혐오를 ‘점잖은’ 말로 포장할 수 있던 시대는 이제 저문 듯하다. 최근 학내에서 ‘진정한 인권을 위한 서울대인 연대’(이하 진인서)라는 단체가 대자보를 붙이자마자 많은 이에게 비판받는 것을 보니 새삼 그런 생각이 든다. 지난 10월 7일 진인서는 중앙도서관 터널 등 학내 곳곳에 동성애 혐오를 ‘진정한’ 인권으로 포장한 대자보를 붙였는데, 이에 서울대학교 인권헌장 학생추진위원회(이하 학추위)는 진인서 자보 옆에 첨삭자보를, 터널을 오가는 이들은 포스트잇을 붙여 진인서가 비상식적으로 성 소수자를 혐오하고 있음을 지적했다. 비대면 수업 기간 학교 소식을 문자와 이메일로만 간간이 받는 학부·대학원생들은 ‘요즘 학교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어리둥절할 수 있겠다. 이 글에서는 먼저 진인서가 대자보를 쓴 계기이기도 한 서울대학교 ‘인권헌장’ 제정 촉구 움직임을 소개하고, 이어 ‘인권헌장’ 제정을 반대하는 대자보 속 혐오 표현을 간략히 살펴보고자 한다.
이미 존재하는 인권 규범을 대학의 맥락에 맞게 구체화하자는 목소리는 2010년대 중반부터 꾸준히 제기되어 왔다. 그동안 학내에서 인권 침해 사건이 발생하면 조사·심의 단계에 참고할 마땅한 기준이 없어 아쉬운 대로 교육 현장의 맥락과 다소 동떨어진 법령, 법원의 판례 등에 의존하는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2014년 인권센터에서 논의한 「서울대학교 인권 가이드라인」, 2016년 총학생회에서 전체학생대표자회의를 거쳐 채택한 새로운 「서울대학교 인권 가이드라인」 등이 바로 결핍된 규범적 요소를 보충하기 위해 노력한 흔적이다. 하지만 이 가이드라인들은 학내 공식적인 규범 제정 절차를 거치지 않아 서울대 구성원의 인권을 다루는 실체적 규범으로 활용할 수 없었다. 2019년에는 ‘서울대학교 인권규범 제정에 관한 연구팀’이 꾸려졌다. 연구팀은 이미 존재하는 여러 인권 규범을 바탕으로 서울대학교라는 교육 현장의 맥락까지 고려한 인권헌장(안)을 제시했는데, 최근 공청회를 포함해 서울대 공식 규범으로의 채택 여부를 놓고 활발하게 논의되고 있는 ‘인권헌장’이 바로 이것이다. 지난 9월 학추위를 포함한 다섯 개 학생 단위(2020단과대학생회장연석회의, 서울대학교 대학원총학생회, 중앙집행위원회 인권연대국, 서울대학교 학생·소수자인권위원회)가 ‘인권헌장’ 제정을 촉구하는 홍보 사업 ‘인권열차’의 초동 단위로 나섰고, 이후 다양한 서울대 구성원이 개인 혹은 단체 이름으로 ‘인권헌장’ 제정을 촉구하는 서명 운동에 동참했다.
소수이지만 ‘인권헌장’ 제정을 반대하는 목소리도 있다. 그들이 제정을 반대하는 가장 큰 이유는 ‘인권헌장’ 제3조(차별금지와 평등권)에 ‘성적 지향 및 성별 정체성’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진인서는 다음과 같은 이유를 들며 차별금지 조항에 ‘성적 지향 및 성별 정체성’을 포함한 ‘인권헌장’을 지탄한다.
“이는 인권이라는 이름으로 동성애 문제로 고통 받는 친구들의 상태를 정당화하고 박제해버리는 것이 그들을 올바르게 사랑하는 방법이 아니며, 사회적으로도 예상치 못한 중대한 문제들을 야기한다는 반성적 고찰에 따른 것입니다. 이런 현실을 무시하고 전통적인 남녀와 가족개념의 해체를 초래하는 무모한 실험을 일방적으로 강행하려는 것은 새로운 형태의 문화적 사대주의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강조는 내 것)
위 발언은 꽤 점잖다. 언뜻 보면 이들의 ‘반성적 고찰’은 대학이라는 학술·연구의 장에서 진지하게 다루어야만 할 것 같다.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자극적이고 선동적인 어조도 아니고, 자신들이야말로 동성애자들을 ‘올바르게’ 사랑하는 것처럼 포장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들은 어떤 합리적인 논리나 객관적인 근거도 제시하지 않으며, 주장을 관철하기 위해 시대의 흐름마저도 애써 무시한다. 특히 ‘동성애 문제로 고통받는 친구들’이라는 표현은 동성애를 성도착증의 일환으로 여기고 질병 혹은 죄악시하는 오래된 편견이다. 하지만 진인서의 생각과 달리 세계적인 추세는 성 소수자의 권리를 인정하는 방향으로 흐르고 있다. 사회권규약과 아동권리협약 등 다양한 국제인권조약이 차별 금지 항목에 ‘성적 지향과 성별 정체성’을 포함하고, 미국 하버드 대학과 스탠퍼드 대학을 포함하여 해외 여러 대학이 강력한 차별금지 정책을 실시하고 있다는 점 등이 이를 방증한다. 위 글을 통해 알 수 있는 사실이라고는 비합리적인 주장을 밀어붙이기 위해 진인서가 근거 없는 공포를 조장하고 있다는 것뿐이다. 성적 지향과 성별 정체성을 포함하는 차별금지 조항이 과연 어떤 ‘사회적으로도 예상치 못한 중대한 문제들을 야기’할 것이란 말인가.
진인서는 ‘차별 금지’라는 개념을 오해하는 듯하다(그렇다고 믿고 싶다). 인권헌장 제3조(차별금지와 평등권)에 ‘성적 지향 및 성별 정체성’을 포함하는 것은 ‘무모한 실험’이나 ‘문화적 사대주의’가 아니다. 학생이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수업에서 불이익을 받거나 교육 기회를 박탈당해도 된다고 생각하는가? 직원이 성적 지향을 이유로, 성별 정체성을 이유로 업무상 불이익을 받아도 된다고 생각하는가? 인권헌장 제3조는 이러한 차별행위를 금지함으로써 서울대학교 구성원들에게 최소한의 안전장치를 마련하려는 것일 뿐이다. 모든 구성원이 공존할 수 있는 최소한의 조건을 무시하고 ‘소신에 따라’ 표현한다면, 그런 표현이야말로 공적 차원에서 반드시 규제해야겠다.
반주리 (서울대학교 대학원 총학생회 전문위원)
영문학을 전공합니다. 서울대학교 대학원 총학생회 전문위원이고, 장학·복지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