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이야기는 소설이 아니다
93년생 이공계 새내기가 전문연구요원이 되기까지
여성에게 '내 공간'을 가질 권리를

93년생 이공계 새내기가 전문연구요원이 되기까지

가상 사례를 통해 전문연 제도를 들여다보다

※ 본 기사에 등장하는 인물은 모두 가상의 인물입니다. 본 기사는 전·현직 전문연 및 예비 전문연과 지망생(총 9명)의 인터뷰를 종합해 재구성한 것임을 알려드립니다.

2012년 1월 18일 수요일

  ‘1993년생은 2012년도 징병검사를 받으셔야 합니다. 병무청 홈페이지에서 징병검사 날짜를 선택하세요(날짜별 선착순입니다).’ 에휴… 드디어 올 게 왔구나. 강제로 끌고 가는 거면서 무슨 대단한 선택권이라도 주는 것처럼 구네. 하여간 맘에 안 든다. 그마저 선착순이라니… 통지서에 적혀있는 문구, ‘젊은 날의 특권이자, 대한민국 남자라면 누구나 이행해야 하는 병역의 의무!’ 특권? ㅋㅋㅋㅋㅋ 이런 특권이 또 어딨냐.

2012년 3월 5일 월요일

  입학식 때 가보긴 했지만, 수업을 들으러 학교에 가는 것은 오늘이 처음이었다. 강의계획서를 보니 수업 교재가 죄다 영어 원서였다. ㄷㄷ 수능 끝나고 영어 공부라도 했어야 하나. 아 몰라~

2012년 5월 24일 목요일

  오늘은 선배들과 예인촌에 갔다. 듣던 대로 우리 과엔 대학원 갈 사람이 많은 것 같다. 나도 그쪽으로 생각이 있으니까 선배들한테 이것저것 물어봤다. 요즘은 보통 석박사통합과정으로 들어간다고 했다. 될 수 있으면 유학 가라고도 했다. 한국에서도 못 하는 건 아니지만 소위 큰물에서 놀아야 시야가 넓어진단다. 연구시설에서도 차이가 많이 난다고. 당연히 논문의 질도 차이가 날 수밖에 없겠지. 이 얘기를 듣고 나니 나도 유학을 가는 게 맞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 맞다. 군대 얘기도 나왔다. 유학을 생각하고 있는 11학번 형들은 올해 아니면 늦어도 내년에 군대를 갈 거라고 했다. 군대 가기 너무 싫지만 어쩔 수 없다고. 군대 안 가고 버티다가 졸업하자마자 바로 유학을 가서 초스피드로 박사를 따고, 나중에 한국으로 돌아와 군대를 가는 방법도 있다는데 좀 오버인 듯. 딱 봐도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 보니 보통 학부 때 군대 갔다 오고 나서 맘 편히 유학을 간다고 했다. 종훈이 형은 전문연이란 것도 있다고 얘기해줬다. 국내대학원에서 박사 따는 대신 군대 안 가도 되는 거란다. 계속 공부할 사람들은 보통 박사 전문연을 택한다고 했다. 솔깃하다. 대학원 생활이 힘들어도 군대보단 낫겠지. 진지하게 고민해봐야겠다.

2012년 7월 17일 화요일

  신검을 다녀왔다. 내가 군대 가기 전에 통일될 줄 알았는데 ㅋㅋㅋㅋㅋ 내가 이 말을 하고 있네 에휴… 이제 뭔가 실감이 난다.

2013년 6월 6일 목요일

  2학년 되니까 부쩍 고민이 깊어졌다. 시험기간이 되니 더 그런 것 같다. 학교를 다니면 다닐수록 대학원에 가고 싶다는 마음이 점점 커진다. 잘 버틸 수 있을까 하는 걱정도 없진 않다. 근데 아무리 봐도 전공이 적성에 잘 맞는다. 가장 큰 걸림돌은 역시 군대다. 취업이나 유학 생각하는 애들은 슬슬 군대를 간다. 나는 대학원에 가긴 갈 것 같은데 유학 갈지 전문연 갈지 아직 모르겠다. 빨리 정해야 할 텐데 ㅠㅠ

2014년 12월 28일 일요일

  부모님께 대학원에 가고 싶다고 말씀드렸다. 부모님께서는 그럼 군대는 어떻게 할 거냐고 물으셨다. 내년이면 벌써 4학년이라 그냥 군대 가기는 좀 그렇고 전문연이란 게 있다고 설명을 드렸다. 학부 4년, 대학원 수료까지 3년, 전문연 3년으로 잘하면 30살에 일찍 박사를 달 수 있으니까 안 할 이유는 없지 않냐고. 부모님께서는 유학은 안 가도 되겠냐고 물으셨다. 우리 분야는 서울대에도 좋은 교수님들이 많이 계셔서 굳이 해외로 나가지 않아도 된다고 말씀드렸다. 무엇보다 전문연을 하려면 대학원을 국내로 가야 한다.

