연습생 계약을 제시한다. 그런데 해당 계약의 내용과 형식은 공정성을 현저히 잃지 않는 한 제도적 제약이 없어, 기획사마다 체결하는 연습생 계약의 형태와 내용이 모두 다르다. 본지와 인터뷰한 A씨와 B씨 역시 다수의 기획사에서 계약 기간이나 회사의 의무를 상세히 기술하지 않은 무의미한 연습생 계약을 경험했다. 투자 금액의 2~3배에 달하는 과도한 위약금 조항이나 연습생 계약 종료 후 반드시 동일한 기획사와의 계약을 진행한다는 조항 등 불공정약관을 담은 연습생 계약은 더욱 악질적이다. 2017년 공정거래위원회 가 SM·YG·JYP를 비롯한 8개 대형 기획사 연습생 계약서의 불공정약관을 다수 바로잡았으나, 인터뷰를 통해 중소형 및 신생 기획사의 연습생 계약 횡포는 여전함을 알 수 있었다.
연습생 생활을 해야함에도 연습생 계약이 아닌 전속계약을 요구하는 기획사도 있다. 전속계약은 보통 데뷔를 위해 체결하며, 계약 기간이 상대적으로 길고 계약 위반 시 손해배상의 액수도 높게 책정된다. 총 6곳의 기획사에서 연습생 생활을 한 C씨는 “연습생을 시작할 때부터 7년 정도의 계약 기간이 설정된 전속계약을 요구하는 기획사가 대부분이었다”고 토로했다. 문화체육관광부에서 권고하는 연습생 계약 기간은 3년 이내지만, 몇몇 기획사는 가능성 있거나 나이가 어린 연습생을 자사에 묶어두기 위해 전속계약을 강제한다. 특히 대부분의 연습생들은 미성년자거나 계약의 중요한 정보에 대한 지식이 부족해 더욱 불리한 입장에 놓인다. C씨는 “당시엔 연습생 계약이 따로 있는 줄 몰랐고, 해당 소속사에서 데뷔만 하면 이전 계약은 무의미해지고 새 계약을 맺으면 된다길래 당연히 해야 하는 줄 알았다”고 설명했다.

연습생 시절부터 시작되는 인권침해
아이돌 육성 과정에서 학습권을 비롯한 기본권은 무시되는 경우가 많다. A씨와 C씨는 학창시절부터 연습생 생활을 했는데, 모든 기획사에서 의무교육과정에 있는 학생을 포함한 전체 연습생에게 학교 수업을 뺄 것을 요구한다고 증언했다. A 씨는 “오후에 트레이닝을 받을 수 있도록 기획사 차원에서 학교에 공문을 보내 점심시간 이후에 조퇴할 수 있게 한다”고 말했다. C씨는 “일반 연습생 신분일 때는 그나마 오전 수업은 들을 수 있지만, 팀을 꾸려 본격적으로 데뷔를 앞둔 데뷔조 연습생이 되면 기획사가 학교를 무단결석하도록 지침을 내렸다”며 “유급되는 일수를 넘지 않게 한 번씩 학교를 나간 게 전부고, 데뷔하면 아예 자퇴하라는 얘기도 들었다”고 설명했다.
사생활에 대한 통제 역시 심각한 수준이다. B씨는 “합숙 생활을 할 때 어디를 가든 구체적으로 사진을 찍어 회사에 보고 해야 했고, 숙소에 CCTV를 설치하는 경우도 있다”고 말했다. C씨는 데뷔조가 된 이후 매니저의 동행이 없으면 외출한 적이 없었다. C씨는 “모든 SNS 계정을 직원이 보는 앞에서 탈퇴하는 것은 기본이며 기획사 측에서 데뷔조 연습생별로 핸드폰의 갤러리와 엔드라이브 등의 사진을 모두 수합해 개인정보 포트폴리오를 만들었다”고 증언했다. 이 포트폴리오는 ‘회사가 너의 모든 과거를 안다’는 식의 협박이나 회유의 수단으로 이용됐다. 외부로 연락하는 것 역시 금지됐다. C씨는 “숙소에선 모든 전자 기기가 금지됐고 오직 통화만 가능한 2대의 휴대전화가 제공됐는데 이마저도 부모님들, 직원과의 전화 통화만 허락됐다”며 “그 외의 사람에게 연락하지 않는지 검사하기 위해 회사는 일주일에 한 번씩 통신사에서 전화 내역을 뽑았다” 고 폭로했다.
