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번방 사건 두고 학생사회 내 공방 오고가

‘성차별적 구조’ 지적 여전히 유효해
▲제18차 연운위는 11시간 가량의 긴 논의 끝에 마무리됐다.

  3월 29일 오후 7시 2020 단과대학생회장연석회의(단과대 연석회의) 제18차 운영위원회가 열렸다. 제18차 운영위원회에는 3월 24일에 발표된 단과대 연석회의의 ‘텔레그램 n번방 성폭력 규탄 성명문’에 대한 농업생명과학대학 연석회의(농생대 연석회의)의 수정 제안서와 농생대 연석회의의 입장 철회 요구안이 동시에 발의됐다. 이에 n번방 사건의 해석을 두고 치열한 공방이 오갔다. 11시간가량 지속된 회의에선 어떤 말이 오고 갔을까.

▲제18차 연운위는 11시간 가량의 긴 논의 끝에 마무리됐다.

학생사회, n번방 해석 두고 격돌

  단과대 연석회의는 지난 3월 22일 2020 단과대 연석회의 제16차 운영위원회(연운위)에서 ‘텔레그램 n번방 성범죄 규탄의 건’을 만장일치로 의결했다. n번방 사건으로 드러난 사회의 성차별적 구조가 숱하게 발생했던 학내 인권침해·성폭력 사안들 이면의 구조와 맞닿아 있다는 문제의식에서다. 이에 단과대 연석회의는 ▲성명문 작성 및 게재 ▲온라인 해시태그 릴레이 ▲기자회견 개최를 통해 n번방 사건의 구조적 문제를 짚으며 학내 여론을 환기할 것을 결정했다. 

  단과대 학생회들도 성명문 작성에 동참했다. 3월 24일 단과대 연석회의가 ‘텔레그램 n번방 성폭력 규탄 성명문’을 게재한 것을 시작으로 경영대·농생대·의대·약대를 제외한 12개 단과대 학생회와 동아리연합회에서 성명문을 냈다.

  3월 26일 농생대 연석회의가 단과대 연석회의의 ‘텔레그램 n번방 성폭력 규탄 성명문’의 전면 수정을 요구하는 연서명을 받기 시작하며 국면이 전환됐다. ▲‘26만 명’이라는 수치 사용의 부적절함 ▲‘성차별이 사회적으로 정당화되고 있다’는 표현의 정정 ▲가해자 규탄 및 피해자 구제 우선시 ▲아동·청소년 보호 내용 추가 ▲차별금지법의 구체적 설명 등 다섯 가지 요구를 담은 입장문을 발표한 것이다. 농생대 연석회의는 입장문을 통해 단과대 연석회의 성명문은 ‘학생들의 의견을 대변하는 성명문으로도, 피해자들을 대변하는 성명문으로도 보기 힘들다’면서 ‘일방의 정치적 의견을 피력하기 위해 연석회의라는 위치를 이용한 것이나 다를 바 없다’고 강도 높게 비판했다. 

  이에 다음날(27일) 황운중(자전 14) 씨가 농생대 연석회의의 수정 제안서 철회 및 사과를 요구하고 나서며 n번방 성명문을 둘러싼 대립이 고조됐다. 황 씨는 수정 제안서의 골자를 차례로 반박하며 농생대 수정 제안이 ‘구조적 폐습을 은폐하고 축소하는 것에 일조한다’고 지적했다. 이어 ▲농생대 연석회의의 수정 제안서 즉각 철회 ▲농생대 연석회의 공식 사과문 게시 ▲연운위 내 숙의의 원칙 및 구성원의 공적 책임감 재확인을 요구했다. 이후 황 씨는 페이스북을 통해 대표 발의인 132인과 공동 발의인 211인을 포함한 학부생 343인의 명단을 공개했다.

n번방 사건의 본질을 규정하는 방법

  농생대 연석회의의 수정 제안서와 수정 제안 철회 및 사과 요구안 모두 회원 100인 이상의 연서를 받아 연운위 안건으로 채택됐다. 공론장이 마련되자 사람들이 나왔다. 현장 참관인 20여 명을 비롯해 화상회의 플랫폼 줌(Zoom)을 이용해 비대면 참관인도 논의에 참여했다. 이번 연운위는 한때 비대면 참관인이 99명에 달할 정도로 관심이 집중됐다.

