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0월, 학내 게시판들이 대자보로 뒤덮였다. 「인권헌장」‧「대학원생 인권지침」 제정(안) 논의가 본격화되자 반대 측이 게시한 대자보들이었다. 이들은 ‘성적 지향 및 성별 정체성’ 을 차별 금지 사유로 규정한 인권헌장 제3조(차별금지와 평등권)에 반발했다. 온라인으로 개최된 ‘서울대학교 「인권헌장」‧「대학원생 인권지침」 제정(안)에 관한 공청회(공청회)’에서는 성소수자 들을 향한 혐오 댓글이 쏟아지기도 했다. 이에 맞서 인권헌장 제정을 지지하는 대자보들도 연이어 게시되며 이른바 ‘대자보 전쟁’이 벌어졌다. 인권헌장 제3조가 대체 어떤 내용을 담고 있길래 이토록 심한 반대가 잇따랐던 것일까.
제3조 전문을 살펴보자. 제3조 1항에서는 다음과 같이 명시하고 있다.
“서울대학교 구성원은 성별, 국적, 인종, 장애, 출신 지역과 학교, 연령, 종교, 임신과 출산, 정치적 의견, 성적 지향 및 성별 정체성, 사회·경제적 배경 등을 이유로 차별받지 않을 권리가 있다.”
인권헌장 연구 총책임자인 송지우 교수(정치외교학부)는 성적 지향과 성별 정체성에 따른 차별의 금지는 “인권존중 문화가 정착된 다수 국가의 대학에서 이미 당연하게 여겨지는 원칙”이라며 “인 권헌장은 국제적으로 누적형성된 표준을 요약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송 교수는 미국을 예시로 들며 “하버드 대학 등 주요 대학이 성적 지향과 성별 정체성에 대한 차별 금지를 명시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차별 금지 조항에 대한 반대, 5년 전에도 있었다
학내에서 성소수자에 대한 차별 금지 규정을 두고 갑론을박이 오간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2016년 제정 논의가 이뤄졌던 인권 가이드라인(가이드라인)에도 같은 취지의 조항이 있었다. 가이 드라인 제2조는 ‘서울대학교 구성원은 각자의 권리 실현 및 보장에 있어 생물학적 성별, 성적 지향, 성별 정체성 등을 포함한 불합리한 이유로 차별받지 아니한다’고 규정하고 있었다. 당시 총학생회는 인권센터 차원에서 논의가 중단됐던 가이드라인 제정안을 적극 추진했고, 학생들 손에서 다시 태어난 가이드라인은 같은 해 9월 전체학생대표자회의(전학대회)에서 채택됐다.
그런데 가이드라인이 전학대회를 통과하자 반대의 목소리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성적 지향과 성별 정체성을 차별 금지 사유로 명시한 제2조를 받아들일 수 없다는 이유였다. 당시 전학대 회에서는 ‘서울대기독교연합’ 측 대표 학생이 반대 발언을 했고, 전학대회 직후 ‘서울대 기독교수 협의회’와 ‘기독교총동문회’ 측은 가이드라인 제정에 반대하는 ‘서울대 베리타스 포럼’을 개최해 ‘동성애를 옹호하는 인권 가이드라인에 문제가 많다’는 의견을 표출했다.
곧이어 가이드라인에 반대하는 첫 대자보가 게시됐다. ‘서울대 인권가이드라인 반대학생연대 Say No(세이노)’는 대자보를 통해 차별 금지 규정이 ‘동성애에 대한 자유로운 도덕적 판단, 비판 및 토론을 위축시켜 표현의 자유를 침해한다’고 주장하며 총학생회의 즉각적인 제정 절차 중단을 요구했다. 세이노는 이어서 네 차례 대자보를 추가로 게시하면서 가이드라인 제정에 반대 목소리를 높였다.
한편 가이드라인 반대 대자보가 등장하자 이를 규탄하고 가이드라인 제정을 촉구하는 찬성 대자보 역시 곳곳에 게시됐다. 관악 여성주의 학회 ‘달’은 학내 기독교 단체들이 주최한 베리타스 포럼을 규탄하며 ‘다른 이의 존엄을 훼손하는 것은 결코 표현의 자유도 양심의 자유도 아니다’고 꼬집었다. 서울대학교 성소수자 동아리인 Queer In SNU(QIS, 큐이즈)는 ‘세이노가 주장하는 표현의 자유는 혐오일 뿐’이며 ‘누구에게도 타인을 혐오하고 차별할 권리는 없다’고 반대 대자보의 주장을 정면 반박하면서 연대 자보 릴레이를 이어 나갔다.
반년 동안 가이드라인 제정을 강력하게 추진했던 총학생회 역시 반대 의견을 무릅쓰고 가이드 라인 제정을 완수하겠다는 기존의 태도를 견지했다. 김민석 당시 부총학생회장은 가이드라인 제정안이 전학대회에서 만장일치로 인준된 사안임을 강조했다. 그는 “논의 과정에서 어떤 공식적인 통로로도 의견 개진이 없다가 전학대회 의결을 앞두고서야 서울대기독교연합 측 대표 학생으로부터 반대발언이 나왔다”며 가이드라인이 추진되는 과정에서 의견을 좁힐 기회 자체가 없었다고 밝혔다. 김 전 부총학생회장은 그마저도 공식적인 의견개진이 아니라 참관인을 통해 이뤄졌다고 지적했다. 가이드라인이 전학대회를 통과하고 난 후에 제기된 반대 의견에 대해서도 김보미 당시 총학생회장은 “누군가를 차별하기 위해 가이드라인이 수정되는 것은 수용하기 어렵다”고 확고한 입장을 표명했다.
