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산을 넘어 “다양성이 공존하는 공동의 세계”로

남산예술센터 폐관 이후, 다시 꿈꾸는 공공극장의 미래
▲남산예술센터 ⓒ유튜브 빠-이 빠-이 남산 캡쳐

▲남산예술센터 ⓒ유튜브 빠-이 빠-이 남산 캡쳐

  “남산예술센터는 그 자체로서 이야기하는 극장이었다.” 1962년에 세워진 후 2009년부터 공공극장으로 운영된 남산예술센터는 서울시민의 정든 극장이었다. 동시대의 연극적 언어를 탐구해온 남산예술센터는 지난해 마지막 작품인 ‘휴먼 푸가’를 끝으로 문을 닫았다. 남산예술센터는 왜 허무한 끝을 맞이할 수밖에 없었을까. 남산예술센터의 폐관은 무엇을 의미할까. 닫혀버린 극장의 문은 공공극장이 우리 사회에 어떻게 자리할 수 있을지 질문한다. 그 물음을 따라가 봤다.

예정된, 그러나 막지 못한 폐관

  남산예술센터는 한국 최초의 현대식 극장으로, 처음엔 ‘드라마센터’란 이름으로 개관했다. 극장으로서의 운영은 길지 못했다. 드라마센터는 연구기관이나 서울예술대학(서울예대)의 부속 공연장으로 운영돼오다 2009년 공공극장으로 재개관했다. 서울예대 학교법인인 동랑예술원과 서울시가 장기 임대계약을 맺어 서울시 산하 서울문화재단이 위탁 운영하게 된 것이다. 서울예대와 서울시의 계약은 2009년부터 3년마다 갱신돼왔다. 그러나 2018년 초 서울예대가 서울시 측에 문화사업계약을 끝내겠다는 의사를 밝혔고, 계약 만기 시점인 2020년 서울시가 계약 해지 공문을 보내면서 남산예술센터는 끝내 문을 닫았다. 

  연극계는 2018년 서울예대의 계약종료 통보 이후 ‘공공극장으로서의 드라마센터 정상화를 위한 연극인 비상대책회의(공공정비)’를 발족했다. 공공정비는 남산예술센터의 역사에 관한 학술 연구를 진행하고, 공개토론회를 통해 의견을 수렴하는 등 동랑예술원의 드라마센터 사유화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냈다. 공공정비는 서울예대·연극계·서울시의 3자 협상을 꾸준히 요구했지만, 서울시는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공공정비는 “서울시가 협상 시한을 지난해 7월 말까지 연장했다가 박원순 시장의 사망 이후 임대차 계약 종료를 쉽게 결정해버렸다”고 지적했다. 

  서울시 측은 서울예대와 연극계의 합의점을 찾을 수 없어 계약을 종료했다는 입장이다. <서울대저널>과의 전화에서 서울시 관계자는 “시가 지금까지 양측의 입장 조율을 중개해 왔는데, 연극계는 극장의 사회 환원을 요구하는 반면 서울예대는 임대료 동결 또는 인상을 요구했다”며 양측의 입장이 조율되지 않아 최종 합의를 내지 못했다고 밝혔다.

드라마센터는 원래부터 공공극장이었다?

  남산예술센터 폐관 문제의 중심에는 사유화 논란이 있다. 설립 당시 드라마센터는 공공의 목적으로 활용하겠다며 국가로부터 특혜를 받아 세워졌다. 공공정비에 따르면, 드라마센터 설립 당시 설립자 유치진 씨는 ‘한국 연극의 발전’에 일조하는 극장을 목표로 내걸며 국유지였던 드라마센터 부지를 불하받고, 록펠러 재단으로부터 거액을 지원받았다. 공공정비는 “당시 유치진이 ‘공익적 문화기관’으로서 드라마센터의 공공성을 계속해서 강조했다”고 말했다. 

▲남산예술센터 내부 ⓒ원지영

  막상 드라마센터가 설립되자 상황은 뒤바뀐다. 유치진 씨는 드라마센터를 자신이 설립한 서울예대에 기증하며 사학재단의 형태로 사유화했다. 공공정비는 공공의 지원을 받아 세워진 드라마센터가 유 씨의 개인 자산으로 귀속돼 사익 추구 수단으로 변질됐다고 지적한다. 이를 이유로 공공정비는 동랑예술원에 매년 10억 원의 임대료를 지불하는 것이 부당하다고 주장해왔다.

  남산예술센터에는 반세기가 넘는 시간 동안 축적된 복잡한 역사가 있다. 유치진 씨는 해방 이후 남한 정부의 상징적인 연극인이었다. 김민조 평론가에 따르면, 유 씨가 공공재를 사유화하고 권력을 계속 행사할 수 있었던 것은 냉전 구도 하 박정희 정권의 적극적인 지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2009년 서울시가 남산예술센터를 공공극장으로 전환해 운영하기 시작했을 때, 역사적인 맥락을 파고들지 못한 것이 해결을 어렵게 만들었다”고 김 평론가는 설명한다. 애초에 드라마센터를 상속된 사유재산이라 볼 수 있는지, 조기에 첨예하게 다루고 따져 묻지 못했다는 의미다.