   11시간의 ‘마라톤’ 회의는 농생대 연석회의의 수정 제안 발제와 질의로 시작했다. 농생대 연석회의의 수정 제안서를 발제한 임성호(작물생명과학 16) 씨는 “성차별적 구조가 사회에 만연하다는 주장에 다툼의 여지가 많고, 텔레그램을 이용하거나 다크코인으로 범죄 수익을 현금화하는 등 새로운 범죄 행태에 대해 문제 제기가 필요하다”며 “보다 많은 학생의 공감을 모을 때 본래 취지였던 n번방 사건 규탄에 다가갈 수 있다”고 수정 제안의 배경을 설명했다. 농생대 연석회의가 연서명을 진행하기 이전에 농생대 학부생들의 의사를 확인하는 과정을 거쳤는지에 관한 질문에 임 씨는 “공론화나 의견 수합 절차는 없었으며 먼저 농생대 의장단 내부에서 얘기가 됐고, 의장단을 비롯한 농생대 학생의 의견을 주로 취합했다”고 답했다. 학부생 425명이 연서명에 참여했다는 말도 덧붙였다.

▲임성호(작물생명과학 16) 씨는 농생대 연석회의의 수정 제안서를 발제했다.

  26만이라는 수치가 성명문의 신뢰도를 떨어뜨린다는 농생대 연석회의의 주장에 황운중 씨는 “객관적인 수치 집계가 불가능한 상황에서 수치의 신뢰도가 떨어진다는 지적에는 어폐가 있다”고 일축했다. 성차별적 구조가 n번방 사건의 가장 큰 원인이라는 점을 어떻게 증명할 것이냐는 질문에 황 씨는 “n번방 사건 내 특수한 맥락들을 전부 포괄할 수 있는 의제가 곧 성차별적 구조이자 여성혐오”라고 답했다. 개별 사안마다 존재하는 다양한 원인들의 기저에 성차별적 구조가 자리한다는 얘기다.

  성명문에서 아동·청소년 보호에 얼마나 비중을 둘 것인지도 의견이 갈렸다. 참관인 성민재(산업공학과 19) 씨는 “보호 대상은 여성이 아니라 아동·청소년”이라며 “분노할 지점은 피해자의 성별이 아니라 미성년자라는 점”라고 말했다. 이에 황운중 씨는 “아동·청소년이 중요하다는 데는 모두 동의할 것”이라면서도 “(그런 지적은) 결과적으로 여성에 대응하는 문제라는 시각을 훼손할 위험이 있다”고 지적했다. 

던져진 질문, 학생회와 정치란?

  질의를 마치고 농생대 연석회의의 수정 제안서 수용 여부에 대한 찬반 논의가 이뤄졌다. 자유전공학부 김현지 학생회장(자전 18)은 “연운위원 모두 지난 연운위에서 성차별과 여성혐오라는 배경을 확인해 만장일치로 의결했다”며 성명문 수정에 반대했다. 성명문은 절차적 정당성이 확보됐을 뿐 아니라 수정 제안 내용조차 이미 토론을 거쳐 기각됐다는 입장이다.

  학생회의 역할에 대한 팽팽한 의견 차이도 드러났다. 인문대 신귀혜 학생회장(국사 17)은 “학생회는 정치기구”라며 “성차별적 구조를 타파해야 한다는 사회적 합의가 이미 있었다면 이런 자보는 나오지 않았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학생회가 ‘오피니언 리더’가 돼야 한다는 얘기다. 반면 공과대학 이상민 부학생회장(에너지자원공학 17)은 “학생회는 학생의 입이 돼 의견을 모으고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며 “최대한 많은 학생이 동의할 수 있도록 의견의 교집합을 극대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농생대 연석회의의 수정 제안을 받아들이는 것이 더 많은 학부생의 동의를 보장하진 않는다는 지적이 뒤를 이었다. 김현지 학생회장은 “수정의 방향성 역시 의견이 갈릴 수 있다”고 지적했다. 참관인 김제우(정치 17) 씨는 “농생대의 제안대로 성명문이 나오면 서명을 취소하려 한다”며 수정 제안서에 동의할 수 없다는 입장을 밝히기도 했다. 성명문이 농생대 연석회의의 제안대로 수정되면 연서명에 합류할 사람보다 빠져나갈 사람이 더 많을 수도 있다는 얘기다. 

▲이견안을 논의 중인 연운위원들

  논란이 거듭된 끝에 농생대의 수정 제안서 원안을 두고 이견안이 발의됐다. 기존 성명문을 유지하되 향후 행동 기조에 수정 제안서의 요지를 비롯한 다양한 논점을 반영하자는 취지에서다. 구체적으로 ▲여러 추산치 및 출처 사용 ▲성차별적 사회 구조에 대한 부가 설명 ▲가해자 규탄과 피해자 구제 내용 보완 ▲여성 보호를 강조하되 각 단위의 필요에 따라 아동·청소년 보호 언급 ▲차별금지법 설명 보완 등의 항목이 포함됐다. 사회의 만연한 성차별을 지적하고자 한 성명문의 핵심은 유지된 셈이다. 선택 표결 결과 출석 11단위 중 기권한 공대를 제외한 10단위가 이견안에 찬성하며 원안 대신 이견안이 가결됐다. 