2015년 10월 23일 금요일

  대학원 면접을 보고 왔다. 저녁엔 얼마 전에 제대하고 이번 학기 복학한 상준이를 만났다. 오늘 대학원 면접 보고 왔다니까 벌써 졸업하냐며 부럽다고 했다. 군대 빨리 치운 놈이 승자지 뭐. 자기는 2년을 쉬었더니 머리가 굳었단다. 좀 시무룩해지는 것 같더니 군대 얘기가 나오니까 신나서 얘기하더라. 유학 가려고 2학년 1학기 마치고 군대를 갔다며 시작한 군대 썰은 술자리 내내 계속됐다. 어지간히 맺힌 게 많았나 보다. 무조건 전문연 붙으라고도 했다. 군대 얘기를 듣다 보니 저긴 가지 말아야 할 곳이라는 생각만 강해졌다. 최악의 경우 30살 다 돼서 이등병 생활할지도 모른다. 으으…

2016년 4월 1일 금요일

  대학원에 온 지도 벌써 한 달이 지났다. 학부 때 수업은 정말 맛보기였구나… 대학원에 온 이후로 전문연 얘기를 더 많이 하게 된다. 선발시험 정보들도 공유한다. 학점, 텝스, 한국사능력검정시험이긴 한데 텝스만 신경 쓰면 된단다. 텝스 커트라인이 갑자기 너무 높아져 큰일이다. 한국사는 3급만 넘으면 되고, 학점도 대학원은 거의 퍼준다고 한다. 물론 학점은 ‘고고익선’이긴 하지. 학점 낮으면 그만큼 텝스 점수가 높아야 된다. 학점 안 나오면 대학원에서 재수강이라도 해야 되나.

2016년 5월 16일 월요일

  오늘 단톡방이 난리가 났다. 단톡방에 ‘[단독] 이공계 병역특례 2023년까지 폐지’란 제목의 기사가 공유됐다. 당장 3년 뒤부터 박사 전문연을 없앤단다. 화가 난다. 나 군대 어떡하지? 지금 하고 있는 석박사통합과정을 수료해야 전문연에 갈 수 있어서 이미 망했다. 국방부는 병역 자원 감소 때문에 이런 결정이 불가피하단다. 아니 전문연이 우리나라에 몇 명이나 된다고 이렇게까지 하나. 백번 양보해도 유예기간이라도 주든가 이렇게 갑자기 없애버리면 어쩌라는 거지. 왜 하필 나 때부터 이러는 거지. 천 명 더 뽑는 게 뭔 의미가 있는데 도대체. 하… 없어진 마당에 어쩌겠냐.

2016년 5월 19일 목요일

  전문연 폐지 안 되려나. 국방부가 아직 확정된 것은 아니라며 말을 바꿨다. 다음 정부로 최종 결정이 넘겨질 수도 있단다. 확정이 아니라니까 다행이긴 하지만 이랬다저랬다 너무 지친다.

2016년 6월 3일 금요일

  오늘 국방부 앞에서 학생들이 전문연 폐지 반대 기자회견을 했다. 기사 댓글을 쭉 읽어봤다. 전문연에 대한 곱지 않은 시선이 존재한다는 것을 다시 한번 느꼈다. 군대 가기 싫어서 찡찡대는 거다, 형평성에 어긋난다, ‘설카포’ 엘리트들을 위한 특혜다, 전문연 하면 돈도 많이 받는다더라 등등. 뭐 특혜도 맞고 특권도 맞다. 근데 우리 얘기도 좀 들어줬으면 좋겠다. 갑자기 없애버리면 나 같은 사람은 어떡하라고.

2017년 8월 12일 토요일

  한국사 시험을 보고 왔다. EBS에서 뭘 봐야 하는지 정해져 있어서 준비하는 데 어렵진 않았다. 무난히 통과할 듯. 물론 재미는 없다. 문과 애들은 이런 거 어떻게 하는지 몰라.