성희롱이나 외모 평가는 여자 아이돌과 연습생에게 집중적으로 발생했다. B씨는 회사에서 다른 연습생에 대한 성폭력 관련 문제가 발생해 연습생 생활 중간에 기획사를 옮겼다. C 씨 역시 “‘다리가 잘 빠졌다’ 정도의 말은 미성년자에게도 서슴지 않고 뱉는 분위기였으며, 월말평가 때 성형외과 의사가 앞에 앉아 연습생을 한 명씩 세워놓고 외모를 평가했고 이를 바탕으로 시술이나 성형수술을 회사가 강제했다”고 설명했다. 무섭고 싫어서 연습생이 거부해도 그냥 상담만 받으러 가 자고 회유해 병원에 데려간 뒤 억지로 수술을 시킨 경우도 있었다고 C씨는 회상했다.
구속할 뿐, 보살피지는 않는다
연습생은 데뷔조로 발탁되면 1년 정도의 최종준비 기간을 거쳐 아이돌로 데뷔한다. 이때 소속사와 평균 7년의 전속계약을 맺는다. 계약 기간 동안 아이돌의 활동으로 발생하는 수익은 연습생 시절부터 투자된 훈련활동비와 데뷔 과정의 직접 투자비 등을 포함해 계산한 손익분기점을 넘기 전까지 전부 기획사에게 돌아간다. 주로 민사법상 도급 혹은 위임 계약의 형태를 띠는 아이돌 전속 계약에서, 이런 ‘선공제’의 정산 방식은 합법적인 형태다. 따라서 ‘뜨지’ 못한 아이돌이 어떤 정산도 받지 못하는 것은 업계에서 당연시된다.
이은정은 2019년 ‘연습생 제도와 불공정 계약이 초래하는 아이돌 인권문제’에서 중소형 기획사일수록 일정 기간 내에 팀이 뜨지 못하면 기획사가 손해의 누적을 막기 위해 새로운 앨범 제작이나 가수 지원 등의 투자를 멈춘다고 적는다. 이때 해당 아이돌이 계약 해지 위약금을 마련할 수 없다면 계약 기간 동안 정산 없이 기획사에 묶여있는 일도 다반사다. A씨도 실패하는 순간 20대 전부가 날아간다는 불확실성과 두려움에 결국 데뷔를 목전에 두고 아이돌의 꿈을 포기했다. 그는 “유명 해지지 못한 아이돌 지인들이 계약 내내 자신의 노래는 내지 못한 채, 외국의 작은 무대에서 유명 아이돌의 커버 공연을 서는 경우를 흔히 본다”고 덧붙였다.
수익 창출이란 목표는 살인적인 스케줄로 귀결된다. 아이돌 팬 D씨는 “데이식스의 작년 겨울 유럽 투어의 경우, 이틀 단위로 다른 나라를 다니는 등 체력적으로 무리가 되는 스케 줄을 강행했다”고 설명했다. 팬 E씨 역시 “트와이스는 얼마 전에 브이앱에서 2021년 초반 스케줄까지 다 정해져있는 상태라고 언급한 적이 있다”며 “무리한 일정을 소화하고 있다는 불만은 팬들 사이에서 계속 제기되지만 회사에서는 피드백이 없는 상태”라 설명했다. 중국에서 아이돌로 데뷔했던 B씨 역시 “신인임에도 불구하고 매일 3~4시간 이상은 잘 수 없는 체력적으로 버거운 스케줄이 이어졌다”고 토로했다.
과중한 스케줄도 문제지만, 반드시 성공해야 한다는 압박과 끊임없는 대중의 눈초리는 데뷔가 확정된 연습생과 아이돌 에게 극심한 정신적 문제를 불러일으킨다. 최근 우울증 및 기타 정신질환으로 인한 유명 아이돌들의 잇따른 활동 중단 및 탈퇴는 해당 문제를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C씨는 억압적인 연습 환경에서 정신적 고통을 더는 견디기 힘들어 기획사를 나 와 6개월 간의 정신과 진료를 받았다. B씨 역시 “체력적으로 힘들기도 했지만, 정신적, 심리적 문제가 가장 견디기 힘들었다”고 호소했다. 두 인터뷰이 모두 (한국)기획사가 이들의 건 강 관리를 위해 노력한 바는 없다고 얘기했다. C씨는 맴버들이 매니저에게 정신적 고통을 호소하거나 팔뼈가 부러져 병원 에 데려가 줄 것을 요구했지만 오히려 그때마다 외출을 제지당하며 ‘너만 그런 게 아니다’, ‘다 이겨내야 한다’ 등의 답변 을 들었다고 울분을 터뜨렸다.

