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는 농인이고, 농인들은 목소리를 내지만 농인 사회의 긴 역사 속에서 목소리는 허공으로 사라져버렸다.” 청각장애학생에 대한 이해 없이 이뤄지는 교육은 교육의 불균형을 유발한다. 몰이해의 기저엔 당사자의 목소리를 배제하는 사회가 있다. 청각장애 교육 이면에 자리 잡은 인식을 들여다보고, 누구도 억압되지 않기 위해 사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모색해봤다.
당사자를 지우는 당사자 이야기
청각장애 교육의 당사자는 청각장애인이지만 교육 정책을 수립하는 의사결정권자는 대부분 청인(청각장애가 없으며 음성언어를 주로 사용하는 사람) 전문가로 구성된다. 강남대학교 특수교육·재활연구소 곽정란 연구원은 “정책을 입안하는 과정에 다양한 청각장애학생 당사자들이 참여할 수 있는 환경이 보장돼야 하는데 상당히 미흡하다”고 말했다. 농인(청각장애인 중 제1 언어로 수어를 사용하는 사람)이 정책 관련 회의에 참석하더라도 1~2명의 자문위원 역할에 그친다. 강남대학교 변강석 외래교수(수화언어통번역학과)는 “교육 정책 연구를 설계하고 이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사람은 대부분 청인이고, 농인들은 모든 것이 결정된 후에야 (결정 내용을) 알게 된다”고 말한다. 청인 위주로 의사결정이 이뤄지는 현 구조에선 당사자의 권리를 제대로 행사할 수 없다.
청인 전문가 위주로 청각장애 교육정책이 설계됐을 때의 문제점은 청각장애인에게 무엇이 효과적인 교육인지가 청인의 시각에서 결정된다는 것이다. 즉, 청각장애 교육엔 청인중심적 사고가 반영될 수밖에 없다. 교육 목표는 청각장애학생이 청인과 비슷한 수준으로 듣고, 청인과 같은 방법을 사용해 의사소통할 수 있도록 독려하는 데 맞춰진다. 이를 위해 청각장애학생에게 음성언어를 더 잘 습득시킬 수 있는 방법, 한국어 읽기·쓰기 능력을 신장시키는 방법 등을 구상하는 것이 현 청각장애 교육의 주된 방향이다.
이는 농인에게 청인처럼 행동할 것을 지시하는 청능주의와 직결된다. 청능주의는 청인을 우월한 주체로 상정하고 청인의 언어인 구화를 당연한 기준으로 삼는다. 국립특수교육원에서 2016년에 발간한 ‘청각장애 양육 길라잡이’에선 수어 지도의 필요성을 인정하면서도 ‘물론 아동이 구어로 의사소통을 한다면 그것보다 좋은 것은 없습니다’라고 말한다. 구화 사용을 우선시하고 수어는 부차적인 언어로 바라보는 시각이 그대로 담겨있는 것이다. 청능주의적 시각을 답습하는 경향은 교육 현장에서도 다르지 않다. 변강석 교수는 농학교 재학 당시 수어가 아닌 구화를 해야 했고, 수어로 수업을 해달라고 건의해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말한다. 이런 상황에서 변 교수는 “교육을 하는 게 아니라 나를 교정한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다”며 농학교에서의 모든 경험이 스스로를 억압하는 과정이었다고 회상한다.
청인의 언어인 한국어와 농인의 언어인 한국수어를 동등한 공용어로 보는 법이 제정됐지만 여전히 한국어보다 한국수어를 낮게 평가하는 경향이 사라지지 않고 있다. 농인의 능력을 결정하는 주된 기준 역시 한국수어가 아닌 한국어다. 변강석 교수는 “농인은 농인이 쓰는 언어(수어)로는 평가받지 못한 채 농인이 쓰는 음성언어나 문장력으로 평가받는다”고 말했다.
한국수어에 대한 정확한 이해 없이 ‘수어’라는 용어가 왜곡되기도 한다. 농인들이 사용하는 언어인 한국수어가 아닌, 한국어 문법에 따라 한국어 단어를 수어 단어로 대응시켜 나열한 ‘수지한국어’가 ‘수어’와 동일시되는 것이다. 초·중·고등학교나 대학교, 종교기관 등에서 배우는 수어나 수어 노래가 대표적인 예시다. 실제로 한국수어는 한국어와 문법체계가 달라 한국어와 동시에 발화될 수 없다. 그러나 편의상 한국어 문법 구조에 단어만을 수어 단어로 변환한 수지한국어가 ‘수어’로 사람들에게 알려지곤 한다. 이는 농인의 언어가 알려지는 과정에서조차도 농언어가 청인의 언어에 맞춰 재구성되는 실정을 보여준다.
나의 자아를 찾아서
청각장애인의 약 90%는 청인 부모아래에서 태어나, 대부분 인공와우 수술을 받고 일반학교에 진학한다. 이들은 언어지도와 청능훈련 등에 정진하며 ‘청인처럼’ 살아갈 것을 기대받는다. 한국복지대학교 허일 교수(한국수어교원과)는 “청인 부모와 청인 의사, 청인 가족들은 (청각장애인에게) 한국어와 음성언어를 습득해 말(구화)로 주변 사람들과 의사소통하고 청인처럼 살아갈 것을 요구한다”고 말했다.
