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11월 14일 토요일 아침, 발굴 작업이 막바지에 이른 골령골을 찾았다. 발굴 36일차, 3단에 걸쳐 출토된 유해 중 가장 하단의 유해를 수습하는 날이었다. 대전 동구 낭월동 13번지에서 42일 동안 진행된 이번 발굴을 통해 14x20m 크기의 트렌치*에서 한국전쟁기에 학살된 민간인 유해 약 250여 구가 발견됐다.
*‘트렌치 발굴법’은 고고학 발굴법의 일종으로 도랑파기법이라고도 불린다. 유적에 긴 네모꼴의 도랑을 판 다음 도랑의 주변으로 발굴 범위를 확장해가며 넓은 지역을 조사한다.
골령골의 희생자들
골령골은 한국전쟁 발발 직후인 1950년 6월 28일부터 7월 17일까지 3차례에 걸쳐 최소 1700명에서 최대 7000~8000명 정도가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는 ‘대전형무소 재소자 희생사건’의 희생자들이 묻힌 집단 매장지다. 대전형무소재소자 희생사건은 한국전쟁 당시 민간인이 희생된 집단학살 사건 중 최대 규모로 추정되는데 당시 대전형무소엔 기존 재소자들 외에 국민보도연맹원 다수가 수감돼 있었다. 국민보도연맹은 1949년 좌익 전향자를 계몽하기 위한 목적으로 조직된 단체이나, 조직이 확대되는 과정에서 좌익과 관련 없는 일반 국민들도 강제 가입됐다. 그 외에 희생자 중엔 제주 4.3사건 재소자 300여 명, 여순사건 재소자 400여 명도 포함됐다. 이들은 혐의에 대한 정확한 입증은 물론 재판도 없이 골령골에 끌려가 매장됐다. 학살지에서 발견된 국군의 M1 45구경 탄피 등을 근거로 국군 2사단 헌병부대, 충남지대의 첩보부대 CIC, 대전형무소 특별경비대 등이 가해자로 추정되고 있다.
‘1기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1기 진실화해위)’는 전국적으로 168개의 한국전쟁기 민간인 학살 유해 매장지점을 확인했으나, 예산 부족 등의 문제로 13곳밖에 발굴하지 못했다. 이에 2014년 2월, 한국전쟁유족회와 관련 시민단체들이 ‘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 유해발굴 공동조사단(공동조사단)’을 결성했다. 국가에 의한 진상규명은 중단됐지만 이를 민간 차원에서라도 이어나가겠다는 의지를 드러낸 것이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 기본법(과거사법) 일부개정법률안이 통과되고 다시 진상규명이 재개되기를 바라며 매년 1~2차례씩 진행된 시민 중심 발굴은 올해로 벌써 9차를 맞았다.
유해발굴의 A to Z

민간인 집단학살 유해발굴은 증언에서 시작된다. 조사자가 현장을 답사해 정황과 지형을 바탕으로 증언의 신빙성을 검토한 후, 정밀 시굴을 수행한다. 시굴 과정에서 유해가 발견되면 발견 지점을 중심으로 트렌치를 확장해 나간다. 대나무칼로 유해를 완전히 노출시킨 후 한 구씩 수습한다. 보통 토양의 높은 산성도와 습도로 인해 뼈의 끝부분이나 작은 뼈들이 온전히 남아있지 않아 두개골이나 대퇴골 등의 큰 뼈 위주로 수습이 이뤄진다.
수습이 완료되면 유해에 붙어 있는 이물질을 제거하는 세척 작업이 이어진다. 현장에 방문한 당일에도 발굴 현장의 한편에선 세척 작업이 진행되고 있었다. 유해를 아세톤에 7~8시간 정도 담갔다가 세척을 하기 때문에 세척이 이뤄지는 천막 주변엔 아세톤 냄새가 가득했다. 마지막으로 감식실에서 계측과 뼈의 부위 및 좌우, 성별 등을 식별하는 동정 과정을 거치면 발굴이 마무리된다. 이후 유해 봉안 준비에 착수한다.

죽은 자가 말하는 그날의 기억
이날 발견된 유해들은 서로 복잡하게 뒤엉켜 있어 한 사람의 유해를 온전히 수습하기가 상당히 어려웠다. 이날 처음 발굴현장에 온 대학생 자원봉사자 A씨는 “흙과 뼈가 뒤섞여 있어서 더욱 주춤하게 되는 것 같다”며 “이곳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학살당했는지 한 번에 느껴지는 순간”이었다고 유해를 마주했을 때의 감정을 표현했다. 현장에 유해만 남아있는 것은 아니었다. 인골 유해만큼 단추와 고무신도 많이 출토됐다. 단추가 달려있던 옷은 삭아 없어졌지만 2열, 4열의 흰 단추들만은 옛 모습 그대로였다. 유해 사이사이에 짝을 잃은 채 흩어진 검정 고무신과 흰 고무신은 70년 전 그날의 혼란과 공포를 생생하게 말하고 있었다.
