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창작자가 말하는 오늘은 오늘들이 되어 비로소 공명한다. 우리에게 주어진 오늘의 문을 열어젖히고 또 다른 문을 두드리며 기존의 가정을 무너뜨리는 다른 차원으로 넘어간다. 오늘의 여성 창작자들은 미래에 대한 건강한 확신이 필요하다. 우리는 오늘 밖으로 나선다.”
– 이도현, 전시 『오늘들』 서문 ‘서로의 목소리를 두드려’ 中

여기, 오늘 밖으로 나서는 여성 예술가들이 있다. 시각예술분야 여성예술가 네트워크인 ‘루이즈 더 우먼’은 2020년 8월 결성됐다. 현재는 평면·입체·사진·영상·일러스트 등 다양한 분야의 여성 예술가 45명이 소속돼 활동 중이다. 이들은 국내외의 물리적 제약을 넘어 여성 예술가들이 연결되고 소통할 수 있는 방식을 모색한다. 1기 전시 『오늘들』(2.19~27)을 통해 그들의 오늘과 미래를 세상에 내보인 루이즈 더 우먼의 이정, 이도현, 유지영 작가를 만나 여성 예술가들의 작업과 연대의 경험에 대해 들어봤다.
공통된 갈증과 열망으로부터
루이즈 더 우먼은 서로에게 가닿고자 하는 여성 예술가들의 공통적인 갈망 속에서 탄생했다. 2016년 ‘#예술계_내_성폭력’ 해시태그 운동 이후 여성 예술인들의 활발한 운동이 이뤄지며 연대가 싹텄지만, 가해자로 지목된 이들은 여전히 예술계에 굳건히 남아있다. 여성 예술가들에게는 마음껏 예술 활동을 펼칠 기회와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창구가 필요했다. 지난해부터 시작된 코로나19 대유행과 사회적 거리두기 때문에 여성 예술인들이 결집할 수 있는 온·오프라인 플랫폼의 필요성은 더욱 커졌다.
루이즈 더 우먼의 핵심 창립 멤버인 유지영 작가는 “지난해 영국에서 지내느라 거리감을 훨씬 크게 느꼈다”며 “여성 예술인들끼리 작업에 관해 소통할 수 있는 창구가 절실했다”고 말했다. 유 작가가 루이즈 더 우먼 결성에 참여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무엇일까. 그는 지난해 참여했던 한 출판 프로젝트에서 미투 가해자로 지목된 작가들에 대해 시정 조치를 요구했다. “공동체의 책임을 여성 개인이 떠맡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에 동료 작가들과 여성 네트워크를 만들자고 결정하게 됐다”고 유 작가는 전했다.
비대면 상황이 계속되자 지난해 이정 작가는 여성 작가들끼리 편지를 이용해 소통해보자고 제안했다. 이민경 작가의 메일링 프로젝트 ‘코로나 시대의 사랑’의 영향을 받아 이뤄진 제안이었다. 이 작가는 “용기 내서 보낸 편지에 답을 받으면서 밀도 높은 아이디어를 교류했고, 여성 네트워크에 대한 갈증이 모두에게 있다는 걸 알게 됐다”고 말했다. 이 작가는 편지를 나누던 작가들과 함께 루이즈 더 우먼 초기 멤버가 됐다.
이도현 작가는 대학에서 학보사 기자로 활동하는 등 꾸준히 여성인권 문제에 관한 목소리를 내왔다. 자신의 삶을 변화시킬 수 있는 실질적인 활동을 하고 싶다는 생각에 루이즈 더 우먼에 참여했다. 이 작가는 기자 시절 여성 디자이너 네트워크인 ‘FDSC(Feminist Designer Social Club)’와 만났던 경험을 전했다. “‘시각예술계 내에서도 하면 된다’는 말을 들었을 때 큰 자극을 받았다. 본보기가 되는 여성들이 있고, 저도 그 본보기가 되고 싶었다.”

