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광주민주화운동이 올해로 40주년을 맞는다. 광주민주화운동은 ‘북한군 개입 의혹’ 등의 왜곡과 폄하로 여전히 진상규명에 진통을 겪고 있다. 다행히 지난해 12월, 5·18 진상규명조사위원회가 출범하면서 기대를 모으고 있다.
1980년 5월 광주의 진실을 밝혀내려는 노력은 계속돼야 한다. 언론의 조명을 받지 못한 수많은 광주 시민과 그들이 속한 민간조직은 우리가 기억해야 할 진실의 일부다. 광주민주화운동의 선봉에 섰던 민주여성조직 ‘송백회’도 그 중 하나다. 당시 송백회의 회원이자 광주 민주화 운동 지도부의 일원으로서 활약했던 조선대학교 이윤정 교수에게 송백회에 대해 물었다.

송백회라는 단체의 시작이 궁금하다.
송백회는 80년대 이후 진보여성운동의 근간이 된 최초의 민주여성조직으로 1978년 11월 유신정권의 횡포가 극에 달했던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설립됐다. 1974년에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 사건이 있었다. 유신독재에 반대하며 민주주의를 열망하는 학생들에게 ‘인민 혁명을 시도하는 조직’이라는 혐의를 덮어씌워 구속했던 일이다. 당시 호남 지역에 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된 학생들이 많았다. 형을 받고 돌아온 학생들이 노동, 농촌, 빈민 현장으로 뛰어들기 시작하면서 각 부문 운동이 활성화됐다. 이때 여성운동에 대한 논의도 처음 이뤄졌다. 이에 전남대학교 학생부터 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된 사람들의 부인이나 교사, 간호사, 의사와 같은 직업여성들, YWCA 총무와 교회 여성까지 전남 지역 각계각층의 진보적 여성들이 모여 만든 자주적 여성단체가 바로 송백회다.
송백회의 첫 활동은 ‘옥바라지’ 사업이었다. 당시에는 사회적으로 양심수를 지원한다는 것 자체가 어려운 일이었다. 면회 가서 대화하는 것도 모두 녹취돼 정보과 형사들에게 전해질 만큼 감시가 엄중했던 시대였다. 양심수를 위해 영치금을 모으고, 털양말을 짜고, 수천 권의 책을 모아서 보냈다. 교도소 안의 편지를 밖으로 빼내기도 했다. 당시의 옥바라지는 단순한 돌봄이 아니라 민주운동의 방법이었다. 이후 여성의 자주적 이념을 구축하고 향후 활동 방향을 설정하기 위해 학습 모임이 꾸려졌다. 80여 명의 회원들은 사회과학 서적들을 함께 읽고 현대사, 여성운동사, 농촌, 노동 등 사회 전반의 문제를 공부했다. 사회운동을 위한 자금을 모으기 위해 도자기전, 붓글씨전을 열기도 했다. 온전히 우리 송백회 여성 회원들의 생각으로 개최했고 실제로 꽤 큰돈을 모을 수 있었다.
광주민주화운동 당시에 송백회는 구체적으로 어떤 활약을 했는가.
1980년 5월 17일 0시에 계엄령이 내려지자 과거 민주화운동을 했던 활동가를 대상으로 예비검속이 시행됐다. 송백회 여성들의 남편들도 잠자다가 형사들에게 끌려갔다. 예비검속으로 기존의 운동권이 모두 구속되면서 송백회는 광주 민주화운동의 주축이 됐다. 광주민주화 운동 당시 최초로 항쟁 자금으로 쓰인 조직의 돈이 바로 송백회에서 도자기전을 해서 모은 70만 원이기도 했다.
항쟁 중에는 무고하게 죽은 시민들의 장례식에 대해 주도적으로 논의했다. 항쟁이 시작된 후 며칠이 지나자 항쟁 지도부가 머물던 도청에는 시체가 널려 있었다. 우리는 시체 염을 위한 솜과 거즈천을 구했다. 열악한 상황에서도 어떻게든 그들을 추모하고 대중에게 알리고자 검은 천을 사 리본을 만들고 시체에 달았다. 리본을 만들고 남은 천으로 도청의 태극기 위에 조기를 달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23일부터 26일까지 진행된 다섯 차례의 시민궐기대회를 이끌었던 중심세력이 바로 송백회와 극단 ‘광대’였다. 기억 투쟁에서 승리하려면 광주 항쟁을 오래 끌고 가는 것이 관건이었다. 때문에 운동가들이 부재한 상태의 무질서한 시민군을 조직화하고자 노력했다. 장기 투쟁을 대비해 취사팀을 짜서 식사를 배급했고 도청 안으로도 취사팀을 보냈다. 또한 YWCA를 중심으로 항쟁공동체를 만들어 선전 및 선동 활동을 하는 것은 물론 화염병과 투사회보 제작을 도맡고 물품 확보와 보급을 위해 힘썼다. 항쟁이 지속될 수 있도록 지원했던 후방의 핵심이자 또 하나의 투쟁본부가 바로 송백회였다.