이번 현장에서는 10대 미성년자와 여성의 유해도 출토됐다. 특히 학살 현장에서 미성년자의 유해가 발견된다는 것은 한국전쟁기의 민간인 학살이 무차별적인 살인에 지나지 않았음을 증명한다. 당시 인민군은 우익인사를, 국군은 좌익인사를 제거한다는 명목으로 학살을 감행했으나 그 과정에서 무고한 민간인까지 사살했다.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희생자 전국유족회 김복영 회장은 “인민군이 점령했던 지역을 국군이 탈환하면서 북한군의 명령대로 짐을 한 번 날랐던 사람이 ‘부역 혐의자’로 몰려 죽임을 당하기도 했다”고도 전했다.
이어 김 회장은 한국전쟁 발발 직전인 1949년 12월 24일 경상북도 문경시 석봉리에서 주민 86명이 국군 부대에 의해 집단학살 당한 사건을 언급했다. 2007년 1기 진실화해위에서 비로소 ‘문경양민학살사건’으로 진상규명됐는데, 이 학살지에서는 15세 미만의 어린이가 28명이나 희생당했다. “심지어(옛날에는 출생신고를 늦게 하는 바람에) 이름도 채 짓기 전에 죽은 2~3세의 아이들도 있어 (비문에) 이름 없이 김아기, 최아기라고만 적혀있다”며 한국전쟁기 학살의 잔혹함을 전했다.
우리 모두의 발굴, 국가의 과제
발굴팀의 본부 천막 한쪽에 눈에 띄는 노란 종이가 걸려 있었다. 서울시 마포구에 위치한 대안학교인 성미산학교 학생들이 자원봉사자로 발굴에 참여한 후 남기고 간 편지였다. 성미산학교 학생들은 발굴이 마무리된 후 열린 봉안식에도 참석해 추모공연을 했다.
골령골 발굴이 여느 학술 발굴 현장과 가장 다른 점은 발굴에 참여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원봉사자라는 점이다. 발굴현장은 누구에게나 열려있고,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현장을 찾는다. 이번 9차 발굴의 조사단장을 맡고 있는 4·9 통일평화재단의 안경호 사무국장은 “온전히 시민들의 힘으로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고 말했다.

다만, 민간 차원의 발굴인 만큼 기간이 짧아 발굴 지역도 한정적일 수밖에 없다. 안경호 사무국장은 “골령골에 있는 총 8개의 학살지 중 1개의 학살지, 1학살지에 존재하는 3개의 구덩이 중 1개 구덩이, 최소 50m~최대 200m 길이로 추정되는 구덩이 중 단 14x20m 크기의 트렌치 하나만 발굴한 것”이라며 아쉬움을 표했다. 온전히 시민들의 힘만으로도 지난 10년간 많은 성과를 냈지만, 진상규명의 전모를 밝혀내기엔 역부족이다. 게다가 학살 매장지는 사유지인 경우가 많아 경작을 위해 복토하거나 도로를 건설하기도 해 인위적·자연적 훼손이 상당하다. 발굴이 미뤄질수록 진실을 밝히긴 점점 어려워진다. 결국 유해발굴은 시민들의 몫이기 이전에 국가가 나서서 해결해야 할 과제다.
그리고 남겨진 사람들
유족은 민간인 학살 희생자 유해발굴의 원동력이다. 유족들은 아버지, 어머니의 유해만이라도 찾고 싶은 절박한 마음으로 매일 발굴현장을 찾는다. 현장에 방문했던 그날도 많은 유족이 현장을 찾았다. 다른 지역의 유족회에서도 현장을 찾아와 학살 희생자 가족으로서의 경험을 공유하고 서로를 위로했다. 현재 대부분 8~90대의 고령층인 유족들은 하루빨리 발굴이 진행되기를 염원하고 있다.
