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의 극작가인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연극인 『갈릴레이의 생애』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장면은 극의 클라이맥스인 갈릴레이와 안드레아의 대담일 것이다.
갈릴레이가 지동설을 주장했다는 죄목으로 투옥된 이후, 갈릴레이의 제자들은 초조하게 재판의 결과를 기다린다. 그들은 갈릴레이가 자신의 학설을 번복하지 않기를, 진리를 외면하지 않고 죽음을 불사할 것을 희망하고 있다. 오후 다섯 시에 종소리가 들린다면 이는 갈릴레이가 스스로의 죄를 인정하고 변절했다는 뜻이며, 따라서 제자들은 종소리를 듣지 않게 되기를 간절히 바랐다. 마침내 오후 다섯 시가 되었는데도 종소리가 울리지 않자 갈릴레이의 제자 안드레아는 환희에 차서 고함을 지르지만, 바로 그 순간 환호가 무색하게도 종소리가 크게 울려 퍼지며 갈릴레이가 교회에 굴복했다는 소식이 만방에 전해지게 된다. 갈릴레이에 대한 환멸에 사로잡힌 안드레아는 증언대에서 돌아온 갈릴레이에게 찾아가, 그를 격렬하게 비난하며 목숨을 불사하고 진실을 사수하려는 자가 없는 현실에 대한 개탄을 쏟아 놓는다. “영웅 없는 불행한 이 나라여!” 그러나 이러한 비난에 갈릴레이는 안드레아의 말을 역으로 되받아치며 오히려 한탄한다. “영웅을 필요로 하는 불행한 이 나라여!”
인상 깊은 갈릴레이의 한탄은 ‘영웅없는 사회가 불행한 것이 아니라, 영웅을 필요로 하는 사회가 불행한 것’이라는 금언의 형태로 현재까지 사람들의 뇌리에 새겨지게 된다. 브레히트의 시대를 뛰어넘는 통찰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만약 어떠한 사회가 평범한 사람들이 아닌 영웅에 의지해 유지되며, 시스템이 아닌 미담에 의지해 지탱된다면, 이러한 사회는 불행한 사회이다. 체제의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 데우스 엑스 마키나(deus ex machina)를 기다릴 수밖에 없는 사회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브레히트는 갈릴레이를 “그래도 지구는 돈다!”라고 비장하게 읊조리는 비극적 영웅으로 그려내지 않았다. 그는 사람들에게 카타르시스가 아닌 자성(自省)을 요구하고자 하였으며, 관객들이 극에 몰입하는 것이 아니라 낯설게 보기를 원했다. 사람들에게 쉽사리 영웅을 쥐어준다면, 사회는 ‘영웅을 필요로 하는 사회’에서 한 발짝도 나아갈 수 없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우리 사회는 어떠한 불행을 겪고 있는가? 우리는 영웅이 없기 때문에 괴로운 것인가, 아니면 영웅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괴로운 것인가? 진단을 위해서, 다소 뜬금없어 보일지 모르겠지만, 우리 일상생활에서의 정치의 지위를 재조명해보자. 오늘날의 정치는 소위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경멸의 대상이 된지 오래되었다. 사람들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고 정치 이야기를 일상적인 자리에서 꺼내는 일은 점점 어려워지고 있으며, 본래 가치중립적이었던 ‘정치적’이라는 수식어는 욕설에 가까운 뉘앙스를 띠게 되었다. 한국인들은 정치적인 절망감과 피로감에 시달리고 있으며, 이는 결국 정치에 대한 극심한 냉소주의로 귀결된다.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지표가 시민단체 참여율인데, 현재 한국 성인남녀의 시민단체 참여율은 10%를 밑돌고 있다. 이는 다른 나라들에 비해 크게 뒤떨어지는 수치이며, 예컨대 영국에서는 대학생의 70%, 성인의 약 80%가 주민운동이나 시민단체에 가입해있다. 시민단체 참여율은 시민성(civicness)을 측정하는 주요한 척도 중 하나이다. 이와 같은 지표가 저조하다는 사실은 일상생활과 정치가 그만큼 유리되어 있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은하영웅전설>에서.