  숱한 논란에도 결국 공공극장으로의 전환은 이뤄지지 못했다. 남산예술센터는 법적으로 동랑예술원의 재산이기 때문에 조치를 취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최윤우 평론가는 “사유재산으로 귀속된 남산예술센터의 법적 지위를 해결할 수 없는 상황에서 대안 마련은 쉽지 않다”고 지적했다. 뾰족한 수가 없던 건 맞지만, 당사자인 서울예대와 서울시가 사유화 문제를 적극적으로 검토했어야 한다는 반응도 있다. 강훈구 연출가는 “최소한 공공정비 측에서 지적했던 사유화 문제를 서울시와 서울예대가 같이 확인하는 절차가 필요했다”며 아쉬움을 표했다.

  폐관을 막을 수 없었던 또 다른 이유는 관련 기관의 무관심이었다. 김옥란 평론가는 “서울시에 면담을 요청하는 과정에서 이 오래된 공공극장을 둘러싼 문제에 서울시가 일말의 관심이 없다는 것을 확인했다”며 서울시의 미온한 대처를 비판했다. 연극인들은 서울시가 극장을 임대 가능한 부동산 이상으로 보지 않고 있다고 지적한다. 이양구 극작가는 “연극인들에게 남산은 역사·사회·예술적 가치가 응축된 공간이지만 시나 정부, 서울예대에게는 그저 부동산일 뿐”이라며 극장을 교환 가치로만 봐선 안 된다고 강조했다.

남산이란 공간, 그 역사와 사람들

  2009년부터 공공극장으로 역할했던 남산은 연극인들에게 어떤 의미였을까. 최윤우 평론가는 “남산예술센터는 일반적인 공공극장에서 수행하기 쉽지 않은 실험적인 연극들을 선보였다”며 “동시대의 창작연극을 실험하고 시도하는 장”이었다고 평가했다. 남산예술센터는 새로운 창작자들을 발굴하고 육성할 뿐 아니라, 자기 세계를 만들어 가려는 연극인들에게 기회를 열어주기도 했다. 강훈구 연출가는 남산예술센터를 떠올리며 “신진연극인이나 아이디어가 넘치는 연극인들이 극을 올릴 수 있는 극장, 경험이 없는 예술가가 공연할 수 있는 극장이었다”고 말했다. 예술가와 함께 새로운 공연을 제작해 나가는 ‘제작 전용 극장’으로서의 의미도 가졌던 것이다.

  남산예술센터는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사건 당시 예술가들의 표현의 자유를 보호하며 연극인들 사이에서 더없이 소중한 의미를 갖게 됐다. 다수의 국공립극장에서 검열이 진행될 때, 남산예술센터는 블랙리스트에 오른 예술가들의 작품을 무대에 올렸다. 김옥란 평론가는 남산예술센터가 “중요한 시기에 독립적·자율적인 공간으로 남아 ‘공공성’ 의미의 장을 넓혔다”고 설명했다. 

▲ⓒ유튜브 빠-이 빠-이 남산 캡쳐

  남산예술센터는 세월호 참사와 검열, 성폭력, 소수자 등을 비롯해 시대가 요구하는 다양한 주제들을 과감하게 선보이기도 했다. 강훈구 연출가는 “지금 일어나고 있는 사안들에 첨예한 관심을 가졌고, 성소수자와 장애인에게 평등한 극장이 되기 위해 노력했다”며 남산예술센터가 동시대성을 반영해왔다고 말했다. 이는 시대의 흐름에 부응하고자 했던 남산예술센터 구성원들의 감수성 어린 노력과, 재단으로부터의 독립적인 운영 덕분에 가능했다. 최윤우 평론가는 남산예술센터를 향한 연극계 전체의 많은 관심 역시 극장 운영에 많은 힘이 됐다고 말했다.

  연극계는 남산예술센터 존속을 오래도록 주장해왔다. 김옥란 평론가는 “이미 역사가 쌓인 소중한 공간을 빼앗길 수 없다고 생각했다”는 심정을 밝혔다. 많은 연극인이 3차에 걸쳐 서명 운동을 벌였지만 결정적 순간에 통일된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는 아쉬움도 남았다. 이양구 극작가는 “극장을 상실한 아픔은 다들 같지만, 한 해에 올리는 작품 수가 적고 엄선된 큐레이션을 하다 보니 어떤 이들에게는 ‘내가 설 수 없는 무대’라는 인식도 있었다”고 설명했다. 다만 이 같은 온도차는 공공극장 수가 적어 일어난 일이라는 지적도 나왔다. 강훈구 연출가는 “남산예술센터와 같은 공공극장을 더 많이 설립해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말했다.

