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81년 5월 27일 오후 3시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 앞 아크로폴리스 광장에는 가슴에 검은 리본을 단 1천여 명의 학생들이 모였다. 학생들은 광주항쟁에서 숨진 이들의 넋을 기리고,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침묵시위를 벌였다. 곧 학생 수보다 더 많은 전경이 달려와 시위를 저지했다. 당시 도서관 6층에서 이 장면을 지켜보던 김태훈 열사는 누가 말릴 틈도 없이 “전두환 물러가라!”를 세 번 외치고 창밖으로 몸을 던졌다. 전경들은 열사의 시신 주위로 몰려든 학생들을 향해 최루탄을 터뜨렸지만 시위는 걷잡을 수 없이 격양됐다.
언제나 남을 위할 줄 알았던 청년
김태훈 열사는 1959년 4월 13일 광주광역시 불로동에서 아홉 남매 중 여덟째로 태어났다. 순하고 착한 아이였던 열사는 누구에게나 사랑받았다. 그의 어머니는 자서전에서 ‘이것저것 끝없는 일들이 하나도 미운 기억은 없는 너’라며 열사의 어릴 적을 회상했다. 그는 동생에게는 믿음직스러운 형이었고, 부모님께는 효성이 깊은 아들이었으며, 반에서는 책임감 있는 반장이었다. 특히 그의 동생인 김요완(의예과·졸업) 씨는 열사가 “공정함, 정의 이런 것이 기본적으로 자리 잡힌 사람이었다”고 회상했다.
열사는 성당 모임을 하루도 거르지 않을 정도로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다. 그는 학창 시절 내내 성당 학생회에 참여해 가톨릭 교리에 대해 공부했고, 교리 교육 때 뛰어난 성적을 거뒀다. 대학에 입학하기 전, 김태훈 열사는 어머니께 신학교로 진학해 신부가 되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 어머니는 “대학을 졸업해서도 변함없다면 그때 신학교에 가도 된다”고 열사를 설득했다. 열사의 어머니는 지인 중 신학교를 다니다가 그만둔 사례가 있었기 때문에, 열사 역시 중간에 마음이 바뀔 것을 우려한 것이었다. 김태훈 열사는 재수생활을 거쳐 서울대학교 사회과학계열에 입학했다.
열사는 자신을 내세우지 않는 조용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강한 희생정신과 의로움으로 주위의 이목을 끌었다. 그가 대학교 2학년이 되던 해, 동아리 MT에서 후배가 목숨을 잃는 사고가 발생했다. 한적한 시골이었기 때문에 누군가 먼 밤길을 달려 다급한 상황을 알려야했다. 김태훈 열사는 망설임 없이 자원했고, 이후 기금을 모아 비석을 마련하고 직접 운반해 묘비를 세웠다. 한 친구는 열사를 기리는 추모 글에서 “불행한 때나 어려운 일이 생길 때 보여준 그의 자발적인 행동은 그가 어떠한 인물이었는가를 나타내는 가장 독특한 점인 것 같다”고 강조했다.
김태훈 열사의 지인들은 이구동성으로 열사가 곤경에 처한 사람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일종의 박애정신을 지녔다고 전했다. 고등학교, 대학교 동창인 이홍철 변호사(법학과·졸업)는 “(김태훈 열사는) 남을 도울 수만 있다면 어떤 희생을 하든 불이익을 받든 전혀 개의치 않는 성격이었다”고 말했다. 김태훈 열사는 무조건적인 배려 정신으로 노약자를 부축하고 짐을 대신 들었으며, 버스를 탈 때면 노약자에게 자리를 양보했다. 말수가 적었던 열사는 행동으로 인간에 대한 사랑을 표현했다. 이 변호사는 열사가 “인격적으로 정말 훌륭한 친구였고 그릇이 큰 사람이었다”고 전했다.

깊어가는 고뇌와 유신 종식
김태훈 열사가 대학에 입학한 1978년은 유신체제의 부조리함이 절정에 달했던 해였다. 학생운동은 탄압으로 동력을 상실했고, 학내에는 수많은 사복경찰이 상주했다. 긴급조치 9호로 인해 유신을 비판하는 말 한마디로도 체포될 수 있던 시기였다. 열사 역시 유신체제에 강한 염증을 느꼈지만 그럴수록 학업과 일상에 충실하려고 노력했다.