여성 예술가들, 새로운 ‘판’을 짜다
루이즈 더 우먼의 목표는 여성주의적 실천과 창작자로서의 작업의 양립이다. 이정 작가는 “미술 작업만 잘하면 작가로 성공할 수 있다는 말은 여성 예술가에겐 결코 사실이 아니다. 여성주의적 발화를 하는 것과 예술인으로서 커리어를 지속하는 일은 서로 상충된다”고 말했다. 그는 여성주의 색채를 드러낸 작가에게 부정적이고 납작한 시선이 뒤따른다고도 덧붙였다. 성폭력 피해를 호소하거나 그 옆에서 연대하던 여성 작가들이 예술계 내에서 고립되기도 한다. 루이즈 더 우먼은 여성 예술가가 공적으로 발화할 수 있는 창구를 만들면서도 여성주의 활동으로 소모되지 않고 작업을 지속할 수 있는 토대를 만들고자 한다.
루이즈 더 우먼은 수평적인 예술 활동 네트워크를 지향한다. 상호 신뢰와 애정을 바탕으로 참여자들은 작업에 대해 터놓고 이야기하며 서로의 시각을 공유한다. 작업에 관해 이야기하다 새로운 아이디어가 나오는 등 소속 작가들 간의 협업 기회가 만들어지기도 한다. 이정 작가는 “플랫폼 안팎으로 작업의 기회를 넓히는 선순환 구조”라고 말한다. 이도현 작가는 “여성 예술가들이 새롭게 짠 판이 작가들의 성장을 위한 자양분이 되고 있다”고 강조했다.
루이즈 더 우먼은 네트위크 외부의 여성 예술인들과도 손을 잡는다. ‘여성 커뮤니티 밋업’이 대표적이다. 밋업 참여자들은 여성 건축인 모임인 ‘SOFA(Society of Feminist Architects)’, 여성 영상인 네트워크 ‘FFF(Feminist Filmmakers Forever)’와 함께 활동에 대해 나눈 이야기를 온라인 네트워크 채널 ‘노션(notion)’에 게재했다. 이도현 작가는 “외부와의 연결고리는 새로운 발전의 가능성, 여성 연대의 가능성을 보여준다”며 협업과 교류에 대한 기대감을 내비쳤다. 유지영 작가는 “여성 단체 운영에 대한 노하우나 위기 시에 필요한 대책과 같은 정보 교류도 이뤄진다”고 덧붙였다.
함께한다는 것은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것
루이즈 더 우먼에서의 활동은 여성 작가들에게 어떤 변화를 가져다 줬을까. 이정 작가는 “각기 다른 작품 세계와 결을 가진 사람들과 함께하다 보니 나의 작품을 보는 시각도 바뀌었다”고 말했다. 그는 네트워크 안에서 자신감과 용기, 스스로에 대한 확신을 얻기도 했다.
소속 작가들은 동료들에게서 에너지를 받기도 한다. 유지영 작가는 작업에 대한 이야기와 여성 문제에 대한 고민을 나눌 수 있는 동료들이 많아져 든든하다고 말했다. 유 작가에게 서로 애정 어린 지지를 나누는 동료들이야말로 활동을 이끄는 동력이다. 이정 작가 역시 “여성이 여성에게 좋음을 가감 없이 표현했을 때 새로운 에너지가 생긴다는 걸 느꼈다”며 “동료들과 어떤 점이 좋았는지, 무엇을 같이 해보고 싶은지 솔직하게 공유했기에 활동이 계속 이어질 수 있었다”고 웃음 지었다.
좋아하는 마음을 주고받는 일에는 경계가 없다. 이정 작가는 뉴욕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시각 예술 작가 에이미 실먼(Amy Sillman)에게 메일을 보냈다가, 기대하지 않았던 화답을 받고 함께 아티스트 토크를 진행하기도 했다. 실먼은 70년대 페미니즘 미술 운동에 활발히 참여했던 작가로, 이후로도 폭넓은 창작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이 작가는 세대와 국적과 활동 시기가 모두 다른, 언뜻 보면 아무런 접점이 없는 작가를 만나 함께 이야기를 나눈 것이 매우 인상적이었다고 전했다.
예술가이자 대학생인 이도현 작가에게 루이즈 더 우먼은 발화하는 주체로서 자신을 인식하는 계기였다. 학생 신분의 어린 예술가의 목소리는 쉽게 가려지곤 했다. 이 작가는 이처럼 주목받지 못했던 억눌린 목소리가 터져 나올 때 가지는 힘에 주목한다. 그는 “활동 이전에는 신문사처럼 나를 받아줄 수 있는 곳을 찾아 헤맸지만, 지금은 내가 주체로 행동하고 있다”고 말했다. 또한 그에겐 함께하는 것만으로 무엇이든 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 큰 변화였다. 루이즈 더 우먼의 여성 예술가들은 함께함으로써 할 수 있다는 확신과 미래에 대한 믿음을 갖게 됐다.
바람은 계속해서 불 것이다
『오늘들』은 루이즈 더 우먼 소속 35명의 여성 창작자가 참여한 대형 전시다. ‘여성 창작자가 말하는 지금, 여기’에 주목하며 작가들이 함께 해 온 과정을 보여준다. 일반적으로 전시는 작업 결과물을 보여주는 자리지만, 『오늘들』은 작품이 나오기까지 어떤 창작 과정을 거쳤는지와 창작자들이 서로 어떻게 소통했는지를 모두 드러낸다. 작가들의 작업 과정은 전시장 내부에 마련된 태블릿PC로 볼 수 있도록 노션에 게시됐다. 루이즈 더 우먼은 비대면이 ‘뉴노멀’이 된 코로나 시대에 여성 창작자들의 공존 방식을 모색해왔고, 온라인 플랫폼을 이용한 여성 창작자들의 교류를 하나의 방안으로 제시한다.


루이즈 더 우먼에게 이번 전시 개최는 “정치적인 제스처”이기도 했다. 미술계에서는 전시의 영향력이 가장 크기 때문이다. 이도현 작가는 이번 전시를 통해 “기존의 제한적인 창작 환경에 대한 예술계 커뮤니티의 대안적 모델을 시도했다”고 평했다. 세 작가는 전시가 뜨거운 반응을 얻고 있다는 점을 언급하며 루이즈 더 우먼의 시도를 토대로 “또 다른 재밌는 발상이 이어지기를 바란다”며 기대감을 보였다.
다양한 지역에서 각양각색의 활동을 펼치는 루이즈 더 우먼 소속 작가들은 네트워크를 통해 하나로 연결된다. “변화는 개인을 관통해 공통의 경험으로 응집할 때 비로소 이뤄진다”는 이들의 말은 서로의 세계를 경유해 함께 성장하려는 움직임을 가리킨다. 이정 작가는 “우리가 얼마나 다른지 알아갈수록 서로 더욱더 긴밀하게 연결되고 가까워질 수 있다”고 말하며 루이즈 더 우먼 안팎에서 경험하는 여성들 간의 교류를 관객들에게 전달하고 싶다는 바람을 표했다.
『오늘들』의 전시 서문은 ‘바람이 불 것이다’라는 말로 시작한다. 1기 활동을 마무리한 루이즈 더 우먼은 현재 2기 멤버를 모집 중이다. 루이즈 더 우먼의 ‘오늘들’에는 오늘을 넘어서는 가능성이 있다. 이들의 시도가 이미 시작된 변화에 더 큰 바람을 몰고 올 것이라 기대해 봐도 좋지 않을까. 이도현 작가는 말한다.“시간은 우리의 편”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