  남산예술센터의 폐관은 곧 한 역사를 가진 공공극장의 상실을 의미한다. 남산예술센터가 문을 닫게 된 원인은 공공극장에 대한 관심과 논의 부족이라는 것이 연극인들의 공통된 지적이다. 최윤우 평론가는 극장을 공공자산으로 새롭게 사유할 것을 요구하며 “사회문화적 공공재로서의 극장을 고민해야 한다”고 말했다. 공공극장이 임대계약 문제로 무력하게 사라지는 현실은 창작자와 직원, 관객들이 극장이라는 열린 공간의 주인이 아니라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양구 극작가는 “소유권이 없으면 전혀 구성원으로 대우받지 못하는 실정”이라고 꼬집었다.

‘공공극장’이 필요하다

  남산예술센터가 사라진 이후 우리는 어떤 형태의 공공극장을 상상할 수 있을까. 남산이 그랬듯, 공공극장은 단순히 공적 자금으로 운영되는 극장을 뜻하지 않는다. 김민조 평론가는 공공극장의 의미에 대해 “공공성을 가진 이슈가 무엇인지 포착하고, 이를 앞장서서 받아들이며 과감하게 실천하는 극장”이라는 의견을 내놓았다. 공공극장은 그동안 터부시된 민감한 주제를 포함해 예술이 다룰 수 있는 모든 주제를 선보여야 한다는 뜻이다. 강훈구 연출가는 “극장은 공연장일뿐 아니라 지역 주민의 거점 공간이자 커뮤니티”라며 “다양한 주체를 포괄할 수 있는 공간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현재 공공극장이라 불리는 국공립극장들이 공공성을 잘 실현하고 있는지 비판이 제기된다. 김민조 평론가는 “지금의 공공극장은 운영에 관여하는 주체가 많고 막대한 예산을 지원받는 만큼 과감하고 분명한 기조를 실현하기 어렵다”며 “남산예술센터도 이 한계에서 자유롭지 못했다”고 설명했다. 극장 운영의 명확한 ‘아젠다’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최윤우 평론가는 “극장 운영의 비전과 정책 방향이 명확하게 수립되고 극장의 다양성이 확보돼야 한다”고 설명했다.

  공공성을 실현하기 위해 공공극장은 어떻게 달라져야 할까. 현재 극장 운영에서 주로 나타나는 관 주도의 탑다운(Top-Down) 방식이 아닌, 민과 관이 서로 협력하는 거버넌스가 요구된다. 보통 극장에서는 연극인이나 시민이 아니라 공무원이 운영 주체로서 시행안을 하달한다. 김민조 평론가는 “관에서 자본과 제도를 통해 지원해주되 운영엔 간섭하지 않는 방식으로 뒷받침해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과거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사건은 관이 극장 운영에 깊이 개입한 ‘나쁜 선례’였다. 이양구 극작가는 “블랙리스트 이후 국공립극장이 신뢰를 회복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실망이 지속되고 있다”며, 자율적·독립적으로 극장을 운영해야 한다고 밝혔다.

  모두를 위한 극장을 만들어나가기 위해서는 여러 주체가 극장을 꾸려가는 데 모두 참여할 수 있어야 한다. 강훈구 연출가는 “재단의 결정을 예술가나 시민이 일방적으로 수용하는 형태를 벗어나야 한다”며 “운영과 참여 주체 간 경계를 허물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자율적인 예술 활동과 서로 상이한 시민들의 목소리를 담아낼 수 있는 ‘열린 극장’을 위한 새로운 상상력이 필요하다는 의미다.

  예술인들은 공공극장이 시민의 생활에 필요하다는 의식이 먼저 형성돼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한국은 예술의 필요성에 대한 사회적 공감대가 빈약하다. 이양구 극작가는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극장을 여가나 오락을 위한 장소로 볼 뿐, 인간과 사회를 이해하고 서로의 생각을 함께 공유하는 공간으로 여기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예술의 가치가 존중받고 극장을 바라보는 관점 자체가 바뀌어야 하는 이유다. 신효진 극작가는 “극장이 예술인을 위한 공간을 넘어 예술인들이 제공하는 양질의 문화 서비스를 시민들이 누릴 수 있는 공간이란 개념이 자리 잡아야 한다”며 “그렇지 못하면 남산의 폐관과 같은 비극이 다시 일어날 것”이라고 강조했다. 

▲남산예술센터의 마지막 작품 ‘휴먼 푸가’ ⓒ이승희

  남산예술센터 폐관이라는 손실은 공공극장의 저변 확대를 요구한다. 이양구 극작가는 공공극장을 “다양한 관점들이 제한 없이 공존하는 ‘공동세계’”라고 말한다. 누구나 참여하고 이야기할 수 있는 곳, 그 어떤 생각도 배제되지 않고 존중받는 곳이란 게 이 극작가의 설명이다. 남산예술센터의 상실을 뒤로 하고 이젠 공동세계로 나아가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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