아버지, 어머니의 죽음에 대한 진상규명은 유족들이 ‘빨갱이’라는 굴레를 벗게 해준다. ‘어차피 빨갱이의 핏줄이다’, ‘한참 지난 일을 굳이 배상금 때문에 들춰낸다’는 사회의 편견은 그들을 끊임없이 괴롭혔다. 심지어 일부 유족들은 여전히 연좌제에 대한 공포로 진상규명 요구를 하는 것조차 두려워한다. 김복영 회장은 “유족회장으로서 고향 지인들에게 ‘당신 아버지, 우리 아버지 돌아가신 이유를 같이 확실히 밝히자’고 진상규명을 제안하면 더 이상 얘기하지 말라고, 우리 자식들이랑 손자들에게 피해 가게 하기 싫다는 대답이 돌아온다”며 안타까워했다. 남겨진 사람들이 느끼는 슬픔과 공포는 현재진행형이다. 조사단을 이끌고 있는 충북대학교 박선주 교수(고고미술사학과) 역시 “이제는 (빨갱이라는) 고리를 끊고 유족들이 과거에 머무르지 않고 모두 오늘을 살아갈 수 있도록 해야 한다”며 유해발굴이 사회갈등을 치유할 수 있는 하나의 방편이 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고 전했다.
골령골 발굴이 완료된 약 3만 평의 부지엔 ‘진실과 화해의 숲’이 조성될 예정이다. 한국전쟁 민간인 희생자에 대한 추모와 유족에 대한 위로, 그리고 되풀이돼선 안 될 사건을 함께 기억할 수 있는 열린 공간을 조성하기 위해서다. 전국단위 추모 위령소도 함께 들어선다. 현재는 발굴된 유해를 세종시 추모의 집으로 옮겨서 봉안하지만 2022년 경 시설이 완공되면 시신은 본래 그들이 묻혔던 곳으로 다시 돌아온다.
한국사회가 ‘과거 청산’을 이야기한 지는 꽤 오래됐지만 아직 갈 길은 멀다. 안경호 사무국장은 “한국전쟁의 민간인 희생자는 약 100만 명으로 추정되지만 1기 진실화해위에선 이중 16,000명의 희생자밖에 확인하지 못했다”며 “국가폭력 희생자에 대한 진상규명이 약 0.016%정도만 진행됐을 뿐이고 이것이 현재 우리나라의 과거청산 수준”이라고 말했다.
과거 청산은 의문을 해소하는 것에서부터
과거 청산은 피해자들이 스스로 왜 그런 일을 당했는지조차 모른다는 문제의식에서부터 시작된다. 피해자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대체 무엇 때문에 자신이 그런 일을 당해야 했고, 자신의 삶을 빼앗겼는지를 아는 것이다. 결국 진상규명은 과거 청산의 시작점이 될 수밖에 없다.

민간 차원에서 최초로 국가폭력에 대한 진상규명 요구가 이뤄진 것이 바로 한국전쟁기 민간인 학살 사건이다. 4.19 혁명 직후 과거사 정리에 대한 시민들의 요구가 표면화됐고, 한국전쟁기 민간인 희생사건 피해자 유족들은 1960년 10월 20일 ‘피학살자유족회’를 결성해 가해자 처벌과 진상규명, 피해보상을 요구했다. 그러나 5.16 쿠데타 이후 박정희 정부에서과거사 진상규명 요구를 하던 유족회를 탄압하면서 활동이 불가능해졌다. 김복영 회장은 “당시에 민간 차원에서 경상도에 있는 유해를 발굴하려 했는데 정부가 미리 알고 현장을 파헤치고 불을 질렀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일부 유족회원들은 유족회 활동을 이유로 길게는 20년에 이르는 징역형을 살고 나오기도 했다. 일련의 사건들로 인해 유족들은 80년대까지 말 한마디 못하고 살아야만 했다.
군사정권 시기에 중단됐던 진상규명은 1987년 6월 항쟁 이후 다시 시작됐다. 노태우 정부는 당선 이후 한시적 기구인 ‘민주화합추진위원회’를 출범시켜 5·18 민주화 운동을 민주화 투쟁의 일환으로 인정했으나, 완전한 진상규명에는 이르지 못했다. 김영삼 정부에 들어서 5·18 민주화 운동 피해자 32명이 5·18학살 책임자 35명을 사법부에 고소 및 고발했지만, 검찰은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며 불기소처분을 내렸다. 검찰의 처분에 분노한 수십만 명의 시민들이 연대서명을 하는 등 진상규명에 대한 요구가 격화되면서 결국 1995년 12월 5·18 특별법이 통과됐고, 1996년에는 피고인들에게 중형이 선고됐다.
