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8일, 이옥선 씨 등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12명이 일본국을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청구소송에서 승소했다. 서울중앙지방법원은 ‘(원고가) 소송 외에 구체적 손해를 배상받을 방법이 요원하다’며 해당 소송이 ‘(문제 해결의) 최종적 수단’이라고 판단했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은 약 30년간 소송을 비롯한 운동을 이어오며 일본 정부의 법적 책임을 요구해왔다. 이들의 끈질긴 법적 투쟁의 역사를 되짚어봤다.
일본에서의 소송, 이어진 패소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1980년대 말부터 차츰 알려지기 시작했다. 1991년 故김학순 씨가 공개적으로 피해 증언에 나서며 본격적으로 공론화됐다. 당시 징용과 근로정신대 등의 문제 역시 드러나면서 일본국을 대상으로 한 과거청산 소송이 대거 제기됐다.
피해자들은 일본 법정에서 먼저 싸움을 시작했다. 형사소송은 처음부터 난관에 부딪혔다. 여성가족부에서 발간한 보고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법적 책임’에는 1994년 피해자 27명의 고소장과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의 고발장을 담당 검사가 대충 읽고는 수리할 수 없다며 단칼에 자른 사례가 기록돼있다. 검사들의 비협조적 태도를 맞닥뜨린 피해자들은 민사소송에 집중했다. 한국인 피해자가 제기한 소송은 4개다. 이중 부산일본군‘위안부’근로정신대소송(관부재판) 1심이 유일하게 일부 승소했고, 그 외의 재판은 전부 기각되거나 심리 없이 상고가 기각되는 상고불수리 결정을 받았다.
재판에서는 피고인 일본국에게 보상·배상의 책임이 있는지가 주요한 쟁점으로 대두됐다. 일본 재판부는 일본의 헌법과 법률, 국제조약을 근거로 개인의 배상청구권과 일본 정부의 법적 책임 모두 없다고 판단했다. 소멸시효·제척기간이 이미 지나 권리행사기간이 끝났고, 국가무책임의 법리에 따라 일본 정부가 책임질 필요 없다는 게 근거였다. 국가무책임의 법리는 일본 정부가 만들어낸 논리다. 경북대학교 김창록 교수(법학전문대학원)는 “국가가 불법행위를 하더라도 국가의 책임을 물을 수 없다는 내용으로 패전 전 일본의 판례를 통해 형성된 법리”라고 설명했다.
1990년대 후반이 되자 일본 재판부는 1965년에 있었던 한일 청구권 협정(청구권협정)을 패소 판결의 주된 근거로 내세우기 시작했다. 김창록 교수는 “일본 국내 소송에서 소멸시효와 국가무책임의 법리가 배척되는 판결이 등장했다. 미국 소송에서도 적극적으로 동원하기 어려웠다. 이렇게 두 강력한 무기가 약해지자 일본은 다른 무기인 청구권협정을 꺼낸 것”이라고 설명했다.
관부재판은 일본에서 제기된 소송 중 유일하게 승소한 재판이다. 하지만 이때에도 일본국의 불법 행위에 대한 책임이 인정된 것은 아니었고 일본 정부가 입법 의무를 다하지 않았다는 점이 인정됨에 따라 1심에서 일부 승소했다. 승소 판결에는 고노 담화가 영향을 미쳤다. 고노 담화는 1993년 일본 정부가 발표한 공식 담화로, 일본군 ‘위안부’에 대한 국가적 차원의 침해가 있었음을 인정했다. 당시 재판부는 ‘종군위안부제도가 중대한 인권침해이고 이것에 의해 위안부로 여겨진 많은 여성들이 입은 손해를 방치하는 일 또한 새롭게 중대한 인권침해를 일으키는 것’이라 판단했다. 그러나 2003년 관부재판의 상고심을 비롯해 6개의 대일 과거청산 소송은 잇따라 기각됐다. 일본 법정에서 일본국의 책임을 물으려는 시도는 2004년을 마지막으로 끝났다.