김태훈 열사는 어머니가 우려하는 것을 알았기에 학생운동에 거의 참여하지 않았다. 그 역시 가족을 아끼는 마음이 컸다. 타인의 작은 고통도 지나치지 못했던 열사는, 자신 때문에 가족이 괴로워하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불의에 저항하지 못하는 자신이 부끄러웠다. 수많은 광주일고 선배들과 대학교 선배들이 유신체제에 저항하다 고통을 겪었고, 더 많은 사람들이 군부독재 아래에서 신음했다. 그들을 마주할 때 열사는 떳떳할 수 없었다. 그는 홀로 괴로워했고 자신이 나아갈 길을 고민했다.
1979년 10월 유신이 갑작스럽게 종말을 고했을 때도 김태훈 열사는 고뇌를 계속했다. 동시에 그는 빠르게 변하는 시대상황을 좇기 위해 노력했다. 그의 책장에는 자신이 전공하는 경제학 서적보다 일반 사회과학 서적이 훨씬 많았다. 열사는 틈틈이 외신을 들으며 당시 국내 언론이 말하지 않은 사실까지 알려고 노력했다. 김요완 씨는 “당시 형이 시대상황을 다 꿰뚫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고 회상했다. 유신 종식 후 학내 통제가 완화되자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가 열렸고, 열사 역시 여기에 참여했다.
광주민주화운동을 전해 듣다
1980년 5월 17일 신군부는 민주인사 수백 명과 학생대표 백여 명을 연행한 후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 실시했다. 이틀 전인 5월 15일 이른바 ‘서울역 회군’으로 10만 여명의 학생들이 해산했다. 당시 학생들은 자신들의 시위가 새로운 독재의 빌미를 줄지도 모른다고 염려했고, 자신들의 역할을 다했다는 낙관적 전망 속에서 헤어졌다. 그러나 이는 명백한 오판이었다. 학생대표가 연행되고 공수부대가 투입되면서 학생들은 군부독재의 도래에 제대로 대응하기 힘들어졌다.
그러나 광주에서는 대학생들이 시작한 운동이 대규모 민주화운동으로 확대됐다. 공수부대는 학살을 자행하며 광주항쟁을 무력 진압했고, 광주 시민들은 외부와 철저히 단절된 채 열흘간 비극을 견뎌야했다. 광주와 연락이 두절되자, 김태훈 열사는 자신의 고향에서 벌어진 참상을 알기 위해 수소문했다. 김요완 씨는 “형님께서 그 이후에 광주에 있던 친구에게 참상에 대해 전해들은 것 같다”고 짐작했다. 열사는 자신이 사는 동네, 금남로에서 수백 명의 사람들이 군인에게 죽임을 당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

광주 참사는 열사의 마음에 큰 응어리로 남았다. 그에게는 비극의 한가운데 선 사람들이 생생하게 그려졌다. 하지만 정부와 언론은 시민을 폭도로 몰았고 어느 누구도 계엄군의 잘못을 지적하지 않았다. 게다가 군부독재가 시작돼 김태훈 자신도 함부로 광주항쟁을 말할 수 없었다. 김태훈 열사는 사람들이 거대한 불의를 보고도 침묵하고, 자신도 침묵을 강요받는 현실이 한없이 고통스러웠다. 김요완 씨는 “(김태훈 열사가) 표현은 안 했지만 많이 힘들어 하는 것이 느껴졌다”고 회상했다.
사랑의 사회실현을 위한 노력, 그것이 내 삶의 전부이기를
김태훈 열사의 지인들은 투신 직전 열사가 북아일랜드 독립운동가들의 자기 희생에 관심을 가졌다고 말했다. 1980년과 1981년 북아일랜드에 있는 교도소에서 두 차례의 단식투쟁이 있었다. 수감된 북아일랜드 독립운동가들은 감옥의 처우를 개선하고, 자신들을 일반죄수가 아닌 정치범으로 대해주기를 영국정부에게 요구했다. 당시 일어난 단식으로 열 명에 이르는 독립운동가들이 사망했다. 김요완 씨는 김태훈 열사가 “우리나라의 부조리한 상황을 해결하려면 의식 있는 사람들이 자기를 희생해야 한다고 생각하신 것 같다”고 말했다.