관용과 보호는 누구에게 필요한가

  이후 농생대에 사과를 요구하는 안건이 논의됐다. 당초 농생대 연석회의에 공식 사과를 요구했던 황운중 씨는 농생대 연석회의에 대한 단과대 연석회의의 유감 표명을 요구하는 수정안을 발의했다. 안건의 내용이 연운위에서 다뤄지는 것이 부적절하다는 지적에 원안에서 한 걸음 물러선 셈이다. 황 씨는 “단과대 연석회의가 성차별의 사회적 정당화라는 표현을 비판한 농생대 연석회의의 주장과 의견을 달리 한다는 점에 주안점을 둬 유감을 표명해달라”고 요청했다. 

  단과대 연석회의가 농생대 연석회의에 유감을 표명하는 것에 대한 우려가 제기됐다. 상위단체인 단과대 연석회의가 그보다 하위단체인 농생대 연석회의에 유감을 표하는 것이 압박이 될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동아리연합회 김희지 부회장(철학 15)은 “(단과대) 연석회의의 정치적 영향력을 생각하면 의결권이 없는 단위에게 유감을 표명하기는 어렵다고 생각한다”고 입장을 밝혔다. 동아리연합회 정규성 회장(철학 17) 역시 “(농생대 입장문이) 개개인이 아니라 연석회의에 대한 입장인 만큼 조금은 관용적으로 봐야 한다”고 말했다.

  황운중 씨는 “단과대 연석회의가 (이견에도) 관용적이어야 한다는 데에는 동의한다”면서도 “정말 보호받아야 할 사람이 누구인지 생각해달라”고 호소했다. 이어 “연석회의가 (농생대에 사과를 요구한) 지지자들에 대한 관용과 보호를 원칙으로 제시하지 않으면 저와 같은 사람들이 또 용기를 낼 수 있겠냐”고 덧붙였다. 사과 요구에 연서명한 사람들에게도 관용과 보호가 필요하다는 주장이다.

▲농생대 연석회의에 수정 제안서 철회와 공식 사과를 요구한 황운중(자전 14) 씨

  논의에 진전이 없자 ‘텔레그램 n번방 성폭력 규탄 성명문’과 관련해 학내에서 발생하는 다수의 2차 가해 및 혐오 발언을 규탄하는 입장문을 발표하는 것으로 대신하자는 의견이 제기됐다. 단과대 연석회의가 농생대 연석회의를 지목해 유감을 표명하는 것에 우려가 컸기 때문이다. 이런 내용을 담은 단일수정안이 만장일치로 가결되며 제18차 연운위는 11시간 만에 폐회했다. 회의 막바지에 이견이 오간 2차 가해 등의 용어 채택과 구체적인 개요는 추후 연운위에서 논의될 예정이다. 

학생사회가 풀어가야 할 숙제

  회의 과정에서 ‘에브리타임'(에타)나 ‘스누라이프’와 같은 익명 커뮤니티의 행태가 문제로 지적되기도 했다. 황 씨는 발언 도중 에타에서 매 발언이 실시간으로 조리돌림 당하고 있다는 점을 언급했다. 참관인 이나영(조소 17) 씨 역시 “에타나 스누라이프에서 혐오 표현을 스스로 자제하지 않는 것 같다”며 이어 “(농생대 입장문에) 2차 가해와 혐오 표현으로 번질 수 있는 워딩들이 있었다고 생각한다”며 농생대 측에 사과를 요구한 배경을 밝혔다. 

  참관인 장희진(동양화 15) 씨는 “(이번 논란과) 비슷한 일이 많이 있어왔고 그때마다 서울대 커뮤니티들은 늘 신상털이나 조리돌림 등을 일삼아 왔지만 학생회는 이런 커뮤니티에 뚜렷하게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면서 “앞으로 학내 커뮤니티에 대한 내규를 정하고 인신 공격 등으로 고통받는 학우들이 도움받을 수 있는 창구가 마련돼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참관인 장희진(동양화 15) 씨가 발언하고 있다.

  치열한 토론 끝에 이번 연운위는 향후 n번방 사건 규탄 행동의 방향성을 보완하는 것으로 마무리 됐다. 일련의 성명서로 촉발된 온·오프라인 상의 각종 혐오 발언에 대해 조치가 필요하다는 점에도 합의가 이뤄졌다. 이는 시작에 불과할 뿐이다. n번방 사건 규탄 행동과 학내 혐오 발언 문제 해결 등 학생사회가 풀어가야 할 숙제는 여전히 남았다. 단과대 연석회의를 비롯한 학생사회의 행보를 주목해야 하는 이유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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