10년째 지속되는 법적 투쟁에도 별다른 진전이 없자 운동가들은 민간법정이라는 새로운 해결책을 고안했다. 도쿄에서 열린 ‘2000년 일본군 성노예전범 여성국제법정(2000년 법정)’이 그것이다. 한국과 북한, 일본, 네덜란드 등 10개국의 피해자들이 참여하고 남북의 피해자들이 공동 기소했다. 여태껏 없었던 형사재판도 진행됐다. 2000년 법정에서는 일본군 성노예제의 불법성을 강조하며 국가 통치 행위에 대한 책임 면제가 주장될 수 없다는 것을 명확히 했다. 『2000년 일본군성노예전범여성국제법정자료집』에서는 2000년 법정이 전시 성폭력 문제를 처벌하지 않았던 그동안의 남성 중심적 군사 법정을 바로 잡고 기존 국제법의 성차별적 편향을 극복했다는 평가를 내렸다.
일본에서 패소 판결이 계속되자 몇몇 피해자들은 미국 법정의 문을 두드리기도 했다. 2000년, 故황금주 씨 등 4개국의 피해자들이 미국 법정에 소송을 제기한 것이다. 미국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피해자들의 승소 선례가 있었고, 헤이든법과 같은 소멸시효나 국가면제의 벽을 넘을 수 있는 법도 존재했다. 하지만 피해자들은 한 국가는 타국 법원에 의해 재판받지 않을 수 있다는 주권면제론의 논리 등을 넘지 못해 소각하 및 기각판결을 연이어 받았다.
국내에서의 소송은 현재도 진행 중
일본 정부가 법적 책임을 부정하는 근거로는 늘 청구권협정이 거론된다. 일본 식민지 피해자들의 한국 정부에 대한 행정소송을 통해 청구권협정 관련 문서들이 2005년 공개됐다. 자료들이 전면 공개될 때쯤 우리 정부는 민관공동위원회를 통해 청구권협정으로 일본군 ‘위안부’ 문제 등이 해결된 것이 아니며 일본 정부의 법적 책임이 남아있다는 입장을 발표했다. 하지만 공식 발표 이후에도우리 정부가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자피해자 109명은 2006년 헌법소원심판을 제기했다. 정부가 양국 정부의 입장차 조율 등 실질적인 노력을 하지 않아 기본권이 침해됐다는 이유에서였다.
결과는 위헌이었다. 2011년, 헌법재판소(헌재)는 우리 정부에게 일본 정부와의 분쟁 해결 의무가 있으며, 정부가 피해자의 배상청구권을 실현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정부 차원의 적극적인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헌재는 ‘일본 정부로 하여금 피해자에 대한 법적 책임을 다하도록’ 하는 것이 ‘진정한 한·일 관계의 미래를 다지는 방향인 동시에 진정으로 중요한 국익에 부합하는 것’이라고 판시하기도 했다.
4년 후, 2015년 12월 28일 박근혜 정부는 일본 정부와의 ‘2015년 한·일 일본군 위안부 협상(2015 한일합의)’ 결과를 발표했다. 최종적·불가역적으로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해결하고, 일본 정부의 금전으로 피해자 지원을 위한 재단을 설립하자는 내용이 담겼다. 그러나 피해자들이 오래도록 요구한 일본 정부의 범죄 사실 인정 및 진정한 사죄, 법적 책임 이행은 다뤄지지 않았다. 일본군 성노예 표현 자제와 평화의 소녀상 설치 지원 금지 등의 내용이 포함된 이면합의도 문제로 지목됐다. 합의 체결 당시 피해자 이용수 씨가 임성남 외교부 1차관에게 “왜 우리를 두 번 죽이려 하냐”며 호통을 치기도 했다.
2015 한일합의가 체결된 지 약 석 달 후, 2016년 3월 피해자와 유족은 헌법소원을 제기했다. 피해자의 존엄과 가치, 절차 참여권 등이 침해받았다는 이유에서다. 그러나 2019년 헌재는 헌법소원의 대상이 아니라며 헌법소원을 각하했다. 2015 한일합의로 피해자의 권리나 정부의 외교적 보호권이 소멸된 게 아니라는 이유에서였다. 헌재는 2015 한일합의가 조약체결의 정식 절차를 거치지 않은 구두 합의라는 점에 주목했다. 정식 합의가 아니라서 법적 효력을 가지지 못하기 때문에, 해당 합의를 ‘최종적·불가역적’ 해결이라고 볼 수 없다는 판단이었다.
