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전쟁 70주년을 맞아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열린 『낯선 전쟁』 展. 70년이라는 긴 시간을 거치며 전쟁의 기억은 바래고 희미해졌다. 이번 전시는 전쟁을 기록하고자 했던 당시 예술가들의 그림과 오늘날에도 전쟁을 기억하고자 하는 작가들의 작품을 선보인다. 6월 25일 개막한 전시는 오는 11월 8일까지 이어질 예정이다.
예술로 되살리는 전쟁의 기억
전시의 제목은 『낯선 전쟁』이다. 반세기 전 한국 전쟁이 일어나 3백만 명 이상이 죽었다는 사실을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오늘날 우리가 전쟁의 위험이나 영향을 피부로 느끼는 일은 적다. 한국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고 세계 곳곳 수많은 전쟁이 벌어져 사람이 죽고 있지만, 여전히 전쟁은 낯설다.

전시의 1부는 한국 전쟁의 기억을 되살리기 위한 과정이다. 예술은 전쟁과 절대 가까워질 수 없을 것 같지만, 언어로 전해지지 않는 전쟁의 기억을 예술이 전해줄 수 있다. 화가 김환기는 종군화가로 활동하며 전쟁을 그렸고, 김성환은 인민군 점령 하의 서울에서 숨어지내면서 작품 활동을 이어갔다. 그중 김성환의 「6·25 스케치」 연작은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서울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림속 종로4가 한복판엔 시체가 버려져 있다. 전시 장소인 현대미술관에서 차로 불과 10분이면 닿는 곳이다. 오늘날 출퇴근하는 시민들과 관광객으로 붐비는 서울의 거리는 봇짐을 머리에 인 피난민들로 가득 차 있다. 우리의 일상공간에서 벌어졌던 전쟁의 모습을 화가의 눈으로 바라보면서, 전쟁이란 낯선 집단기억은 각자의 머릿속에서 되살아난다.
『낯선 전쟁』의 1부는 대부분 종군화가들의 그림으로 구성된다. “종군이라는 말 자체가 예술가답지 않다”는 옛 종군화가단 김병기 단장의 말에서 알 수 있듯, 종군화가라는 개념은 역설적이다. 그만큼 예술과 전쟁은 서로 어울리지 않는다. 전쟁의 본질인 잔인함과 폭력은 대개 예술의 이상이 될 수 없다. 하지만 예술은 폭력에 반대하는 메시지를 보여주기 위해 전쟁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그려내는 방법을 택했다. 예술의 이상은 전쟁의 본질과 멀어야 하지만 예술이 전쟁과 멀어질 순 없었다. 그래서 예술은 전쟁 중에도 이어져야 했다. 종군화가들이 존재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다.

군사주의가 감춘 전쟁과 무기의 뒷모습
한 사람이 비행하는 공군기를 바라보고 있다. 흑백의 구도 속에 무심한 듯 고요하게 앉아있는 사람의 뒷모습. 마치 남자의 머리를 공군기가 관통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저 멀리 곡예비행을 하는 공군기의 모습은 지극히 평화롭다. 노순택의 사진 연작 「좋은, 살인」이 포착한 장면이다.
「좋은, 살인」은 성남 서울공항에서 열린 항공우주 방위산업 전시회를 촬영한 사진 연작이다. 민·군항기 제조업체와 국내외 방위산업체들이 참여한 이 박람회에서 무기는 유희적 소비의 대상으로 둔갑했다. 부모가 아이에게 기관총을 잡게 한 채 사진을 찍는 모습은 사람을 겨누는 무기들의 폭력성에 무감각한 우리의 자화상이다.

『낯선 전쟁』의 1부가 한국 전쟁의 기억을 소환했다면, 2부는 삶에 스며든 군사주의에 대한 성찰이다. 누군가 아이의 기관총이 사람을 죽일 수 있다는 사실을 말하려 할 때 군사주의는 일관된 논리로 자신을 변호한다. ‘한반도는 남북이 대치하는 예외적 상황’이라는 것이다. 무기로 저지르는 살인이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라고 해도, 누군가를 죽여서 목숨을 지켜 야 하는 상황은 근본적 모순이다. 「좋은, 살인」은 그 모순에 관한 이야기다.

