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의 고통이 오늘로 이어지지 않으려면

기억은 우리 모두의 몫이다
1기 진실화해위 진실규명 보고서

  유엔을 비롯한 국제사회에서는 이행기 정의를 위한 단계로 진실·정의·배상·재발방지, 더 나아가서는 기억을 얘기한다. ‘이행기 정의’는 과거사 문제가 지나간 일을 처리하는 것이 아니라 미래까지 이어지는 정의를 수립하는 인권 과제임을 강조하는 용어다. 한국에서 이행기 정의를 실천하기 위한 움직임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지금까지 과거사 관련 위원회가 여러 차례 설립됐고, 언론에서는 피해자들이 그동안 얼마나 고통받았는지 꾸준히 보도됐다. 그런데도 여전히 국가폭력 피해자들은 수십 년 동안 목이 쉬어라 반복해온 요구들을 지금 이 순간에도 외치고 있다. 과연 우리 사회가 피해자들의 아픔을 들여다보고 치유하기 위해 노력했다고 할 수 있을까.  

  지나간 일이라고, 혹은 나와 상관없는 피해자들만의 일이라고 얘기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국가폭력을 직접 경험하지 못한 후세대라고 해서 과거사에 책임도, 영향도 없는 제3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동안의 과거 청산 노력이 놓치고 있던 것은 무엇인지, 과거는 ‘청산’될 수 있는 것인지 살펴봤다.

폭력은 일상 곳곳에 있었다

  국가폭력 피해자들이 겪는 고통은 고문을 받는 조사실에서 나오는 순간, 혹은 억울한 수형생활을 마치고 감옥에서 나오는 순간 끝나지 않았다. 고문 등으로 인한 신체적 외상과 정신적 트라우마가 그 이후에도 피해자들을 힘들게 했다. ‘광주트라우마센터’ 명지원 센터장은 트라우마를 경험하는 피해자들의 심리 상태를 고통스러운 기억이 시도 때도 없이 떠오르는 “과민각성상태”라고 설명한다. 트라우마를 유발하는 기억이 피해자의 일상생활을 지배하면서 그 이전의 삶을 회복하지 못하게 만드는 커다란 장애물이 됐다. 

  폭력 피해로 인해 직접적으로 유발된 후유증만큼이나 피해자들의 사회복귀를 힘들게 한 것은 주변 사람들로부터의 외면이었다. 반공이 국시였던 우리나라에서 ‘빨갱이’라는 낙인이 찍힌 민간인학살 피해자와 유가족들은 어디에서도 환영받지 못했다. 1969년 홍성경찰서장 명의의 담화문에 나오는 간첩식별법에는 ‘과거의 악질 부역자 처단자 가족과 남몰래 가까이 교제하는 자’가 포함돼 있다. 유족들과 가까이 지내는 것만으로도 간첩으로 몰릴 수 있었기 때문에 유족들은 이웃들의 냉대를 받았다. 1980년대 간첩으로 의심돼 조사만 받고 돌아온 한 피해자는 고향으로 돌아왔을 때 간첩으로 의심하는 이웃들의 수근거림을 듣거나 동네 아이들이 던진 돌에 맞기도 했다. 주변 사람들의 따돌림과 괴롭힘은 ‘빨갱이’라는 이유로 정당화됐다. 명 센터장은 “센터로 오시는 피해자들이 당시의 외상보다 동네에서 빨갱이로 손가락질 받으면서 소외된 것이 훨씬 힘들었다고 말씀한다”며 피해자들이 겪은 2,3차 피해의 심각성을 강조했다.  

