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회관에서 겨울나기

  학생회를 세우는 데에는 십년이 걸리지만, 무너지는 건 한순간이라는 말은 현실이 되었다. 학생회관 436호에 머물렀던 수많은 사람들의 흔적은 온데간데 없이 12월 겨울 텅빈 총학생회실은 학생 사회의 현주소를 보여주고 있었다. ‘서울대학교 총학생회 직무대행 2020 단과대학생회장연석회의’라는 긴 단체 이름에서 지금이 비상 상황이라는 것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고, 당선의 기쁨을 채 누리기도 전에 단과대 회장들은 총학생회 없는 학생회 임기를 시작하였다.

  동아리연합회 선거에 나가겠다고 결심했던 순간은 작년 6월 1일 서울퀴어 문화축제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퍼레이드를 마치고 뒷풀이 자리에서 지금의 부회장님께 메이트를 구하지 못해 고민이 라는 이야기를 꺼내었고, 어느새 가을에 선본 사진을 찍게 되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나는 학생회란 학내 인권 사안에 대해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공론장이자, 학교와의 투쟁과 협상을 통해 변화를 촉구하는 정치적 유기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가치관 하에서 의장을 맡으며 처음으로 다루어보는 의제들을 마주하자, 마치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억지로 입은 것처럼 어색하고 당황스러웠다.

총학 선거 전후로 학내에서 가장 주요한 현안은 단연 성적 장학금 폐지였다. 그렇기에 선거가 무산되고 연석회의가 들어서자마자 성적 장학금 유지와, 등록금심의위원회에서의 등록금 동결을 동시에 이끌어내야 되었다. 학교와의 면담에서는 보직 교수님들과의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면서도 현실적인 예산 제약 내에서 최대한의 결과를 얻어내야 되었는데, 정신력 소모가 상당한 일이었다. 총학생회가 아닌 연석회의가 갖는 한계도 여실히 드러났다. 선거로 선출되지 않았기에 정당성을 부여받지는 않았지만 그 책임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중앙집행위원회 예산은 광역 셔틀은 물론 이고 보궐 선거를 치를 수도 없을 정도로 열악했지만, 상시 업무를 그만둘 수는 없었기에 중집원 모두 무보수로 일을 할 수밖에 없었다.

  성적 장학금 사태가 일단락되고 각단과대에서 새내기 새로배움터를 준비할 때 즈음 코로나19로 인해 연석회의는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게 되었다. 코로나19는 학내 자치 위축이라는 결과를 낳았다. 단과대 새터 취소, 입학식 취소, 동소제 취소, 폐쇄와 취소 혹은 무기한 연기라는 공지가 SNS를 뒤덮었고 학교에서는 매주 코로나19 관리위원회가 열렸으며, 끝내 개강 연기가 결정되었다. 뿐만 아니라 비대면 강의 도입으로 수업권 침해에 대한 목소리가 대학가를 휩쓸었다. 각 대학 총학생회로 구성된 전국대학학생회네트워크에서는 청와대와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진행하였고, 대학생들의 외침은 계속해서 울려퍼졌다. 코로나19 상황을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 묻는 언론사의 전화는 쉴 새 없이 울려댔다. 

  재난 상황은 언뜻 모두에게 동일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로 인한 삶의 양태는 결코 동등하지 않았다. 학내에서 사회적 연결고리에 취약한 학생들의 불평등은 수면 위로 드러났다. 장애 학생이나 저소득층 학생의 수업 환경은 행정적 고려 대상에서 후순위로 밀려났다. 음대 연습실과 미대 실습실이 닫히면서 개인 작업을 진행할 공간이 없는 예체능 계열 학생들은 당장의 금전적 부담을 떠안아야 했다. 대학 재정 상황이 얼마나 여유로운지, 서울 소재 4년제 대학인지 여부에 따라 온라인 플랫폼 인프라 구축과 상황 대응은 상당한 차이를 보였다. 일련의 사건을 목도하면서, 공동체 내에서 비가시화 되는 구성원에 대해 끊임없이 목소리를 내려고 노력하였다.

  마지막 연운위에서는 텔레그램 N번방 성착취 사건 규탄을 다루는 안건이 상정되었다. 처음 사건이 언론에 보도되었을 때 느낀 감정은 무력감과 분노, 그리고 두려움이었다. 일주일 넘게 우울한 감정에 잠식당해 있을 때 나에게 주어진 이 자리에서 어떠한 행동을 할 수 있을지 곱씹어 보았다. 대학 내에서 발생하는 인권 침해 사안과 이것이 결코 다르지 않아 보였기에, 우리가 주목하지 않으면 언제나 그래왔듯이 금방 수면 아래로 묻힐까봐 두려웠기에 안건을 발의했다. 

예상은 했지만 성명문을 둘러싸고 학내에서는 큰 반발이 있었고, 바로 그 다음 주 회의에 성명문 수정 요구가 올라왔다. Zoom으로 연운위 회의가 동시 송출되면서, 실시간으로 단과대 회장님 들의 발언이 에브리타임에 박제되었고 ‘페미’, ‘꿘충’이라고 조리돌림 당하는 것을 목격하였다. 물론 연운위 회의 자리에서 충분한 토론과 숙의가 오고 갔지만, 학생회를 하면 보람을 느끼기보다 혐오와 인신공격에 쉽사리 노출된다는 사실이 또 한 번 드러나게 되었다. 그리고 학생회를 ‘꿘’과 ’비꿘‘ 이분법으로 편가르기 하고 혐오를 재생산하는 일은 반복되었다.

  글을 마치기 전에 한 번 더 스스로에게 묻고 싶다. 학생회란 무엇인가? 학생 들의 이해관계는 대변하는 곳, 학내외 사회적 의제에 대해 목소리를 내는 곳, 소외된 학생들의 목소리를 이어주고 가시화하는 곳… 잘은 모르겠지만 그 어딘가에 위치할 것이다. 여전히 그 답을 내릴 수는 없지만 확실한 것은 겨울 동안 많은 것을 느끼고 배울 수 있었다는 것이다. 함께했던 수많은 사람들의 얼굴과 순간들이 평생 기억에 남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4개월 남짓한 시간 동안 동연 일을 도맡아 해준 동연 부회장님과 집행위원분들께 감사하다는 말을 꼭 남기고 싶다. 올 한 해는 많은 사람들에게 힘겨운 시기로 기억되겠지만, 우리는 서로 연결되어 있고 또 함께할 것이기에 추운 겨울을 이겨내리라 믿는다.

정규성(철학 18)
제38대 동아리연합회장입니다. 우리가 사는 이곳이 더 아름다워지기를 꿈꿉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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