2000년대의 김대중 정부에선 제주4·3사건과 의문사 사건을 중심으로 과거 청산이 이뤄졌다. 4·19혁명 이후로 꾸준히 이어져 온 제주4·3사건에 대한 진상규명 요구는 2000년 1월 12일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되면서 결실을 맺었다. 한편, 1999년 12월엔 ‘의문사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의문사법)’이 국회에서 통과됐다. 의문사법 국회 통과 역시 의문사 사건 유가족들이 1998년 11월부터 422일 동안 국회 앞에서 천막 농성을 벌여 얻어낸 성과였다. 이에 대통령 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의문사위)’가 발족하면서 권위주의 정권 치하 의문사 사건의 진실을 밝힐 수 있는 단초가 마련됐다.
경희대학교 최광준 교수(법학전문대학원)는 의문사위에 대해 최초의 포괄적인 위원회라고 평가했다. 이전처럼 특정 사건만 다루는 것이 아니라 국가공권력에 의해 인권침해를 당하고 사망에 이른 피해자들 모두를 찾겠다는 목적에서 출범했기 때문이다. 의문사위 1기(2000년 10월~2002년 10월)와 2기(2003년 7월~2004년 6월)의 활동 결과 97건의 사건을 조사해 위법한 공권력 행사에 의한 30건의 사건에 대해 인용 결정을 내렸다. 의문사위의 활동은 이후 노무현 정부의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1기 진실화해위)’로 이어졌다.
대한민국 과거 청산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특징은 국가가 먼저 나서서 진상규명과 피해보상을 한 전례가 없다는 것이다. 항상 유족들의 농성과 시민들의 서명 운동이 있은 뒤에야 특별법이 제정되고 임시기구가 설치됐다. 진실화해위도 마찬가지다. 2004년 노무현 정부 당시 여야 간 대립으로 인해 과거사법 통과가 지연되자 유족들은 과거청산 입법에 돌파구를 마련하기 위해 집회와 농성투쟁을 진행했다. 이번 2기 진실화해위 역시 과거사법 개정안이 국회 문턱을 넘지 못하자 형제복지원 사건 피해자인 최승우 씨가 국회 의원회관에서 고공 단식농성을 벌였고, 법안이 극적으로 통과돼 출범할 수 있었다. 안경호 사무국장은 “국가폭력에 의한 피해자가 있으면 국가가 먼저 나서서 해줘야 되는 것이 맞는데, 꼭 피해자가 울고불고 떼쓰는 것처럼 해야 바뀐다”며 국가의 입법부작위를 지적했다.
게다가 진실화해위에서 인정된 희생자는 전체 희생자의 극히 일부분에 불과하다. 현재는 피해자가 스스로 진상규명 신청을 해야만 피해를 인정받을 수 있는데, 보복에 대한 두려움, 과거의 상처에 대한 트라우마 등 여러 이유로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진상규명은 피해자들의 염원이지만, 진상규명까지 가는 과정에서 피해자들은 또 다른 고통을 겪고 있다.
피해자의 요구에 의존하는 과거청산이 야기한 또 다른 문제는 개별 희생자의 분리다. 광주 5·18 민주화운동, 제주 4·3사건 등 모두 피해자와 유족들, 시민단체의 요구가 생기는 대로 그때그때 위원회를 설치하고 위원회 활동이 끝나면 손을 놓는 식의 진상규명이 이어져왔다. ‘임시방편’식의 진상규명은 결국 사건의 희생자들을 제각각 분리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최광준 교수는 “광주 5·18 민주화운동이나 제주 4·3사건 모두 개별 사건보다는 국가에 의한 인권침해의 희생자들로 포괄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정치적·이념적 논의에 앞서 인권 침해 사실 그 자체가 더 우선시돼야 한다는 의미다.
최광준 교수는 파편화된 진상규명의 근본적 원인을 과거 청산에 대한 국가 차원의 로드맵 부재로 꼽는다. 독재정권에서 민주정권으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과거 인권탄압의 잔재를 청산해야 한다는 ‘이행기 정의’는 사법제도만으론 결코 달성될 수 없다. 최 교수는 진상규명과 피해보상부터 피해자에 대한 치유, 명예회복과 인권교육, 재발방지조치와 기념문화까지 포함한 체계적인 과거 청산 로드맵과 이를 뒷받침할 일종의 재단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1기 진실화해위가 종료된 지 10년 만에 많은 이들의 기대 속에서 출범하게 된 2기 진실화해위가 ‘진실과 화해’라는 궁극적 이행기 정의로 향하는 시작점이 될 수 있을지 주목해야 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