  피해자들이 겪는 고립은 사회적 관계의 단절에 그치지 않고 취업제한으로도 이어졌다. 사상범으로 징역형을 받은 국가 폭력 피해자들은 출소 후에도 일상생활을 경찰에게 감시당했다. 보안관찰이라 불리는 제도 때문이었다. 간신히 어렵게 직장을 구하더라도 한 달에 한 번씩 찾아오는 경찰이 직장에 피해자의 전과를 알리면서 해고당하는 일이 빈번하게 일어났다. 직장을 구하기 어려운 피해자들 중 많은 수는 빈곤층으로 전락했다. 2019년 ‘인권의학연구소’가 실시한 ‘고문피해자 인권 상황 후속 실태조사’에 의하면 고문피해자 73명 중 40.9%가 현재 월평균소득 100만원 이하의 빈곤층에 속하는 등 피해자들의 경제적 어려움이 현재까지도 지속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성공회대 한홍구 교수(교양학과)는 “우리 사회공동체가 그동안 정부 말을 믿고 피해자들을 배제했다는 점에서 구성원들은 동조자로서 책임을 진다”며 공동체와 피해자의 화해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재판이 치유해주지 못한 마음의 상처

  피해 사실을 말하는 것 자체가 또 다른 불이익과 폭력을 낳는 사회에서 피해자들은 오랜 시간 피해 사실을 숨길 수밖에 없었다. 2005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 기본법’이 제정되고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가 출범하면서 체계적인 과거사 진실규명 작업이 비로소 시작됐다. 이에 일부 국가폭력 피해자들은 진실화해위의 보고서를 근거로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받고 배·보상을 받을 수 있었다.

1기 진실화해위 진실규명 보고서

  재판으로 피해자들의 삶이 사건 발생 이전으로 회복된 것은 아니었다. 인권의학연구소에 따르면, 2019년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받고 배·보상을 받은 피해자 68명 중 45.6%가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를 여전히 겪고 있었다. 명지원 센터장은 “재심과 배·보상이 이루어지면서 어느 정도 해결이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국가폭력 피해자의 자살이 연이어 발생했다”며 “활동가들 사이에서 피해자들의 심리적 고통을 돌아보지 못했다는 반성이 이루어지면서 트라우마 치유를 위한 노력이 생겨났다”고 설명한다. 

  그동안 우리 사회에서 트라우마 지원에 대한 관심이 부족했던 배경에는 피해자의 고통을 경제적으로 환원할 수 있다는 사회적 인식이 있다. ‘진실의 힘’ 이사랑 활동가는 “이행기 정의는 각 단계가 유기적으로 실천돼야 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는 보상 관련 특별법이 먼저 제정돼 그것으로 과거사 문제가 끝난 것처럼 돼버렸다”고 지적한다. 그동안 배·보상 외에 가해자 처벌, 트라우마 지원, 기념사업 등을 아우르는 체계적인 이행기 정의 실천에 대한 고민이 부족했다는 것이다. 그는 “경제적 보상이 가장 쉽고 빠른 해결 방법으로 여겨지지만 피해자의 고통을 금전적 가치로 환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며 피해자들의 심리적 고통을 치유하려는 사회적 지원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러한 지원을 위해 2012년 국내 최초로 광주시의 직영조직으로 광주트라우마센터가 개소했고 현재 몇몇 민간단체 역시 국가폭력 피해자들의 트라우마 치유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2020년 5월에는 제주 4·3항쟁 피해자들을 위한 제 주4·3트라우마센터가 건립됐다. 정부는 국가폭력 피해자들의 트라우마 치유를 공식적으로 지원하기 위한 첫 발걸음으로 2023년까지 광주시에 국립 국가폭력 트라우마치유센터 설립을 계획 중이다. ‘김근태기념치유센터’ 이화영 센터장은 국립 국가폭력 트라우마치유센터가 제 역할을 하기 위해 피해자의 PTSD를 심도 있게 이해하는 전문인력뿐만 아니라 당사자의 요구에 맞춘 프로그램 구성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이처럼 국가폭력 피해자들의 트라우마를 지원하려는 움직임이 조금씩 생겨나고 있지만, 피해자의 트라우마 치유를 지원하는 법적·제도적 지원은 여전히 부족한 실태다. 이화영 센터장은 “유엔 고문방지협약에 의하면 가입당사국은 국가 법체계 안에 고문피해자가 의료적, 심리적 재활을 받을 수 있도록 보장하는 법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설명한다. 우리나라는 1995년 유엔 고문방지협약에 가입한 당사국이지만, 고문 피해자를 포함한 국가폭력 피해자 트라우마 지원에 관한 법안 은 전무하다. 5·18 민주화운동, 제주 4·3 사건, 거창사건 등 에 관해 제정된 특별법에도 피해자의 상담과 재활을 지원하는 조항은 포함돼 있지 않다. 21대 국회에서 발의된 국립 국가폭력 트라우마센터 설립에 관한 법안의 경우 소관 상임위원회에서 논의조차 이뤄지지 못하고 있다. 