총학생회를 비롯한 많은 학내 단체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인권 가이드라인은 이후 평의원회 심의에서 부결되면서 결국 공식 규범으로 채택되지 못했다. 당시 평의원회에 참관인으로 참석했던 김보미 전 총학생회장은 “일부 교수들이 기독교 교리를 앞세워 평의원회뿐 아니라 이후 연구 발표회 등에서도 계속 논의를 방해했다”고 당시 상황을 떠올렸다. 그는 “이들이 전체 학생 및 교직원에 대한 회람이나 동의를 받지 않아 가이드라인을 공동체 전체에서 공유된 규범으로 볼 수없다는 등의 이유를 들었지만, 결국엔 학내 성소수자의 존재를 지우려는 의도였을 뿐”이라고 비판 했다.
5년 후, 그대로 되풀이된 논란
가이드라인이 무산된 지 4년이 지난 작년 1월, 인권센터를 주축으로 진행된 ‘인권규범 제정에 관한 연구’를 거쳐 인권헌장(안)이 발표됐다. 가이드라인의 연장선으로도 볼 수 있는 인권헌장은 공표와 함께 논란에 휩싸였다. 5년 전과 마찬가지로 차별 금지 조항이 화두에 올랐다.
인권헌장 제정 논의가 본격화되자 이번에도 대자보 전쟁이 벌어졌다. ‘진정한 인권을 위한 서울 대인 연대(진인서)’는 대자보를 통해 차별금지 규정이 ‘부도덕한 성행위에 대한 비판의 자유를 박탈한다’며 인권헌장 제정을 반대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진인서 김은구 대표는 “차별 금지 사유에 성적 지향과 성별 정체성을 포함하는 것은 젠더 이데올로기를 권력기관이 일방적으로 강제하는 것과 같다”며 “가치판단과 의사표현을 규제하고 이에 대한 불이익 처분을 정당화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큐이즈는 이번에도 대자보를 게시하고 진인서를 규탄했다. 큐이즈는 ‘차별을 금지하면 표현의 자유가 없어진다’는 반대 논리를 강하게 비판하며 ‘혐오’ 표현은 결코 ‘권리’의 표현이 될 수 없다고 반박했다. 큐이즈는 “인권헌장은 서울대학교를 구성하는 모두가 안전하게 자신으로서 살아갈수 있는 기본적인 권리를 보장하고자 하는 최소한의 발악”이라며 인권헌장의 신속한 제정을 촉구 했다.

‘인권헌장 학생추진위원회(학추위)’를 중심으로 인권헌장 지지 서명운동인 ‘인권열차’ 사업이 진행되기도 했다. 학추위 권소원 위원장은 차별 금지 조항에 대해 “차별받지 않을, 가해받지 않을 최소한의 권리는 신념의 문제가 아니며 특정 구성원의 기호와 별개로 모든 이들은 자신의 존재에 있어 존중받고 보호받아야 한다”고 전하며 ”안전하고 평등하며 자유로운 학문 공동체로서의 서울 대학교를 위해서 꼭 필요한 조항”이라고 강조했다.
논의가 차별 금지 조항에만 머무르면서 인권헌장의 보다 포괄적인 내용에 대한 토론이 이뤄지지 못했다는 지적도 있었다. 인권법학회 김민주(법학전문대학원) 씨는 ‘인권헌장과 대학원생 인권 지침 제정(안)에 관한 공청회’에 참석해 “소수자와 약자를 위해 많은 토론이 이뤄질 수 있었음에 도, 성적 지향 및 성별정체성 관련 원칙 하나에 대해서만 찬반 토론이 이뤄지고 있다며”며 공청회가 공론장으로서 역할을 다하지 못한 부분에 대해 아쉬움을 내비쳤다. 이를 두고 큐이즈는 “그만큼 성소수자의 인권이 학내에서 보장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을 반증하는 것”이라며 인권헌장 관련 논의가 성소수자 의제 중심으로 흘러갈 수밖에 없었던 현실을 꼬집었다.
인권헌장을 둘러싼 논쟁은 5년 전과 닮아 있다. 가이드라인이 추진되던 당시와 마찬가지로 인권헌장에 반대하는 목소리 역시 차별 금지 조항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5년 전에 가이드라인에 반대하기 위해 세이노가 결성됐다면 지금은 진인서가 인권헌장 반대에 앞장서고 있다. 적지 않은 시간이 흘렀지만 성소수자들의 존재를 거부하는 목소리가 계속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이에 김보미 전 총학생회장은 “5년 전과 똑같은 방식으로 성소수자를 공동체에서 배제하자는 혐오의 목소 리가 인권규범의 제정을 가로막고 있다”며 안타까움을 표했다. 인권헌장(안)이 다가올 평의원회 심의를 통과하지 못한다면 5년 전과 같은 결말을 맞게 된다. 인권헌장이 반대의 목소리를 이기지 못하고 지난번처럼 무산될지, 아니면 그 제정 목적대로 ‘모두에게 더 나은 공동체’를 만들기 위한첫 단추가 될 수 있을지 귀추가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