청인중심적 교육 환경에서 청각장애학생은 스스로를 불완전하다고 느낄 수 있다. 학창시절의 경험은 청소년기의 자아정체성에 큰 영향을 끼친다. 곽정란 연구원은 “한국수어를 하는 농학생은 끊임없이 말(구화)을 잘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존재, 청인의 기준에 맞춰 가야 하는 존재로 인식하게 되는데 그런 교육 방식이 농인으로서 자신에 대한 부정적인 경험들을 하게 한다”고 말했다. 이에 일부 학생은 청능주의적 사고에 익숙해져 정체성의 혼란을 겪기도 한다. 강남대학교 강창욱 교수(중등특수교육과)는 “인공와우를 하고 말을 잘하는 청각장애인도 청인과 농인 사이에서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다”고 말했다.
이렇듯 청각장애를 치료와 훈련의 대상으로 상정하는 시각은 청각장애의 단점만을 부각시켜 청각장애학생이 고유한 정체성을 확립하고 성장해나갈 가능성을 차단한다. 청각장애인을 소리를 듣지 못하는 사람으로만 이해한다면 청각장애인은 단지 신체기능 상의 약점을 극복해야 할 사람으로 평면화된다. 허일 교수는 “청각장애인의 약점과 결함으로만 그들을 규정하는 병리적 관점으로 청각장애인의 실패와 부정적 특성은 설명할 수 있지만, 청각장애인의 성공에 대해선 이야기하지 못한다”고 말했다. 병리적 관점은 청각장애인이 소리를 더 잘 듣게 된다면 많은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그러나 허 교수는 “인공와우 수술을 받거나 보청기를 착용해도 청인보다 못 듣고 말 못하는 사람 취급을 받을 뿐”이라며 청각장애를 치료의 대상으로만 바라보면 청각장애인을 늘 부족한 존재로만 남아 있게 한다고 지적했다.
기존의 병리적 관점에서 벗어나 농인의 모습을 긍정적으로 수용하고 정체성을 확립하려는 문화가 농인 내부에서 형성됐다. 스스로를 그 자체로 온전하며 청력을 보완하거나 개선할 필요가 없는 주체로 보는 것이 이 문화의 관점이다. 이러한 문화를 농문화(Deaf culture)라고 하며, 청각장애인을 나타내는 용어인 deaf에서 대문자 D를 써서 나타낸다. 장애를 교정할 필요가 없다는 농문화의 관점은 인공와우나 보청기를 사용하는 것과 대척점에 있지 않다. 농문화에서 이것들은 장애를 ‘극복’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의사소통하는 방법 중 하나로 인식된다. 허일 교수는 “수어통역과 속기 서비스를 이용하는 등 청인과 다르게 소통하는 방법을 사용하는 농인들에겐 인공와우나 보청기 역시 의사소통 선택지 중 하나일 뿐”이라며 “도움이 된다면 선택하고, 선택하지 않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
농인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농문화에서 농인들은 스스로를 ‘듣지 못하는 사람’이 아닌 ‘보는 사람(seeing person)’으로 정의한다. 허일 교수는 “농인은 자신이 소리를 듣지 못한다는 측면을 부인하지 않으며, 피부색이나 국적처럼 자신에게 주어진 하나의 삶의 조건으로 바라본다”고 말했다. 이때 농인은 농인의 언어와 문화를 수용하고 적극적으로 활용하며 스스로를 있는 그대로 이해한다.
청각장애를 치료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사회적 인식을 반영한 교육은 청각장애인에게 농인으로서의 삶을 선택할 가능성을 차단한다. 이에 정체성을 확립하기 시작하는 학창 시절에서부터 청각장애학생이 농문화와 수어, 농인의 삶을 접할 기회가 마련돼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된다. 교육의 의미는 단순히 지식을 전달하는 것을 넘어 학생이 건강한 자아를 실현하는 데 있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선 제도적 지원이 뒷받침돼야 한다. 곽정란 연구원은 통합교육 현장에서 학생들에게 초등학교 때부터 수어를 배울 수 있는 기회, 다른 또래(청각장애) 학생들을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고 말했다. 통합교육 과정을 거친 학생들은 학창 시절 동안 농문화를 만날 기회가 없다가 뒤늦게 접하는 경우가 많다. 배재만 통역사는 ‘농획득(Deaf gain)’이라는 개념을 소개하며 “청각장애를 가지고 태어나면 농인이 되는 것이 아니며 농인으로 성장할 수 있어야 하는데, 한국에선 내가 농인이 될 수 있고 농인이 당연한 존재라는 접근조차 이뤄지지 못한다”고 설명했다. 농인으로서의 삶을 선택할 수 있는 기회가 교육과정에서부터 제시돼야 한다는 것이다.