  국민을 보호할 의무를 가진 국가에 의해 삶이 파괴당한 국가폭력의 본질상 피해자들의 트라우마 지원을 국가가 책임지는 것은 피해자들의 국가에 대한 신뢰 회복을 위해 필수적이다. 명지원 센터장은 “센터에 오는 선생님들이 기록에 남겨져서 피해가 갈까봐 지금도 등록지를 안 쓰려고 한다”며 피해자들이 국가와 사회에 대한 안전감을 갖는 것이 치유의 전제조건이 돼야 한다고 설명한다. 이는 피해자의 트라우마 치유를 위해선 개별적 의료지원을 넘어 국가의 진실·정의·배상·재발 방지 노력이 뒷받침돼야 한다는 뜻이다. 재심 과정에서 국가가 가해 사실을 부인하거나 진실규명을 적극적으로 하지 않을 때 국가에 대한 배신감은 더욱 가중되기 때문이다.

오늘을 행복하게 살아가기 위해서

  트라우마를 치유한다고 해서 과거의 고통스러운 기억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명지원 센터장은 트라우마 치유를 “내 일상을 압도하고 있는 기억을 삶에서 일어난 많은 일들 중 하나로 받아들임으로써 통제력을 회복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기억을 떠올렸을 때 두려움, 불안 등으로 압도되는 것이 아니라 정리된 감정으로 마주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피해자는 국가에 의한 폭력으로 고통스러워하는 존재인 한편 그 오랜 시간의 고통을 겪고도 강한 내면의 힘으로 살아남은 생존자다. 피해자가 자신의 삶이 피해 경험으로만 규정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은 치유 과정의 일부분이다. 2019년에 열린 사진치유전 ‘나는 간첩이 아니다’는 간첩 조작사건 고문피해자들이 카메라를 통해 자신의 상처를 마주하고 삶의 의미를 찾아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상처와의 대면’은 피해자가 고문당했던 장소를 직접 찾아가 찍은 사진들을 담았다. 사진치유전에 참여한 김순자 씨는 ‘자꾸 가다보니까 세밀하게 보게 되고 차분하게 상황을 복기하듯이 돌아보게 됐다‘고 전했다. 곳곳을 사진으로 찍는 과정에서 공간이 유발하는 공포는 서서히 사라지고, 그 공간에서 자신이 겪은 경험을 되새기게 된다. 

  ‘원존재와의 대면’은 피해자가 일상 속에서 기쁨을 느끼는 순간들, 소중한 추억이 담긴 공간이나 사랑하는 사람들을 찍은 사진들을 담았다. 참여자 이사영 씨는 아픈 기억의 공간들 이외에도 고궁, 바다, 동물원, 야구장 등 평소 가고 싶었으나 위축감으로 망설였던 곳들을 카메라를 들고 찾아다녔다고 한다. 사진치유전을 기획한 ‘공감아이’ 임종진 대표는 “국가폭력 피해자에 대해선 늘 상처만 다뤄진다”고 지적하며 “오늘을 행복하게 살아가려는 피해자들의 이야기를 담고 싶었다”고 말했다.

  다른 사람들과 자신의 삶을 공유하고 지지를 받는 과정에서 사회로부터 오랜 시간 외면당한 피해자들의 트라우마가 치유되기도 한다. 현재 서대문형무소역사관과 옛 남영동 대공분 실에 자리한 민주인권기념관에서는 몇몇 국가폭력 피해자들이 인권강사로 일하고 있다. 그 공간에서 고통을 겪고 살아남은 생존자로서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시민들에게 현장을 생생하게 해설하는 것이다. 이화영 센터장은 “현장에서 피해자임을 밝혔을 때 사람들이 더 집중해서 해설을 듣고, 적극적으 로 공감과 지지를 보이는 것에서 피해자의 경험이 고통 이외의 새로운 의미를 지니기도 한다”고 말했다. 

