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예술이 사회를 변하게 할 수 있을까? 노래와 놀이처럼 단순하고 일상적인 활동도 갈등을 봉합하고 상처를 치유할 수 있지 않을까. 사회적협동조합 ‘인천자바르떼’는 그런 문화예술의 가능성에 주목한다. 올해로 창립 16주년을 맞은 인천자바르떼는 소외계층과 도서지역 주민들을 대상으로 하는 문화예술 프로그램을 마련하고, 지역 주민 공동체 회복을 위한 문화예술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인천 연수구의 고려인 밀집주거지역인 함박마을. 최근 인천자바르떼는 이곳에서 고려인 문화재단 사단법인 ‘너머’와 함께 고려인들을 대상으로 한 마을문화사업 ‘고려아리랑’을 시작했다. 마을문화사업은 주민들이 함께 참여하는 문화예술 활동을 통해 주민 네트워크를 회복하고 마을 공동체 형성을 도모하기 위해 인천자바르떼가 진행하는 중장기 예술프로젝트로 ‘고려아리랑’은 인천자바르떼의 세 번째 마을문화사업이다.

8월 21일 함박마을 고려인문화원에서 진행된 ‘고려아리랑’의 첫 번째 프로그램에 찾아갔다. 이날 활동에는 문화원에 소속된 고려인 아이들 8명과 인천자바르떼, 문화원 소속 교사 5명이 참여했다. 이날을 시작으로 아이들과 함께하는 프로그램은 12월까지 매주 진행된다.
교사들은 스케치북에 자신의 이름을 한글로 쓰고 소개하며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아이들도 스케치북에 자신의 러시아어 이름을 한글로 적었다. 철자를 틀리게 적은 아이도 있었고, 한국어를 하지 못하는데 이름만 쓸 줄 아는 아이도 있었다. 아이들은 그림과 무늬를 그려서 자신의 이름을 장식했는데, 이름에 새싹을 그려넣거나, 친구의 얼굴을 그리기도 했다. 이름자를 네모반듯한 글자로 그리는 데 열중하다 시간이 부족하다며 울상을 짓는 아이도 있었다.
다음으로 아이들은 노래를 부르며 율동을 함께 배웠다. 한국의 “머리 어깨 무릎 발” 노래와 비슷한 러시아어 노래였다. 무릎을 만지거나 손뼉을 치는 것처럼 간단한 율동들이 반복됐는데, 아이들과 교사들이 순서를 착각해 율동이 꼬이면서 웃음을 자아내기도 했다. 강사들의 설명을 아이들이 온전히 알아듣진 못했지만, 노래와 율동을 즐거워하며 똑같이 따라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언어를 뛰어넘어서 사람들을 화합시키는 노래의 힘을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그 후 아이들은 강사들의 도움을 받아 색연필로 피아노 건반을 그리고 건반에 계이름을 쓰는 활동을 했다. 한국어를 하지 못하는 아이들이 강사들의 설명을 잘 이해하지 못해 이 활동을 특히 어려워했다. 이경옥 대표는 한국어를 하지 못하는 한 아이와 나란히 앉아 손짓과 몸짓으로 아이들의 참여를 도왔다. 이 대표는“9월부터는 강사진들이 러시아어를 배우게 됐다”며 “문화예술 프로그램을 하려다가 외국어까지 배우게 됐다”고 웃으며 말했다.
프로그램에 참여한 아이들의 나이는 5살에서 12살까지 다양했다. 한국어 구사 수준도 모두 달랐는데, 한국어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아이도 있고 한국어를 유창하게 알아듣고 말하는 아이도 있었다. 이경옥 대표는 “아이들과의 의사소통이 어려워서 진행이 원활하진 않은 편이지만, 그래도 잘 진행되고 있다”고 평가했다. 이 대표는 “코로나19로 인해 아이들을 많이 모을 수 없어서 연령대 폭이 기존보다 넓어진 것도 다소 어려운 점이라, 아이들의 수준 차이를 지켜봐야 할 것 같다”고 덧붙였다.