국가면제가 부정되고 불법행위가 인정되다
올해 1월 8일, 일본국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청구소송에서 ‘원고 한 명당 1억 원의 배상금을 지급하라’는 승소 판결이 나왔다. 중대한 인권침해 문제에서의 국가면제 배제, 일본국의 불법성 인정, 청구권협정과 2015 한일합의에 의한 손해배상청구권 소멸 부정 등이 근거였다. 2013년 故배춘희 씨 외 11명이 신청한 민사조정이 2015년 손해배상청구소송으로 전환됐고 2021년에는 1심 판결이 나왔다. 일본 정부의 항소 포기로 판결은 최종 확정됐다. 일본 정부가 소장 수령을 계속 거부하며 재판이 오랫동안 열리지 못했지만, 약 7년 5개월 만에 값진 승소를 얻어낸 것이다. 김창록 교수는 “일본 정부는 일본과 미국에서 진행된 재판에는 적극적으로 참여했지만, 한국에서의 재판은 소장조차 받지 않았다”고 비판했다.
재판에서 가장 큰 쟁점이 됐던 지점은 국가면제론(주권면제론)이었다. 국가면제란 국가와 그 재산이 외국의 재판관할권에 따르지 않는다는 국제법상 원리다. 국가면제론에 따르면 A국에선 B국의 범죄를 재판할 수 없다. 국가면제는 절대적인 것으로 인정돼왔지만, 19세기 초부터 국가면제가 적용되지 않는 예외 사례가 점차 늘기 시작했다. ‘일본국 상대 손해배상청구소송 1심 판결의 의미 1차 토론회’에서 경희대 백범석 교수(국제대학원)는 “주권면제론은 국제관습법으로서 (개별 국가의 행정, 입법, 사법 등 기능의 행사를 통해 구성되는) 국가 실행에 따라 발전 및 변화해왔다”고 설명했다. 백 교수는 “지난 30여 년간 무수히 많은 국가에서 해당 법리에 도전하는 소송이 제기됐다”며 “이탈리아 헌법재판소 2014년 판결 등에서는 재판받을 권리를 (국제면제보다) 우위에 뒀다”고 말했다.

이번 판결에서도 재판부는 국가면제론을 인정하지 않았다. 서울중앙지방법원은 국가면제론이 무조건적인 주권면제를 말하는 것은 아니라고 판단했다. 국가면제론이 국제적 강행규범을 위반한 국가가 배상과 보상을 회피할 수 있는 수단으로 쓰여선 안 된다고도 명시했다. 국제적 강행규범은 국제사회의 근본적 공통가치를 보호하기 위한 것으로, 가령 노예제 금지 등이 이에 해당한다. 재판부는 극심한 피해를 입은 피해자들이 ‘최종적 수단’으로 선택한 민사소송에서까지 피고 국가에 대한 재판권 면제가 인정받는 것은 불합리하다고 봤다.
국가면제론과 더불어 일본국의 손해배상책임 여부도 주요 쟁점이었다. 재판부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일본국의 불법행위가 확실하다고 판단했다. 여성과 아동의 인신매매 금지 조약 등 일본국 행위 당시의 국내외법과 조약을 근거로 삼았다. 재판부는 청구권협정과 2015 한일합의에 의해 피해자들의 청구권이 소멸된 것이 아니라는 점 역시 확인했다. 김소라 젠더연구자는 ‘일본국 상대 손해배상청구소송 1심 판결의 의미 2차 토론회’에서 이번 재판을 통해 “식민주의 피해자, 특히 성적 침해를 입은 여성이 국가면제 논리보다 우선한다는 것을 명확히 했다”며, “전시성폭력에 대한 기존 국제규범의 한계를 극복했다”고 봤다.
여전히 진행 중인 소송도 있다. 2016년 故곽예남 씨 등 20명은 2015 한일합의에 항의하며 손해배상청구소송을 제기했다. 오래도록 진척이 없다가 2019년 1심 재판이 열렸다. 올해 1월 13일 최종 선고가 나올 예정이었지만 일정이 연기됐다. 3월 말 심리가 재개될 예정이다.
승소를 걱정하는 한국 정부와 언론
승소 판결에 대해 일본 정부는 강하게 항의하며 항소에 응하지 않았다. 가토 가쓰노부 일본 관방장관은 이번 재판이 국가면제 원칙에 맞지 않는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오래도록 일본 정부는 청구권협정과 2015 한일합의로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해결됐다는 입장을 고수해왔다. 이에 반해 우리 정부는 일관성 있는 주장을 펼치지 못하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정권 초기 <워싱턴 포스트>에서 ‘문제 해결의 핵심은 일본이 법적 책임을 지고 공식으로 사과하는 것’이라고 인터뷰했지만, 지난 1월 14일 신년 기자회견에서 문 대통령은 ‘(양국의 대화 노력에) 위안부 판결 문제가 또 더해져서 솔직히 조금 곤혹스러운 것이 사실’이라고 발언했다. 정권 초기엔 일본의 책임을 강하게 요구하다가, 현재는 일본 정부의 책임이 인정된 승소 판결로 한일관계의 악화를 우려하는 모습이다.

