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군 ‘위안부’ 운동이 30년 이상 이어져 올 수 있었던 원동력은 무엇일까. 지속적인 운동의 이면에는 수많은 사람의 열정과 연대가 있었다. 이들은 각자의 위치에서 다채로운 운동을 전개하면서도,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정의로운 해결과 재발 방지라는 커다란 목표는 함께 공유하고 있다. 일본군 ‘위안부’ 운동, 그 중심에 서 있는 사람들을 만나보자.
경상남도 창원시, ‘일본군‘위안부’할머니와함께하는마창진시민모임(마창진시민모임)’ 이경희 대표는
기자와 이경희 대표는 구면이다. 기자가 고등학생일 때 학교에서 열린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를 위한 모금 바자회에서 이 대표와 마창진시민모임을 만났다. 4년 만에 만난 그는 당시 학생들과의 연대를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이경희 대표는 창원과 경남을 중심으로 오랫동안 여성 운동을 했다. 이 대표는 2007년 마창진(마산·창원·진해)시민모임을 창립했고 계속해서 일본군 ‘위안부’ 운동을 해왔다. 마창진시민모임에서는 피해자 지원 및 기념사업, 교육·홍보사업, 비정기적인 수요시위 등을 진행한다. 지난해 말에는 ‘2020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 촉구를 위한 국제 청소년 작품 공모전’을 개최하기도 했다. 이 대표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불거지기 시작한 초기에 일본은 역사를 회피하려고 했고, 이제는 전방위적으로 역사를 지우려 한다”며 “일본의 역사 부정을 막기 위해서는 유네스코 기록물 등재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마창진시민모임은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교육 방안을 꾸준히 고민하고 있다. 문제의 진실을 제대로 알리는 것이 중요하다는 믿음에서다. 청소년 및 청년 뿐 아니라, 시민 전체를 대상으로 하는 교육 프로그램도 기획하는 중이다. 이 대표는 “올해 1월 8일에 나온 승소 판결을 시민들과 공유하는 자리를 만들고자 한다”며 “같이 머리를 맞대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을 고민하는 프로그램을 생각하고 있다”고 말했다.

많은 시민운동이 이뤄지는 수도권이 아닌 경남 지역에서 운동을 이어가는 데에 난관은 없을까. 이경희 대표는 마창진시민모임에 실질적인 유급 실무자가 없다거나 수요시위 참여자가 적다는 등의 어려움을 토로했다. 그러나 그는 지역 내 시민들과의 강한 연대가 존재함을 강조했다. 그는 ‘다짐비’에 얽힌 이야기를 꺼냈다. 창원에는 평화의 소녀상이 아닌 인권자주평화다짐비가 있다. 작명 고민부터 다짐비 설립까지 수많은 시민이 함께했다. 다짐비 설립 위원회를 함께 한 시민단체들뿐 아니라, 소식을 듣고 연락 온 중·고등학교 교사, 다짐비 제작을 맡은 지역 작가 등이 힘을 합쳤다. 이 대표는 지역 시민단체들이 피해자 추모제 공동 주최 제안에도 흔쾌히 응해줬다고 했다. 그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특정 운동가나 단체만이 책임지는 문제가 아니라 동시대 시민들이 다 같이 고민하는 문제임을 느꼈다”고 말했다.
마창진시민모임이 참여하고 있는 역사관 건립추진위원회는 경상남도 내 일본군 ‘위안부’ 박물관 건립을 추진하고 있다. 현재 경남에서 가장 가까운 박물관은 부산에 있다. 코로나19로 인해 역사관 홍보 활동에 차질이 생겼지만, 지난해 8월 14일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기림의 날 행사에서 김경수 경남도지사가 역사관 건립의 적극적인 추진을 돕겠다고 약속해 속도를 낼 수 있었다. 이경희 대표는 “올해 하반기부터는 건립에 대한 구체적인 협의가 시작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경희 대표는 “일본군 ‘위안부’ 운동은 여성 인권의 총체적 운동”이라고 말했다. 이 대표는 “성차별적 구조와 가부장제, 여성의 몸을 도구화하는 문화는 전시 성폭력과 필연적으로 맞물린다”고 설명했다. 그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하나의 역사적 사건으로 파악하기보다는 여성의 일상적 삶에도 재현되는 문제로, 오늘날에도 국제 사회 곳곳에서 계속되는 문제로 바라봐야 한다”고 말했다.
미국 샌프란시스코, ‘사회정의교육재단’ 손성숙 대표는
손성숙 대표는 전직 샌프란시스코 공립학교 이중언어 교사로, 2017년부터 사회정의교육재단(교육재단)을 조직해 활동하고 있다. 교육재단의 대표적 활동은 일본군 ‘위안부’ 교육이다. 2018년 4월에는 손 대표가 쓴 『‘위안부’ 역사와 이슈: 교사용 지침서』가 18개 공립고등학교에 배부되기도 했다. 이후 학생용 지침서도 발간했다. 현재 손 대표는 교사 워크숍 등 여러 행사를 통해 교육자와 학생, 활동가들에게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알리고 있다.
미국 학교에서는 우리나라에 비해 교육과정이나 교재 등을 교사가 자율적으로 정할 수 있다. 2015년 10월 샌프란시스코 교육구 커미셔너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역사를 샌프란시스코시 공립고등학교 10학년 과정에 포함하는 안건을 통과시켰지만, 강제성이 없어 일선 학교에서 교육이 활발히 이뤄지지 못했다. 손 대표가 직접 나서서 교사용 지침서를 쓰게 된 이유다.
손 대표는 일본군 ‘위안부’ 교육을 인종학적 관점에서 접근할 필요성이 있다고 본다. 그는 “기존 인종학은 흑인과 미국의 소수 민족에 대한 역사와 문화를 주로 다뤘다면, 최근에는 영역을 확장시켜 초국가적인 주제를 다룬다”고 설명했다. 그는 “미국 내 여러 소수 민족이 모국이나 미국에서 겪은 전쟁과 차별, 성폭력, 역사 왜곡 등을 일본군 ‘위안부’ 역사와 연계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인종학을 비롯한 다양한 과목과 접목하여 교육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봤다.
손성숙 대표 역시 시민운동의 길에서 어려움과 마주칠 때가 있었다. 2017년에는 캘리포니아 교육부의 일방적 결정으로 학습안제안지침서에 일본 외무성의 ‘2015 한·일 일본군 위안부 협상(2015 한일합의)’ 링크가 포함되기도 했다. 2015 한일합의가 피해자의 요구가 반영되지 않은 합의라는 비판을 받고 있었음에도 교육부 지침에 실린 것이다. 이를 두고 손 대표는 “많이 실망하고 속상했다”고 말했다. 손 대표는 여전히 많은 교사가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모르거나 제2차 세계대전 등 다른 주제의 수업 시간에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짧게 언급하는 데 그친다며 안타까움을 표했다.