특히 송백회는 27일 새벽까지 목숨을 걸고 무기반납과 항복을 거부했던 최후의 항쟁 투쟁본부를 만드는 데 기여했다. 최후의 투쟁본부는 바로 ‘민주시민투쟁위원회(투쟁위원회)’로, 송백회 회원들은 투쟁위원회와 함께 논의를 통해 투쟁 논리를 세웠다. 계엄군의 학살에 저항해 끝까지 투쟁한 사실을 알리는 윤상원 열사의 최후 성명은 마지막까지 보급투쟁을 전개하고 시민들을 결집시키고자 했던 송백회의 결의기도 했다.

송백회의 활약상이 성과만큼 기억되지 않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여성들의 민주화 투쟁사가 역사 속에 가려진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첫번째로는 남성중심적 구조를 들 수 있다. 사실 당시 운동권 내에서도 여성 존중이 이뤄지지 않았다. 여성을 한 사람의 운동가로 바라보기보다는 가족 내의 여성으로, 소극적인 여성으로 봤기 때문이다. 사회적으로도 운동권 여성들에 대해서는 애초에 평가조차 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누가 총을 들었는가’에만 집중한다. 총을 든 사람뿐 아니라 그 사람들이 총을 들 수 있게 하는 투쟁의 기반도 중요하다. 광주가 끝까지 항복하지 않고 총을 들도록 도운 것이 바로 송백회의 여성들인데 이에 대한 평가는 묻혔다. 우리 사회가 숨겨진 사람들의 목소리를 듣지 않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여성들 스스로 자신을 드러내거나 목소리를 내지 않기도 했다. 우리는 너무나 큰 충격과 아픔을 겪은 후 증언도 일부러 잘 하지 않았고, 그래서 구술생애사 연구 초기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는 여성 참여자의 증언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송백회 관련 논문을 썼고 컨퍼런스에 참여했다. 여성운동과 민족운동 담론의 발전을 위해 목소리를 냈다. 송백회의 이야기가 5·18 기념재단에 의해 구술집으로 나오기까지 거의 40년이라는 긴 시간이 걸렸다.
마지막으로 과거 우리나라의 역사를 여성주의적으로 해석하려는 노력이 부족했다고 말하고 싶다. 광주항쟁은 구조주의적인 관점으로만 해석되고 있다. 민주와 반민주의 대립 구도만이 아니라 광주 항쟁을 이끌었던 참여 주체로서의 개인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남성과 마찬가지로 참혹한 학살의 피해자였던 여성과 어린 아이까지도 포함할 수 있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여성주의적 시각에서의 역사해석이 필수적이다.
송백회처럼 대중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광주민주화운동을 이끌어 갔던 주체인 민간운동 단체들이 또 있나. 그들의 연대는 어떻게 이루어졌나.
광주민주화운동의 큰 축으로 ‘현대문화연구소’, 광대, 송백회 등이 있었다. 현대문화연구소는 국가안전기획부(안기부)의 표적이던 단체다. 민청학련 사건으로 구속된 사람들이 모여 만든 단체로, 당시 전국 민주화운동의 구심점 역할을 했다. 광대는 탈춤, 연희 등을 하는 극단이었는데 광주민주화운동에 큰 영향을 미친 황석영 선생이 이끈 민중문화운동 단체였다. 황 선생은 사람들에게 문화예술이 정치와 사회에 미치는 강력한 영향력에 대해 일깨워줬다. 당시 민주화운동은 종교의 외피를 둘러야 탄압을 덜 받았기 때문에 기독교를 많이 활용했고, 그래서 광대 역시 YWCA에 등록해 ‘Y극회’라는 이름으로 시작했다.
이들 단체는 모두 그물망처럼 연결돼 있었다. 특히 황석영 선생의 집에 모여 수시로 정보를 전달하고 교환하는 이웃·가족공동체 같은 망이 형성돼 회원들 간의 소통이 활발하게 이뤄졌다. 유신독재 체제에 반대하고 민주화를 소망하는 민중운동가들의 열망이 사람들을 마치 한 집안의 식구처럼 만들었다.
5·18은 짧은 기간에 많은 사상자를 내고 격렬하게 전개돼, 그 직후의 혼란이 컸으리라 생각된다. 5·18 이후의 광주는 어떤 모습이었고, 5·18 이후 송백회 활동은 어떻게 진행됐는가.
5·18 이후 광주는 전쟁이 끝난 후의 죽음과 절망의 도시였고 공포가 만연했다. 관련자는 잡히면 죽는다는 마음으로 돌아다녔고, 나 역시 국가 내란 폭력범으로 전국 현상금 지명수배가 내려져 친척집조차 갈 수 없는 입장이었다. 정보과에서는 동네 주민들에게 ‘저 집 딸이 간첩이니 만약 집에 온 것을 보면 신고하라’고 지령을 내렸다.