승소가 확정된 1월 23일, 우리 외교부는 ‘이번 판결을 존중한다’면서도 ‘2015 합의가 공식 합의임을 확인한다’는 입장문을 냈다. 외교부의 입장이 모순적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2015 한일합의의 법적 효력을 부정한 이번 판결을 인정하면서도 2015 한일합의가 공식 합의라고 주장해서다. 김창록 교수는 “일본 정부가 법적으로 적절치 않은 주장을 펴고 있지만, 한국 정부와 정치인의 말이 애매하다 보니 제3자에게는 일본 정부의 억지 주장이 침투할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 일본군성노예제해결을위한정의기억연대(정의연) 이나영 이사장 역시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한 정부 차원의 통일된 매뉴얼과 컨트롤타워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그간 우리 언론에서도 승소 판결로 인해 한일관계 악화가 우려된다고 보도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승소 결과를 한일관계 악화나 경제보복 우려와 연결 짓는 것은 문제의 본질을 흐리는 것이란 지적이 나온다. 김창록 교수는 “애초에 관계가 왜 악화됐는지를 봐야 한다”며 한일관계가 나빠진 진짜 이유는 승소 판결 때문이 아니라고 설명한다. 오히려 두 합의로 인해 개인의 배상청구권이 소멸되지 않았음에도 여전히 이를 근거로 범죄 사실과 법적 책임을 부정하는 일본의 태도가 문제라는 것이다. 그는 “일본의 불합리한 주장에는 비판을 가하지 않으면서 ‘일본은 바뀌지 않을테니 우리가 바뀌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비판했다.
“나의 마음은 결코 지지 않았다”
승소 가능성이 희박한데도 피해자들이 끊임없이 법적 투쟁을 이어온 이유는 무엇일까. 현재 진행 중인 일본군 ‘위안부’ 손해배상소송의 경과에 대해 지난해 11월 정의연이 발표한 내용을 보자. ‘원고들이 얼마 남지 않는 삶의 끝자락에서 굳이 일본국을 상대로 소송을 하는 것은 죽는 순간까지도 일본국, 일본군이 자행한 반인륜적 범죄를 확인하고 이를 역사에 기록하기 위한 것’이라는 것이다. 일본국의 죄가 공식적으로 인정돼 일본 정부가 공식으로 사죄하고 법적 책임을 다하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피해자들의 목표는 일정 금액을 배상받는 것이 아니다. 법무법인 지향 이상희 변호사는 “유엔이 2005년 발표한 ‘피해자권리 기본원칙’에 따르면, 배상은 금전 배상뿐만 아니라 사실인정과 교육, 재발 방지, 추모사업, 책임자 처벌 등을 모두 포함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일본 정부의 법적 책임은 ▲범죄사실 인정 ▲공식 사죄 ▲진상 규명 ▲배상 ▲위령 ▲책임자 처벌이라는 피해자들의 7대 요구 사항을 모두 포괄한다는 것이다. 이번 승소 판결에서 피해자들이 ‘개인당 1억 원의 위자료’를 청구한 이유도 같은 맥락에서다. 이 변호사는 “1억 원은 상징적인 금액일 뿐”이라며 “판결문 안에 명시된 (불법적인) 가해 사실과 법적 책임이 중요하다”고 덧붙였다.
30년 동안 피해자들이 맞닥뜨린 ‘패소’는 ‘패배’가 아니었다. 패소했더라도 판결문에 피해자에 대한 심각한 인권유린 등 일본국의 불법적 행위가 명시되기도 했다. 이나영 이사장은 “(이번 재판) 판결문을 보면 유엔 권고안이나 기존 판례 등이 다 포괄돼 있다”며 “30년 역사가 축적된 판결”이라고 평가했다.
10년간의 소송 끝에 결국 상고불수리 결정을 받은 故송신도 씨는 ‘재판에서는 내가 졌을지 몰라도 내 마음만은 지지 않았다’고 외쳤다. 법적 투쟁과 함께 30년 이상 지속된 일본군 ‘위안부’ 운동은 수많은 패소에도 결코 지지 않았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