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미 PD, 동트지 못한 진실을 깨우다

분쟁지역 전문 프로듀서 김영미 PD를 만나다
분쟁 지역에서 다큐멘터리 제작에 열심인 김영미 씨의 모습.

“나는 마음이 하고자 하는 일을 따를 뿐”

분쟁 지역에서 다큐멘터리 제작에 열심인 김영미 씨의 모습.

김영미 PD는 서른 살이 되던 해 동티모르 내전과 관련된 다큐멘터리 ‘동티모르의 푸른 전사’를 제작했다. 이후 10년 간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등의 국제 분쟁지역을 취재하며 국제적으로 명성을 쌓아왔다. 소말리아 해적에 나포되었던 동원호 사건을 취재한 ‘MBC 피디수첩’뿐만 아니라, ‘이라크 파병, 그 머나먼 길’, ‘파병, 100일간의 기록/자이툰 부대’, ‘아프간 취재 – 부르카를 벗는 여인들’도 그녀의 작품이다. 처음에는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이 프리랜서 피디가 하는 일이라는 것도 모른 채 취재를 시작했다는 그녀는 “저는 그냥 제가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시작했고, 지금도 하고 있는 것뿐이에요. 좋아하는 일을 할 때 열정도 생기고 운도 잘 따라와 결과물도 좋게 나온 거라고 생각하고요”라며 겸손하게 말문을 열었다.

아이를 기르는 엄마로서 평소에도 안전에 관심이 많다는 김영미 PD. 그녀는 “안전을 크게 보면 안보문제가 되죠. 가장들은 전쟁터에 나가고 여자들과 아이들, 노인들이 기다리는 집에서는 각종 문제들이 발생하고요. 결국 분쟁지역은 안전을 보장받아야 하는 사회적 약자가 모여 있는 곳이에요”라며 분쟁지역에 관심을 갖는 이유를 설명했다. 아무리 자기가 하고 싶은 일, 궁금한 일이라 하더라도 무작정 떠나기에는 분쟁지역은 너무 위험한 곳이 아닐까. 이에 김영미 PD는 “정부가 못 가게 한다고 해서 아무도 가지 않는다면 결국 진실을 아무도 알 수 없는 것 아니겠어요?”라며 담담하게 대답했다. 그녀의 용기에 감탄하는 기자에게 “용기는 구태여 내는 게 아니라 마음을 따라갈 때 자연히 따라오는 것”이라는 말을 덧붙이면서.

그녀의 취재는 한편의 ‘드라마’다.

그런 김영미 PD의 취재가 쉬울 리가 없다. 1년 중 8~9개월을 외국에서 생활해 가족·친지들과 떨어져 있는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알아내기 어려운 내용을 취재 하는 것이 PD의 일이기 때문이다. 그것도 서로를 강하게 불신하는 분쟁지역에서는 그 누구도 자신의 환경과 생활모습을 낯선 이에게 쉽게 털어놓지 않는다. “찾아가서 무작정 묻는다고 취재가 되진 않아요. 친구한테는 쉽게 이야기 할 수 있는 거 있죠? 그래서 먼저 전 취재원들과 마음을 나누려고 합니다. 같이 고민하고 이야기하다보면 그 사람도 저를 받아들이는 때가 오죠. 취재원을 찾는 것보다 친해지는 것이 더 시간이 걸릴 때가 많아요.” 김영미 PD는 자신이 취재원들을 완전히 이해하고 공감하고 나서야 카메라를 들기 시작한다. 가슴으로 느끼지 않으면 진실을 찾을 수도 없고 진실이 담겨있지 않으면 사람들이 공감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일부 언론인들은 공감하지 못하는 기사를 억지로 쓰며 ‘영혼이 팔린’ 기분이라고 하지만, 그녀는 친구인 그들을 위해서 차라리 ‘영혼을 팔아’ 돕고 싶단다.

그래도 이건 다행히 취재원을 구했을 때의 이야기다. 분쟁지역이라는 취재 지역의 특성상 취재처의 소재도, 존재도 불확실하기 때문이다. 그녀는 “사람들은 운이 좋아서 좋은 화면을 찍는다고 생각하는데, 그 뒤편에는 꼭 수많은 실패가 있다”며 현실적인 어려움을 토로했다. 그렇다면 실패를 극복할 수 있는 힘은 무엇일까. “전 힘들어도 포기는 절대로 안 해요. 아무리 실패를 해도 그 실패가 쌓여서 성공이 된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알고 있거든요. 지루한 기다림이 있을 수도 있고 나 자신에 대한 회의가 생길 수도 있지만, 그래서 절대로 주눅 들지 않고, 자만하지도 않고 기다리는 겁니다. 이제는 아예 ‘에이, 언제 내 취재가 쉬웠던 적이 있었어? 어려운 게 정상이지’ 하며 스스로를 격려해요.(웃음)”

직접 현장에서 취재를 하는 김영미 PD의 모습.

그래선지 김영미 PD의 작품들은 뛰어난 현장성과 작품성을 인정받고 그동안 여러 상을 받았다. 2002년에는 ‘부르카를 벗는 여인들’로 여성인권 디딤돌 상을 수상했고 2004년에 ‘파병, 100일간의 기록’으로 MBC 방송대상 공로상을 수상했다. 그녀는 자신의 작품이 시청자들에게 쉽게 다가가기를 기대한다고. 안보의 문제는 소위 ‘배운 사람들’만 이해하는 딴 세상 문제가 되어버리기 쉽다.