농인의 문화와 언어 중심의 교육 역시 필요하다. 변강석 교수는 일본과 네덜란드의 농학교를 예로 들어 농문화와 농언어에 기반한 농교육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현재 일본의 메이세이 농학교에서는 제1언어로 일본수어를, 제2언어로 일본어를 사용한다. 일반 학교의 ‘국어’ 대신 ‘수어’ 교과를 가르치며, 학교장과 교사의 절반이 농인이다. 북유럽 국가의 경우 기본적으로 대응수어를 쓰고 청각을 활용하는 학교에서도 한 교실만은 완전히 수어로 교육하고 있다. 변강석 교수는 “단 ‘한 곳’만이라도 농문화와 농언어에 기반한 교육이 이뤄져야 하는데 한국에선 전반적으로 잠식됐다”고 말했다. 농문화와 직결되는 농학교에서조차 농인 위주의 교육이 이뤄지고 있지 않은 실정이다.
‘한 곳’의 중요성을 전문가들이 강조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한 곳만이라도 알맞은 교육환경을 갖춘다면, 이를 농문화와 한국수어에 대한 인식을 점차 확장하는 모델로 삼을 수 있기 때문이다. 곽정란 연구원은 “한 곳만으로 많은 학생들의 요구를 담보할 수는 없지만, 일본의 경우 메이세이 학교로 인해 농인 특수교사도 많아졌을 뿐더러 특수교육에서 일본수어를 사용하는 의의와 중요성을 (사람들이) 인지하고 있다”고 말했다.
해외 곳곳의 통합교육 환경에서도 수어 통역사를 배치하거나 함께 수어를 배우려는 시도가 생기고 있다. 변강석 교수는 통합교육 현장에 청인 교사와 농인 교사가 동시에 배치돼 이들이 함께 수업을 진행하는 사례를 제시하며, “(이 경우) 청인 학생은 수어에 노출되면서 수어에 익숙해지고 수어에 거부감을 느끼기보다는 이를 하나의 언어로 인지한다”며 서로의 문화를 대등하게 학습할 수 있는 열린 통합교육의 예를 들었다.
변화를 만들어내는 인식 필요해
한국에선 그동안 하나의 방향과 하나의 선택지만이 옳은 것처럼 여겨졌다. 이는 사회 전반에 깊게 뿌리 박힌 청능주의적 시각에 기인한다. 청능주의적 시각은 제도의 미비로 이어진다. 청각장애학생은 스스로의 능력을 제한적으로 발휘할 수밖에 없는 환경에 놓여 있다. 통합교육에서는 적절한 지원을 받지 못하고 있으며, 농학생은 자신의 언어로 사고하고 이야기할 기회조차 흔치 않다.
변강석 교수는 농인이 스스로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선 사회적인 인식이 바뀌어야 한다고 말한다. 사회의 인식과 제도가 ‘농획득’을 막는 억압으로 작용하며, 농인 스스로에게 억압이 내면화될 수 있기 때문이다. 2019년의 현대자동차 ‘조용한 택시’ 광고는 사회의 억압적 인식을 여실히 드러냈다. 광고 속 청각장애인 택시기사가 운전하는 택시를 타자마자 일부 승객이 불쾌감을 내비치는 장면은 청각장애인에 대한 차별적 시선을 보여준다. 변 교수는 “농인의 것을 사회에서도 같이 바라보고 억압의 요소를 제거하려는 시도가 있어야 농인도 스스로 억압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는 힘이 생긴다”고 말했다. ‘농인의 것’이란 청각장애인의 고유한 특성과 역량을 말한다. 현대자동차는 청각장애인이 더 예민한 시각과 촉각을 가진다는 사실에 착안해 운전 중 마주할 수 있는 청각 정보를 픽토그램 등의 시각 정보로 구현했다. 이는 억압적 요소를 걷어내기 위해 청각장애인의 입장에서 세상을 감각하는 방식을 제시한 예다.


개인이 선택할 수 있는 다양한 삶의 방향을 인지하고, 그에 맞는 선택지가 보장됐을 때 학생은 비로소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으로 발휘할 수 있다. 변강석교수는 독일 학회에서 수어로 토론할 기회가 생겼을 때 “수어로 이야기하면서 지식뿐만 아니라 논리력, 사고력 등이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것을 경험했다”고 했다. 실제로 기회가 주어졌을 때 본인의 능력치를 발휘해 사회에 진출하는 농인들이 해외에도 존재한다. 허일 교수는 “해외에 농인 변호사나 농인 의사들이 나오는 건 해외 농인들이 한국의 농인보다 더 청력이 좋아서가 아니다”라며 농인의 한계는 장애라고 규정하는 사회의 해석으로 결정된다고 말했다.
청각장애인인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이론과 김다솔 씨는 청각장애학생을 가르치는 특수교사가 되고 싶다. 다솔 씨는 교사가 된다면 학생들에게 “겁먹지 말고 용기내서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이나 공부에 도전하라”, 그리고 “자기 자신을 많이 사랑해주라”는 말을 반드시 하고 싶다고 했다. 학생의 가능성을 발견하고, 한계를 규정하지 않는 건 진정한 교육이 나아가야 할 방향이다. 다솔 씨의 말에 귀 기울여야 하는 건 학생뿐만이 아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