5월 27일 도서관 6층에서 창밖으로 동료들이 탄압받는 모습을 보던 김태훈 열사는 더 이상 침묵할 수 없었다. 누군가 모든 것을 바쳐 이 침묵의 부조리함에 경종을 울려야 했고, 그는 자기 자신이 그 사람이 되고자 했다. 그에겐 어떤 도구도 배포물도 필요하지 않았다. 그는 “전두환 물러가라!”를 세 번 외친 후 자신을 제물로 바쳤다.
김태훈 열사는 운동권에 참여하지 않았음에도 인간을 너무나 사랑했기에, 사람이 어떤 모습으로 살아야하는가 하는 고민 끝에 스스로의 목숨을 바쳤다. 수많은 사람들이 부당하게 생명을 빼앗겼음에도 누구도 이를 잘못됐다고 지적하지 않는 시대였다. 김태훈 열사는 죽음으로써 광주 학살이 절대로 묵과할 수 없는 잘못임을 세상에 고발했다. <서울대학교 60년사>는 열사의 희생에 대해 ‘김태훈의 투신은 학생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었고 광주 문제를 본격적으로 제기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서술하고 있다.
대학 신입생 시절부터 김태훈 열사의 책상 앞에는 ‘사랑의 사회실현과 진리탐구를 위한 끊임없는 노력, 이것이 내 삶의 전부이기를’이라는 글귀가 있었다. 이홍철 변호사는 “(김태훈 열사는) 좌우명에 적힌 그대로 살았다”며 “그는 말과 행동과 삶이 일치했다”고 말했다. 그의 누나 역시 그를 추모하는 글에서 ‘그건 아무것도 아니야. 너의 착함이 없었다면, 사랑이 없었다면, 사랑의 사회실현을 위한 노력, 이것이 네 삶의 전부가 아니었다면’이라며 그의 죽음을 안타까워했다.
시대를 넘어선 양심의 종소리
김태훈 열사는 용인 천주교 묘지에 안치됐다가, 망월동 5·18묘역을 거쳐 현재에는 국립 5·18 민주묘지로 이장됐다. 그의 고등학교 동창들은 매년 그의 기일이 돌아오면 국립 5·18 민주묘지를 찾는다. 김요완 씨는 “기일이 돼 찾아가면 언제나 꽃이 놓여있다”며 아직까지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에게 고마움을 전했다.

열사의 지인들은 열사의 조용한 얼굴, 순진하고 깊이 있는 미소, 그의 속 깊은 마음을 쉽사리 잊지 못한다. 이홍철 변호사는 “그의 모습이 아직까지 선명하게 그려진다”며 “그를 단 한 번이라도 좋으니 보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열사가 스스로를 희생함으로써 횃불과 같은 큰 역할을 했지만, 살아있었다면 더 큰 일을 해냈을 것이라며 안타까워했다.
이홍철 변호사는 김태훈 열사가 아직까지도 자신의 삶에 큰 울림을 준다고 말한다. 그는 “판사가 되고 변호사가 되면서 그 친구에게 부끄럽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 친구가 살아있었으면 했을 행동을 나도 따라서 하겠다는 마음가짐으로 그동안 살았다”고 말했다. 실제로 1987년 6월 항쟁 당시 판사였던 이 씨는 시위자에게 무더기로 청구된 구속영장을 기각하는 용기를 냈다. 이러한 결정을 내린 것은 그의 마음 한편에 김태훈 열사가 있기 때문이다.
열사는 떠났지만 약자를 사랑하는 그의 마음, 정의를 부르짖는 용기, 자기희생은 한 시대에서만 기억되지 않을 것이다. 열사는 아직까지도 많은 사람들의 양심에 경종을 울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