그럼에도 송백회는 활동을 이어갔다. 부상자 수를 파악하는 일부터 전국으로 흩어진 광주항쟁을 이끌었다는 이유로 지명수배자가 된 사람들, 부상자들, 유족들을 돕는 활동까지 했다. 비축했던 자금으로 하숙을 구해주고 도피를 도왔다. 이후에는 광주항쟁 당시 배포했던 유인물을 카세트테이프로 녹음해 광주의 투쟁을 서울에 알리려 했다. ‘임을 위한 행진곡’을 만들 때도 많은 송백회 여성들이 참여했다. 노래가 밖으로 새나가지 않도록 창에다 담요까지 두르고 불렀다. 진실을 알리려는 송백회의 노력이 한 축이 돼 ‘오월운동’으로 이어졌고, 노동자와 농민을 중심으로 전개되다가 87년 6월 민주항쟁이라는 결실을 맺었다고 생각한다.
직접 광주 민주화 운동에 참여한 입장에서 민주화 운동의 현장이 왜 하필이면 광주였다고 생각하는가.
먼저 김대중이라는 호남의 정치 지도자가 구속되면서 (호남 주민들이) 당대 정권에 크게 실망했다. ‘서울의 봄’ 이후 새로운 민주화의 시대가 오리라 생각했으나 그것이 김대중의 체포라는 사건에 의해 가로막히면서 지역사회에서 분노가 일었다. 또한, 박정희 전 대통령 집권 당시 산업화 정책이 이뤄졌는데 이때 호남은 농촌 지역이라 경제·사회적으로 핍박과 차별을 받았다. 이런 지역 차별 역시 광주가 불의한 권력에 적극적으로 저항하도록 만들었던 배경이다. 무엇보다도 광주는 민주화운동을 진행할 역량이 높았다. 동학 혁명 이후로 저항적인 민주화 정신을 이어오고 있었으며 80년 항쟁 이전에도 민주화에 대한 열망으로 발생한 일련의 사건들이 있었다. 1972년, 반유신운동 선전 유인물을 배포했다는 이유로 전남대학교 학생들이 구속됐던 ‘함성지 사건’이 그 중 하나다. 이는 유신체제의 장기독재화를 최초로 지적한 운동이었다. 학교 안에서 정보과 형사들과 국군 기무사령부가 상담실을 장악해 학생들을 조사하자 교수와 학생들이 이에 반발해 시위를 일으켰던 ‘교육집회 사건’도 있었다. 민주화를 갈망하는 움직임들을 계속 겪으면서 광주는 민주화운동을 전개하기에 충분한 역량을 키웠다.
5·18과 관련하여 가장 시급히 진상규명이 필요한 문제와 쟁점은 무엇인가. 지난해 5·18 진상규명조사위원회 위원으로 추천받았지만 이후 피해당사자라는 이유로 위원직에서 배제된 경위에 대한 생각도 듣고 싶다.
진상규명은 주모자에게 벌을 주는 응보적 차원에 앞서 관계자들을 치유하기 위해 필요하다. 회복적 정의를 바로 세우기 위해선 치유와 협력이 필수적이다. 그러나 과거 다섯 차례의 국가 진상규명에서 계엄군에 의한 집단성폭행과 여성 인권침해는 단 한 번의 조사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1989년 광주 청문회에서 제기된 계엄군에 의한 성폭력 문제는 성폭행을 폭력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우리 사회의 통념으로 인해 묵살됐다. 2018년에 처음으로 국가인권위원회, 국방부, 여성가족부가 함께 ‘5·18계엄군 등 성폭력 공동조사단’을 구성했고 정부 차원에서 ‘1980년 계엄군에 의한 성폭행은 국가폭력이었다’고 공식적인 사과를 내놨다. 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했다는 측면에선 다행이다. 문제는 여전히 피해 여성들에게 아무런 개인적 차원의 후속조치가 없었다는 점이다.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한 진상규명은 이번이 마지막일지도 모른다. 이번 진상규명이 제대로 이뤄져야만 한국 전쟁 이후 300여 건에 이르는 민간인 학살문제를 비롯한 과거사 진상규명과 피해자 보상의 단초를 마련할 수 있다. 반드시 피해당사자들의 살아있는 증언을 바탕으로 피해자들이 명예를 회복하고 인격적 존엄성을 되찾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를 위해선 ‘민’의 관점, 민중이 어떠했는가에 주목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본인이 5·18 현장에 참여한 피해당사자라는 이유만으로 사전고지 없이 진상규명조사위원회 추천위원에서 배척한 것은 광주에서 살아남은 민중을 또 다시 죽이는 일이었다고 밖에 볼 수 없다.
광주민주화운동 당시의 송백회 여성 활동가들이 사람들에게 어떤 모습으로 기억되기를 바라나.
송백회 여성들은 시민들을 결집해 시민궐기대회의 담론을 주도했고 그 안에서 나온 이야기를 모아 실행에 옮기며 시민자치를 실현해냈던 주체적인 민주운동가였다. 우리를 정의를 위해 목숨을 걸고 민주화운동에 앞장섰던 의로운 사람들로 기억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