아이돌은 노동자일까
이처럼 높은 강도의 노동에 시달리고 있지만, 현재 아이돌은 법적으로 대중문화예술인의 지위에 놓일 뿐 근로기준법상 노동자로는 인정되지 않는다. ‘희망을 만드는 법’의 김두나 변호사는 “아이돌은 연예기획사에 소속돼있긴 하지만 보통 예술인들이 맺는 전속계약이 근로 계약의 형태가 아닌 도급 또는 위임 계약의 성격이기에 기획사와 아이돌의 사용-종속 관계가 모호하다고 판단되는 것 같다”고 설명했다. 민법에서 도급과 위임은 각각 일과 사무와 완성을 목적으로 하는 계약인데, 노무제공자가 자신의 판단과 재량권에 따라서 독립적으로 업무를 처리한다는 점에서 근로계약과 결정적인 차이가 발생한다. 도급 또는 위임계약은 당연히 근로기준법의 적용을 받지 않는다. 따라서 아이돌에게도 근로시간 및 조건과 관련해 노동 관계법의 보호 조항이 적용될 수 없다.
그럼에도 아이돌을 단순 예술인이 아니라 엄연한 ‘문화노동자’라 주장하는 목소리가 있다. 박성모의 2015년 ‘자본주의 사회에서 나타나는 아이돌 그룹의 소외’ 보고서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생존을 위해 예술 활동을 수행한다면 그것은 판매를 전제로 하기에 강요된 노동을 내포한다고 봤다. 문화사회연구소 이종임 이사 역시 ‘문화산업의 노동구조와 아이돌/연습생’ 포럼에서 ‘아이돌 가수들은 오랜 합숙 생활, 구성원 내의 철저 한 역할 분담, 사생활 관리 등을 통해 자신들의 감정을 통제하 는 생활을 지속적으로 영위하며 감정노동을 한다는 논의가 지배적이다’라고 지적했다. 미디어를 통해 자신의 일상을 전시하며 감정을 통제받고, 치열한 경쟁 속에서도 성과를 위해 모든 것을 감내하는 아이돌의 생활은 그 자체로 하나의 노동 형태로 인정돼야 한다는 주장이다.
아이돌 노동의 성격뿐 아니라 기획사와의 관계에서도 근로자성이 인정될 여지가 있다. 법적으로 근로자성을 검토하는 데는 그 실질에 있어 종속 및 지휘 관계의 존재 여부가 핵심이 된다. 김두나 변호사는 “아이돌 지위의 실질적인 내용을 살펴 보면 근로자성이 인정될 여지가 굉장히 많다”고 주장했다. 한국 아이돌은 주체적으로 예술활동을 이어가기보다는 기획사에 소속돼 재능의 육성부터 작품의 콘셉트 결정까지 활동의 주도권을 기획사에 뺏긴다. 해당 구조에선 정상급의 연예인이 아닌 이상, 계약의 형태는 일대일 계약이더라도 실제로는 기획사와 아이돌 간에 사용-종속 관계가 형성된다. 대중문화예술인은 전통적으로 노동 관계보다 개별 용역 관계로 활동해왔지만, 최근 극단 소속 배우나 시향 악단의 연주자의 근로자성이 인정된 사례가 있다. 김두나 변호사는 “이들처럼 아이돌도 노동법제의 개선이나 법원의 판례를 통해 근로자성이 인정 되는 기회가 있다면 근로기준법의 보호를 받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법률로 제정됐지만 가이드라인에 그쳐
아이돌의 근로자성 문제가 본격적으로 다퉈진 바는 아직 없다. 그렇다면 노동 관계법 말고는 아이돌의 노동 환경을 보호할 제도가 없을까. 2009년 동방신기 계약 분쟁과 故장자연 사태가 발생하면서 대중문화예술산업 전반의 불공정 계약 관행과 인권 침해 실태에 대한 개선이 사회적 과제로 떠올랐다. 이에 같은 해, 정부에 의해 ‘예술인 표준전속계약서’가 만들어 졌고, 올해 들어선 ‘연습생 표준계약서’와 ‘청소년 대중문화예 술이 표준 부속합의서’ 등이 추가됐다. 2014년에는 ‘대중문화예술산업발전법’이 제정되기도 했다. 아이돌을 비롯한 대중문화예술산업에 종사하는 이들을 보호하기 위한 제도였다.