2018년 1월 16일 화요일

  지난번에 본 텝스 성적이 나왔다. 784점. 점수가 잘 안 올라 답답하다. 작년 합격자 평균이 832점이었다고 한다. ‘전문텝스요원’이란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다. 이럴 땐 솔직히 카이스트, 유니스트 애들이 부러운 게 사실이다. 박사 전문연 천 명 중 400명이 과기원 정원인데, 걔네는 시험도 안 본다. 부럽다.

  내일은 또 이번 겨울방학부터 시작한 텝스 스터디가 있는 날이다. 모의고사 얼른 풀어야지 ㅠㅠ 문제 풀고 단어 외우는 거 너무 지겹다. 이런 게 연구에 뭔 쓸모람. 그래도 전문연 가야 되니까 그냥 체념하고 한다.

  내 생각에도 딱히 다른 방법이 없긴 하다. 연구실적으로 평가하자는 의견도 있지만, 그것 역시 측정하기가 애매하다. 논문 개수로 해버리면 학과마다 차이가 너무 크다. 결국 공정성 측면에서 텝스가 차선인 듯.

2018년 6월 28일 목요일

  결국 이번엔 떨어졌다. 후기엔 훨씬 적게 뽑는데, 올해 안에 붙을 수 있을까 걱정이다.

2018년 7월 7일 토요일

  또 텝스 시험 보고 왔다. 같이 전문연을 준비하는 익숙한 얼굴들이 많이 보였다. 다음 학기 휴학하고 텝스 공부할까 고민도 했었는데 다행히 이번엔 좀 잘 본 것 같다. 입학할 때만 해도 연구랑 영어 병행해서 전문연 되라던 지도교수님께서 떨어지고 나니 압박을 주신다. 후기엔 꼭 붙어야 된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결국 전문연은 안 없어졌다. ‘아직’이라는 단서는 붙지만 그래도 다행. 또 언제 없앤다고 할지 모른다. 올해는 자연대 대학원도 정원 미달이란다. 애들도 불안하겠지. 그래서 요즘은 웬만하면 미리 군대 갔다 오는 분위기다.

2018년 11월 30일 금요일

  아 전문연 떨어졌다. 어떡하지 ㅠㅠ 올해 수료하자마자 바로 가려고 했는데 ㅠㅠ 우선 한 학기 수료 미루고 내년 전기 시험 한 번 더 쳐야겠다. 남들은 등록금 아깝지 않냐고 묻는다. 연구에만 쏟기에도 모자란 시간이 등록금보다 더 아깝다. 또 영어에만 붙잡혀 있을 생각하니 너무 답답하다.

2019년 11월 21일 목요일

  작년 이맘때 전문연 떨어졌던 게 기억난다. 벌써 전문연 생활한 지가 꽤 됐다. 사실 전문연이 되고 나서 달라진 것은 별로 없다. 같은 지도교수님 랩에서 하던 연구를 계속하고 있다. 오전 9시랑 오후 6시에 출퇴근을 찍어야 한다는 점이 불편하긴 하다. 특히 밤새 작업한 다음 날엔 출근하는 게 죽을 맛이다. 해외출장 가려면 절차가 복잡해 귀찮긴 한데 뭐 이 정도면 군대보단 낫겠지.

  정부에서 전문연 개편안을 내놨다. 없애네 마네 하더니 결국 유지하기로 했단다. 최근의 일본 무역 도발의 영향이 크다고. 하루 8시간이던 복무 시간을 주당 40시간으로 바꾼단다. 이공계 특성상 관측하고 실험하다 보면 9시~6시 근무가 말이 안 되는데, 잘 바뀐 것 같다. 물론 나랑은 상관없는 일이지만.

  아무튼 전문연을 유지한다니. 과학기술계 발전이니 중소기업 육성이니 인재 유출 방지니 긍정적 효과로 언급되는 것들이 설득력이 있었던 것 같다. 물론 모두 맞는 말이긴 한데… 들을 때마다 찜찜하다. 나도 지금 혜택을 보고 있긴 하지만, 의문이 들 때가 많다.

  유학 가고 싶은 애들 억지로 묶어둬서 과학기술 발전시킨다는 게 맞나 싶다. 애초에 우리나라 대학원이 가고 싶은 데가 돼야 하는 거 아닌가. 중소기업도 마찬가지다. 애초에 정부에서 책임지고 투자를 늘리거나 해서 중소기업을 활성화하든가 해야지. 군대 해결하겠다고 여기에 뛰어든 내가 할 말은 아닌가? 그래도 이게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 있을 리는 없는데… 다른 애들도 비슷한 생각 같은데… 근데 내가 이렇게 생각한다고 바뀌는 것도 아니고. 아무튼 후배들 생각하면 안 없어져서 다행이긴 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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