인천자바르떼가 파악한 고려인들과 함박마을의 첫 번째 어려움은 언어 문제다. 이경옥 대표는 “마을의 선주민들과 새로 이주한 고려인들 간에 갈등이 발생했을 때 언어적 소통이 안 돼 오해가 많이 쌓였다”며, “지금은 문제가 많이 해소된 상황이지만, 아직 한 동네라는 동질감은 없는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고려인들이 겪는 정체성 혼란도 문제 중 하나다. 이 대표는 “중앙아시아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고려인이라는 자각이 없었다”며, “한국어도 전혀 모르는 채로 부모를 따라 한국에 왔고, 학교에 다니면서 외국인이라고 손가락질을 당해야 했다”고 말했다. 정체성 혼란 문제는 노인들에게도 나타난다. “고려인 2·3세 노인들은 스스로 한국인이라고 인식하면서도 막상 한국에 왔을 때는 서투른 언어와 문화적 차이 때문에 한국인들에게 인정받지 못했다”는 것이 이 대표의 설명이다.
‘고려아리랑’은 아이들 대상 프로그램과 어른들 대상 프로그램의 두 가지로 나눠서 진행된다. 내년부턴 함박마을의 선주민들과 함께하는 프로그램도 진행된다. 마을문화사업의 목표는 문화예술을 매개로 주민들 사이의 간극을 좁히고 상처를 치유하는 데 있다. 언어 문제나 정체성 문제를 단기간에 명쾌하게 해결할 수 없지만, 마을 사람들을 격려하며 이들과 고민을 나누는 것이 마을문화사업의 지향점이다. 다음은 인천자바르떼 이경옥 대표와의 일문일답이다.

‘고려아리랑’의 취지는 무엇이며, 구체적으로 어떻게 진행되나
함박마을 주민들의 언어적 소통 문제를 언어로 당장 해결할 수 없다면, 문화예술활동으로 해결하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 두 가지 프로그램을 준비 중인데, 하나는 말을 하지 않고도 같이 놀 수 있는 아이들을 위한 프로그램이다. 아이들이 이 활동에 참여하며 ‘이 동네가 내 동네다’라는 느낌을 받도록 하는 것이 목표다. 다른 하나는 고려인 2, 3, 4세 어른들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한 프로그램이다. 고려인 어른들은 어릴 때 할머니가 부르던 노래나 집에서 먹던 음식, 어른들이 해주던 이야기의 기억을 가지고 한국에 왔지만, 문화적 차이로 상처를 받은 사람들이다. 이를 어떻게 보듬을지 아직 답은 모른다. 하지만 같이 고민하고 지지하려고 한다.
‘고려아리랑’ 이전의 마을문화사업은 어떻게 진행했나
부평구의 열우물마을과 삼산동 영구임대아파트단지 두 곳에서 진행됐다. 열우물마을은 인천에 몇 안 남은 달동네였다. 과거에 열리다가 사라진 열우물마을의 마을 잔치를 되살리고 문화예술 동아리를 만들어 주민들과 함께 생활문화공동체를 일구는 사업을 했다. 한편 삼산동 영구임대아파트단지는 휠체어를 타는 거동불편자나 독거노인 등이 많이 거주하는 곳이었다. 2010년에 두 달간 시범적으로 예술복지 활동을 했는데 경과가 좋아서, 이듬해부터 펀딩을 진행해 장애인 미술동아리를 만들고 2019년까지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지금은 두 마을 모두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마을 네트워크를 이어가고 있다. 마을 주민이 이끄는 활동이 자리잡았기 때문에, 외부 단체인 인천자바르떼는 문화사업을 마무리했다.
마을문화사업이 어떤 긍정적인 변화를 가져왔다고 생각하나
삼산동 영구임대아파트단지에는 움직임이 불편한 주민들이 많았다. 답답함에 창밖으로 물건을 투척하거나, 소리를 지르는 분들도 있었다. 한 주민은 뇌병변 장애가 있었는데, 아침에 찾아가도 술에 취해 계셨던 분이었다. 그 주민이 미술 활동에 참여하면서 나중에는 동아리 반장을 맡거나 직접 그린 그림을 전시회에서 팔기도 하는 등 생활이 크게 좋아졌다. 미술이 생활을 바꾼 것이다. 한편 아파트 바깥 동네 주민들은 아파트 담장을 사이에 두고 ‘저 안으로 들어가면 큰일난다’고 말할 정도로 임대아파트 주민들에 대한 인식이 안 좋았다. 그걸 깨는 것도 중요하겠다고 생각해 외부 주민들을 대상으로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임대아파트 주민들과 만나는 자리도 만들었는데, 인식이 많이 나아졌고 마을 네트워크도 구성됐다.