정산 등에 관한 아이돌 전속계약 상의 불공정약관 역시 개선되고 있다. 김두나 변호사는 2010년대 초반부터 ‘독점규제 및 공정거래에 대한 법률’ 등에 기반해 공정거래위원회 분쟁이나 소송 등에서 불공정거래로 결정한 부분들이 많이 누적돼, 전속계약에서의 수익분배나 회계 처리 방식, 위약금 문제는 비교적 많은 부분이 개선됐다고 덧붙였다. ‘대중문화예술산업발전법’ 에 명시된 기획사 등록제로 인해 미등록 기획사가 대부분 사라지고 전체 산업 규모가 양성화된 점도 긍정적이다.
그러나 ‘대중문화예술산업발전법’과 일련의 표준계약서들은 아이돌과 연습생의 인권 침해와 노동 문제를 해결하기에 충분치 않다는 지적이 있다. 해당 조항들은 단지 기본적 지침일 뿐 법적 구속력과 실효성은 약하다는 것이다. 먼저 ‘대중문화예술산업발전법’에는 벌칙조항이 부족해 기획사들이 법을 지킬 유인이 부족하다. 현재 해당 법에는 성매매 처벌, 청소년의 성보호, 유해약물·물건·업소 등에 대한 접근 금지, 기획업 등록 등과 관련한 조항 외에는 벌칙 규정이 미미한 수준이다. 김두나 변호사는 이에 “‘대중문화예술산업발전법’이 민사적 분쟁 시 위법의 근거로 쓰일 수는 있겠지만 구체적인 벌칙조항이 부족해 기획사의 자발적인 법 준수를 기대하기 힘들다” 고 설명했다. 특히 “이 법을 근거로 문화체육관광부가 시정명령을 내린 기록도 없다”며 해당 법의 실효성을 문제시했다.
아이돌과 연습생의 권리를 보장할 구체적인 규정이 없는 것도 문제다. ‘대중문화예술산업발전법’은 제2절 제21조에서 청소년 대중문화예술인의 학습권 보호를 내용으로 담았지만, 여전히 기획사에서 의무교육과정 학년에 놓인 학생들의 조퇴나 자퇴를 요구하는 일이 빈번했다. 김두나 변호사는 이런 현 상이 가능한 이유 중 하나로 “구체적으로 기획사가 어떻게 학습권을 보장해야 하는지 규정된 바가 없기 때문이다”라고 설 명했다. 미국 캘리포니아주 같은 경우에는 아동·청소년 배우의 학습권을 보장하기 위해 학생이 작품에 출연할 경우 학교장의 허가를 받아야 하며 부모나 보호자, 그리고 한 명의 현장 교사와 한 명 이상의 간호사가 촬영장에 동행할 것이 법에 명시된다. 또한, ‘스튜디오 교원 제도’가 있어 해당 주의 노동담당 장관이 공식적으로 자격을 부여한 전담 교사가 일반적인 학습지도 외에 연기자들의 건강, 안전, 도덕 문제도 함께 돌본다. 이와 같은 구체적인 규정이 없다면 ‘대중문화예술산업발 전법’은 선언적 의미에 그치게 된다. 법의 실효성이 약하니 행정부 차원의 가이드라인일 뿐인 연예인·연습생 표준계약서의 실효성은 더욱 약할 수밖에 없다. 이종임 이사는 “표준계약서가 시작으로서 의미는 있지만 효과는 미진하다”고 지적했다.
청소년 대중문화예술인의 용역제공시간을 나이별로 세분화하고, 용역 제공 이후 심리 상담이나 치료가 필요한 경우 국가와 지자체가 그 경비를 지원하게 하는 등의 내용을 담은 ‘대중문화예술산업발전법’의 개정안이 지난 8월 발의돼 현재 국회에 계류 중이다. 제도와 대중이 아이돌의 노동을 외면한다면 기획사에 종속된 아이돌과 연습생의 권리는 보호될 수 없다. 아이돌과 연습생의 열악한 노동 실태가 폭로되는 지금, 실질적인 해결을 모색하는 과제가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