  피해자들은 자신과 비슷한 고통을 겪고 있는 다른 피해자들의 아픔을 누구보다 더 잘 이해하기 때문에 서로가 서로의 하루를 버티게 해주는 지지대가 돼줄 수 있다. 재단법인 진실의 힘은 진도 일가족 조작간첩단 사건의 피해자였던 박동운 이사장을 비롯한 피해자들이 다른 국가폭력 피해자들을 돕기 위해 손해배상금의 일부를 출연하여 설립한 단체다. 이사랑 활동가는 “진실의 힘 자체가 피해자들의 연대의 결과물”이라고 말했다. 진실의 힘에서는 ‘상처입은 치유자’ 프로그램을 통해 심리교육을 받은 피해자들이 사회적 참사 피해자들의 치유를 돕기도 한다. 국가로부터 보호받지 못했다는 아픔뿐만 아니라 지난한 해결과정 속에서 기약 없이 기다려야 하는 아픔까지도 공유하기에 피해자들의 연대는 더욱 큰 의미가 있다. 

현재를 흐르는 과거사의 무게

  한국전쟁 당시 일어난 민간인학살 사건의 유족들을 시작으로 국가폭력 사건들의 피해자들이 과거사 해결을 요구한 지도 벌써 수십 년이 흘렀다. 한국현대사의 수많은 국가폭력 사건들은 제각기 발생 배경도, 가해자도 다르지만 국가권력에 의해 억울하게 희생된 피해자들이 생겼다는 점에서 동일한 맥락 안에 놓인다. 경희대학교 최광준 교수(법학전문대학원)는 “희생자를 기억하는 것은 인류로서 가지는 보편적 가치”라며 이름 없는 희생자들까지 기억하는 기억문화가 정착돼야 한다고 말한다. 우리 사회의 아픔을 치유하려면 인과관계를 밝히지 못한 사건들에 대해서도 피해자와 유족들의 억울함을 기억해야 한다는 것이다.  

진실화해위에서 진실규명불능 판단을 내린 사건의 피해자들도 기억하는 기억문화가 정착돼야 한다.

  기억문화의 정착은 피해자에게만이 아니라 우리 사회 전체에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과거에 부당하게 행사된 국가의 폭력을 기억하고 피해자들을 구제하는 것은 국가가 국민에게 행사할 수 있는 폭력에 관한 규칙을 재정립하는 일이다. 한홍구 교수는 “현재는 과거로부터 만들어진 것”이라며 현재에서 정의가 구현되기 위해선 과거에 있었던 부정의를 바로잡는 작업이 선행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제대로 해결되지 못한 과거의 부정의는 역사 속에서 누적되고 미래에 반복될 수 있다. ‘제주다크투어’ 백가윤 대표는 “1947년 제주도 3.1절 발포사건 때 만들어진 블랙리스트가 1948년 4.3 항쟁과 한국전쟁 예비검속 사건에서 사람들을 잡아들이는 데 쓰였는데, 그 블랙리스트가 군부독재 시기에 조작간첩을 만들 때 다시 쓰였다”며 과거 바로잡히지 않은 국가 폭력이 변주된 사례가 있다고 설명했다. 더 나아가 그는 “과거에 일어난 국가폭력에 대해서 재발 방지 노력이 제대로 이뤄 졌다면 최근의 사회적 참사들이 일어났을까”라는 의문을 던졌다.

  진실·정의·배상·재발방지를 향한 발걸음은 아직 더디고 느리기에 국가폭력 사건들에 대한 우리의 기억은 불완전하고 파편적이다. 그러나 이사랑 활동가는 “불완전한 기억이더라도 불완전한 상태로 기억함으로써 보존해야 한다”고 말한다. 과거에 일어난 국가폭력은 국가의 테두리 안에서 오늘을 살고 있는 모든 사회 구성원들과 무관하지 않다. 이름 없는 희생자들까지도 일상 속에서 생동하는 기억으로 남을 때 과거사의 아픔이 단지 과거의 일로만 남을 수 있을 것이다.

국립 5·18 민주묘지 안에 있는 유영봉안소. 과거에 희생된 피해자들을 기억하는 것은 현재를 사는 우리의 몫이다. ⓒ김가영 사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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