이러한 상황은 민주주의 체제를 표방하는 국가로서는 자못 기이한 일이지만, 속사정을 따지고 들자면 지극히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산업화와 민주화에 성공한 한국이 들뜬 자신감을 자랑할 때 닥쳤던 1997년의 한파는 지독했고, 우리는 스스로 생존할 길을 모색해야 했다. 서민들이 국가의 주인으로서 책임감을 가지기는커녕 스스로의 운명의 주인이라고도 자신 있게 말할 수 없는 세월이 지속되었다. 이러한 추위가 극에 달했던 지난 2012년 겨울, 우리는 대통령을 뽑았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돌이켜보면 나랏님의 등극을 지켜본 셈이다. 정치적 무력감의 팽배는 개연적인 수순이었다. 그러므로 누군가가 ‘시민의 정치참여 미비’를 들어 오늘날의 현상을 규탄하고 서민들에게 책임을 묻고자 한다면, 혹자는 분노할 것이다. 먹고 살기조차 벅찬 세상을 만들어놓고 이제 우리에게까지 책임을 지우는 것인지, 그리고 오늘날 사람들이 정치에 무관심해진 이유는 소통하지 않는 위정자들이 빚어낸 세상의 모습 때문 아닌지.
이러한 분노에는 충분히 일리가 있다. 누구도 이런 사회를 원한 적은 없었으며, 기껏 나서봐야 자신만 손해를 보는 구조 속에서 살아가고자 한 적도 없다. 실은, 혹자라 눙칠 필요도 없이, 필자 스스로가 그렇다. 다만 이러한 분노가 스스로 부끄럽게 느껴지는 이유는 『갈릴레이의 생애』에 등장했던 안드레아의 개탄이 떠오르는 까닭이다. “영웅 없는 불행한 이 나라여!” 그러나 안드레아는 갈릴레이에게 희생을 강요했을 뿐, 스스로는 아무 것도 감수하지 않았다. 소시민인 대개의 우리들 역시 마찬가지다. 오늘날 우리들은 수많은 변절한 갈릴레이들을 마주하게 된다. 굴지의 외교통이면서도 개성공단 자금이 핵 개발에 전용되었다는 자료가 존재한다고 주장했던 장관의 사례는 일례에 불과할 뿐이다. 우리는 이들에게 분노할 자격이 있으며, 또 앞으로도 끊임없이 분노해야 한다. 그러나 분노가 주는 카타르시스에 만족하고, 이러한 분노를 행동으로 표현해줄 구세주적 위정자만을 기다린다면, 우리는 “영웅을 필요로 하는 불행한 이 사회여!”라는 한탄에 어떻게 대답할 수 있을까?
다나카 요시키가 『은하영웅전설』에서 강변하듯, 민주주의의 대척점에 있는 감정은 구세주에 대한 열망이며, 정치를 멸시하는 이들은 반드시 정치에게 보복당하게 된다. 한두 명의 영웅이 아니라 시스템이 사회를 움직이게 하려면 아마 먼저 목소리를 내야 하는 것은 우리 소시민들일 것이다. 무척 어려운 일이며, 어쩌면 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영웅을 필요로 하는 사회의 불행을 헤쳐나가고자 한다면, 우리는 마땅히 정치가 주는 질문에 스스로 답해야 할 것이다. 그 첫 목소리가 비록 작고 가냘프더라도. * 이 글은 총선 전에 마무리지은 글이다. 20대의 투표율이 적잖이 오르고, 이 글이 어느 정도 무용해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개인적으로 기쁘다.

김만수(경제 10) 자의에 의해서든 타의에 의해서든, 무난하고 평탄한 삶을 이어가게 되리라 생각하고 있는 소시민의 일원. 한가롭게 술이나 책, 사람을 만나는 삶을 즐기며 살아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