마찬가지로 전쟁터에서 죽거나 다른 사람을 죽일 수 있는 군인은 영웅이 아니다. 이념과 정치가 만들어낸 부조리의 희생자다. 이동표의 「일인이역 골육상잔」에서 그린 군인도 영웅과는 거리가 멀다. 작가는 작품을 설명하면서 “골육상잔은 뼈와 살이 서로 싸우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림엔 서로 다른 군복을 입은 남북한 군인이 나란히 서 있는데, 두 군인 모두 작가 본인의 얼굴을 하고 있다. 작가는 분단 이전 북한에서 태어나 인민군으로 징집됐고, 이후 월남해 국군에 입대하며 ‘일인이역’을 수행했다. 작가에게 동족을 죽여야만 했던 한국 전쟁은 더없이 모순된 기억이었을 것이다. 그런 전쟁을 치러야만 하는 상황에 내몰린 군인들은 영웅보다는 희생양에 가깝지 않을까.

이어지는 3부는 가려져 있던 전쟁의 피해자들을 보여준다. 전쟁으로 죽어간 군인들과 집을 잃은 난민들의 얼굴은, 정치적 군사주의 논리가 얼마나 현실과 동떨어졌는지 드러낸다. 논타왓 눔벤챠폴 (Nontawat Numbenchapol)의 작품 「미스터 쉐도우」가 던지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사진 속에 얼룩무늬 군복을 입은 사람의 형상이 있다. 그런데 마치 투명인간처럼 사람의 얼굴과 몸은 지워진 채 군복만이 남아있다. 전쟁과 군대는 자신만의 이야기가 있는 개개인을 군인이라는 평면화된 정체성 안에 가둔다. 전쟁터에선 그 사람이 무엇을 하던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오직 그 사람이 군복을 입고 있으며 총을 들고 싸우는 사람이라는 사실만 남는다.
「미스터 쉐도우」의 피사체가 된 군인들은 작가가 미얀마 인근에서 만난 소년병이다. 전쟁터에서 싸우는 것은 누구에게나 잔인하지만, 인격이 형성되는 중요한 시기에 보호와 교육을 받지 못하고 전장으로 내몰리는 소년병들에게 전쟁은 더 가혹하다. 지워진 사진 속 얼굴처럼 소년들의 인격도 지워지기 때문이다. 그곳의 어른들은 소년병들을 전쟁터로 내몰면서 그들이 민족과 조국을 지키는 ‘영웅’이라고 치켜세웠을 것이다.
무엇을 할 것인가, 어떻게 살 것인가
전쟁을 기록하고 묘사한 모든 작업은 현실에 존재하는 전쟁에 맞서려는 노력이다. 미술관을 나서는 순간 전시를 관람하며 느낀 안타까움을 훌훌 털어버린다면 전시는 전쟁으로부터 안전한 사람들이 잠시 감상하고 소비하는 살균된 쇼에 지나지 않는다. 『낯선 전쟁』이 공허하지 않은 울림이 되려면 전쟁을 기억하고 끝없이 성찰해야 한다. 4부는 그 방법에 관한 내용이다.

한국 전쟁 당시 미군과 국군은 북한 병사들에게 ‘이 서류를 들고 투항할 경우 인도적 대우를 보장하겠다’는 문구가 적힌 ‘안전 보장 증명서’라는 이름의 선전물, ‘삐라’를 살포했다. 창작 스튜디오 ‘도큐먼츠’가 제작한 작품의 제목도 「안전 보장 증명서」지만 여기 적혀있는 지시사항은 삐라와 다르다. ‘이 문서를 보고, 읽고, 보관하고, 많은 사람에게 보여준다’는 지시와, ‘이 문서를 가진 사람을 숨 쉬게 하고, 차별하지 말라’는 내용이다. 「안전 보장 증명서」는 본래 적을 겁주고 회유하는 ‘삐라’의 모양을 빌렸다. 하지만 공포에 짓눌리지 않으면서도 전쟁을 망각하지 않을 방법으로,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알리되 아무도 억압하지 않을 것을 지시하고 있다.
“무엇을 할 것인가”. 『낯선 전쟁』을 끝맺는 4부의 제목이다. 전쟁을 기억하기 위해, 또 전쟁을 막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4부의 제목은 물음의 형태로 지어졌지만, 전시에 등장하는 작품들이 그에 대한 확실한 답을 제시하진 않는다. 답을 찾는 일은 작품을 감상하는 이에게 남겨진 숙제다. 제아무리 걸작이라고 해도 한 사람의 무관심을 돌릴 수는 없다. 낯선 전쟁을 되살려 기억하고 현실을 성찰하고자 하는 이번 전시는 관객들이 작품을 통해 전쟁의 진실을 반성하고 사유할 때 비로소 완성된다. 그래서 전시가 끝나도 물음은 이어진다. 우리는 전쟁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그리고 무엇을 해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