TV라는 매체가 보여주는 특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김영미 PD의 취재는 이웃의 일상을 보여주는 것에 집중된다. 분쟁지역을 그냥 찍으면 거시적인 안보문제가 되어 어렵게 느껴지지만 분쟁지역의 사람들을 찍으면 우리 이웃들의 안전 문제가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시골의 할머니, 할아버지까지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려 노력한다. 가끔씩 나이든 사람들이나 아이들과 함께 TV를 보면서 그들의 사고방식을 엿보는 것도 김영미 PD의 제작 노하우 중 하나다.

더 자유롭게 말할 수 있는 권리를 찾아서

그녀의 이야기는 여기에서 멈추지 않는다. 2006년 동원호-소말리아 나포 사건의 취재 내용을 바탕으로 당시 동원호의 조선족 선원인 김홍길 씨와 이라는 책을 낸 것. 그녀는 외교부의 늑장대처로 하루하루를 죽지 못하고 버텨온 그들이 대한민국의 사과를 받아들일 수 있게 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이 책의 수입금 전액을 동원호 선원의 자녀의 학비로 쓰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북하우스, 2007) 나포됐던 동원호의 조선족 선원인 김홍길 씨의 일기를 토대로 쓴 책이다. 117일 동안 물질적, 정신적으로 고통을 받았던 선원들의 끔찍한 경험뿐만 아니라 김영미 PD와 외교부의 마찰과 귀국 후의 모습을 그렸다. 김영미 PD의 다큐멘터리에서 미처 말하지 못한 동원호 취재의 어려움과 동원호 선원들의 생생한 진술을 볼 수 있다. 단순히 납치, 억류, 그리고 귀국을 실상의 전부로 파악하고 있는 국민들에게 내면의 진실을 알리며, 외교부와의 마찰을 그려 한국의 저널리즘에 대한 비판까지 엿볼 수 있다.

그런데 김영미 PD의 열정적인 취재는 얼마 전 난초를 만났다. 지난 9월 정부에서 지정한 여행금지국인 이라크에서 취재를 했다는 이유로 여권법 위반으로 고발된 것이다. 김 씨는 ‘저널리스트의 취재마저 막아놓은 현행 여권법은 국민의 알 권리를 침해하는 것’이라며 위헌 소송을 냈고, 지금은 검찰에서 기소 유예판결을 받은 상태다. 기자의 조심스러운 질문에 김영미 PD는 ‘자신이 법을 위반했다는 사실을 부정하지는 않는다’며 그녀의 위법을 인정했지만, 저널리즘을 그런 식으로 밖에 받아들이지 못하는 한국의 현실을 뛰어넘고 싶었다고 답했다. “그 법이 잘못됐다는 문제제기가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문제제기가 계속 되면 그 법이 수정될 수 있고, 결국 말할 수 있는 권리를 되찾을 수 있기 때문에 가치가 있는 것이고요.”

김영미 PD와 외교부의 마찰은 그 이전에도 있었다. 동원호 사건을 취재해 제작한 그녀의 다큐멘터리가 MBC를 통해 방영되었을 때, 외교부는 MBC에 ‘일개 프리랜서 김영미 PD의 검증되지 않은 취재내용을 보도하는 것은 MBC의 사회적 책임과 영향력이 비춰 적절치 않다’는 공문을 보낸 것이다. 불쾌한 기억일 거라는 기자의 예상과는 다르게 김 씨는 오히려 유쾌한 기억이라고 답했다. 외교부가 얼마나 급했으면 누가 보기에도 말도 안 되는 단어를 썼겠냐고. “외교부가 가진 카드가 이거 밖에 없구나 싶었어요. 오히려 안심이 되고 제 취재에 용기를 가지게 됐고요. 그 일로 인해 ‘독립 프리랜서 PD 협회’도 생겨났는걸요. 오히려 제가 고마워해야 하는 거 아닐까요?(웃음)” 누군가에게는 상처가 되거나 좌절이 될 수 있는 상황을 긍정적으로 반전시키는 그녀의 낙천성이 김영미 PD의 삶의 원동력이 아닐까.

‘내 카메라가 세상을 바꿀 수 있다.’

현장에서의 김영미 PD의 모습은 사뭇 더 진지하다.

마지막으로 독자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냐는 기자의 질문에 김영미 PD는 자신이 진짜 하고 싶은 일을 찾아 하기를 당부했다. 30세에 비로소 내가 할 때 행복한 일을 찾았다는 그녀는 “인생을 짧은 몇 년 안에 다 결정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인간의 능력은 무궁하고, 인생도 너무나 긴데 벌써 다 탐방해 보았다고 자신할 수 있나요? 요즘 대학생들의 직업선택은 ‘내’가 아닌 ‘다른 것’들에 의해 결정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아요. 그런 건 너무 불행한 거고요. 우리는 순수하게 자신만을 바라보는 시간을 갖는 게 필요해요.”

‘내 카메라가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믿음으로 세계적인 저널리스트가 되고 싶다는 김영미 PD. 피디 일을 처음 시작할 때, 주변사람들은 “몸도 힘들고 경제적으로 힘든 이 일을 하면 얼마나 하겠냐”며 김씨를 만류했다. 하지만 ‘꿈속에서까지 카메라를 들고 무언가를 찍으며 사람을 만난다’는 김영미 PD는 일을 처음 시작했던 30세 때와 10년이 지나 40세인 지금의 마음가짐이 똑같아 자신도 신기할 정도라고.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의 편이 될 수 있는 일이라 저는 평생 행복할 것 같다”는 그녀야말로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업으로 하는 ‘최고의 직업’을 가진 사람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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