마을문화사업 외에는 어떤 사업을 진행하나
공공기관의 공모사업 등을 통해 도서 지역에서 문화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경우가 많다. 먼저 섬에 찾아가 주민들이 어떤 프로그램을 원하는지 사전에 답사하고 이를 바탕으로 프로그램을 기획한다. 어른들을 위한 프로그램도 있고 청소년들을 위한 프로그램도 있는데, 전자의 경우 트로트 공연 등을 열기도 했다. 청소년들이 가장 호응을 많이 하는 프로그램은 힙합댄스다. 가장 최근에는 강화도에서 어쿠스틱 밴드와 풍물패의 합동 공연을 진행했다.

인천자바르떼에선 도서 지역 주민, 노인, 장애인 등 ‘문화 소외계층’에게도 많은 관심을 기울이는 것 같다. 자바르떼가 말하는 “문화적 소외”란 무엇인가
과거엔 ‘문화적 소외’라고 하면 지역과 교통 접근성의 의미가 강했다. 교통이 발달하지 못해서 문화시설에 가까이 가지 못하는 경우를 말했다. 그런데 지금은 교통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지금은 본인이 문화를 누리고 싶으면 얼마든지 누릴 수 있게 됐다. 대중매체와 인터넷은 장소에 상관이 없기 때문이다. 오늘날 ‘문화 소외계층’이란 말은 해석의 여지가 많다. 그래서 자바르떼는 ‘문화 소외계층’을 하나의 고정된 계층으로 보지 않는다. 다만 교통이 아무리 발달해도 독거노인이나 장애인은 행동반경에 비교적 한계가 있고, 그런 사람들을 문화적으로 소외됐다고 보는 데엔 의심이 없다.
인천자바르떼가 진행하는 문화예술사업에서 가장 큰 어려움은 무엇인가
우리나라에서 공공기금을 지원받는 모든 사업은 1년 안에 결과보고서를 제출해야 하는데, 문화예술 사업은 1년 안에 정량적으로 의미있는 결과를 내긴 어렵다. 이런 측면에서 마을문화예술 프로그램은 ‘가성비’가 낮다. 마음을 나누고 생각을 서로 이야기하려면 오랜 시간을 함께해야 하고, 한 번에 많은 인원과 프로그램을 진행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열우물마을과 삼산동에서도 10년 가까운 시간이 걸렸다. 단기적·정량적으로는 부족해도 멀리 보고 주민과 함께 만들어가는 프로그램을 장기간에 걸쳐서 진행할 수 있었으면 한다.
지방자치단체나 지역 공공기관에서 이루어지는 문화예술 프로그램은 어떤가
지역 주민센터를 예시로 들어보면, 옛날보단 많이 발전했다. 다만 대부분 서로 너무 비슷한 프로그램만 운영하고 있는 점은 한계다. 가성비 위주의 안정적인 프로그램을 중심으로 운영하는 점도 아쉽다. 진행이 쉬운 만큼 실질적인 효과는 빈약한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지자체에서 전문 프로그램 코디네이터를 두고 지역만의 특색을 살린 프로그램들을 개발했으면 한다.
사업을 진행하면서 있었던 의미있는 에피소드를 소개해달라
섬마을 공연 등에서 오랫동안 함께 일해온 모노드라마(일인극) 배우가 있다. 38년생 남성 배우인데, 여성으로 분해 “여자의 일생”이라는 주제로 노년층 여성들의 삶을 이야기하는 모노드라마를 한다. 노인들을 대상으로 공연을 하면 특히 60, 70대 여성 관객들이 울고 웃으며 공감하신다. 반응이 뜨거워서 공연 진행에 차질이 생길 정도다. 흔히 공연이라는 콘텐츠가 생명력이 짧다고 느끼지만, 그분은 청년기부터 지금까지 활동하고 있다. 그렇게 지속력 있는 활동을 만들어가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