손성숙 대표가 활동을 지속할 수 있었던 힘은 이경희 대표와 마찬가지로 연대에 있다. 손 대표는 “많은 학부모와 교사, 시민들의 연대로 교육재단의 활동이 지속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수학에 접목하는 색다른 방법을 물어온 교사도 있었고, 학부모들의 열성적인 도움도 있었다. 손 대표는 “2015년 통과된 일본군 ‘위안부’ 교육 안건을 공립고등학교에서 실시하게 된 데에는 단기간에 청원서에 적극 서명한 많은 학부모의 역할이 컸다”고 말했다.
교육재단은 일본의 지바조선초중급 학교와도 인연을 맺고 있다. 2016년 해당 학교에서 진행된 예술전시회에 두 학생이 2015 한일합의와 일본 정부를 향한 비판을 담은 작품을 전시했다. 이에 지바 시장은 학교에 지급하는 50만 엔의 시 보조금을 매해 삭감할 것을 통보했다. 손 대표는 <한겨레> 보도를 통해 소식을 접한 후 5천 달러를 모금해 학교에 보냈고, 지금도 꾸준히 후원하고 있다. 올해부터 재단은 지바조선초중급 학교에서 학생 그림대회를 주최한다.
손성숙 대표는 “한국의 일본군 ‘위안부’ 운동은 여성의 보편적 인권과 평화를 지향하는 세계 여성 운동의 바람직한 여러 표본 중 하나”라고 말했다. 일본군 ‘위안부’ 운동은 피해자들의 의식 및 능력 향상(임파워먼트)에서 비롯됐고, 운동 과정에서 더 큰 임파워먼트가 생겼다는 게 손 대표의 생각이다. 그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비롯해 여성 인권에 관한 사회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방법을 계속해서 고민하고 있다.
서울시 마포구에서 ‘일본군성노예제해결을위한정의기억연대(정의연)’ 이나영 이사장은
일본군 ‘위안부’ 운동의 역사를 되짚을 때 빠뜨릴 수 없는 단체가 정의연이다. 1990년 조직된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는 정의연의 전신이다. 정대협은 매주 수요시위 진행, 2000년 법정 개최, 평화의 소녀상 건립 등 굵직한 활동을 펼쳐왔다. 2018년 정대협과 ‘일본군성노예제문제해결을위한정의기억재단’이 통합돼 현재의 정의연이 출범했다.
정의연에서 진행하는 사업은 굉장히 다양하다. 이나영 이사장이 언급한 활동만 해도 열 가지가 넘는다. ▲피해자 지원 사업 ▲수요시위 ▲전쟁과여성평화박물관 운영 및 자료 아카이빙 ▲평화의 소녀상 건립과 훼손 방지 ▲장학사업 ▲국내외 연대 등이다. 이외에도 남북연대 사업, 전시성폭력 재발방지 사업 등의 업무가 있다. 이 모든 일을 활동가 14명이 수행하고 있다. 박물관에서 근무하는 5명을 제외하면 실질적으로 9명이 모든 업무를 도맡아 하는 실정이다. 이 이사장은 “지난해 정의연 사태로 바쁠 때도 사업은 계속 진행해야 했다. 실무자와 함께 밤낮없이, 주말 없이 일했다”고 회상했다.

지난해 5월 회계 부정 등의 의혹들이 불거지며 정의연이 세간에 알려졌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이용수 씨의 기자회견에서 지원금·후원금을 적절치 못하게 사용했다는 의혹이 제기됐던 것이다. 그러나 지난해 9월 회계 부정 혐의가 없다는 검찰 조사 결과가 나왔다. 지난해 7~8월엔 회계 부정에 관한 가짜뉴스에 대해 언론중재위원회의 조정이 수차례 이뤄지기도 했다.
정의연은 지난해 8월 ‘성찰과비전위원회’를 조직했다. 일본군 ‘위안부’ 운동의 방향성을 모색하기 위한 것으로, 회계 관리체계 개선 및 조직·활동 점검 등을 목표로 출범했다. 성찰과비전위원회는 올해 2월 3일 수요시위에서 지난 7개월간의 활동결과를 보고했다. 이나영 이사장은 “외부 자문 결과 회계 부정은 없었다. 기존 회계 처리 방식은 민간단체의 실정에 맞지 않아 회계 입력에 어려움이 있었던 것”이라며 “오히려 지나치게 꼼꼼해서 문제라는 평을 받았다”고 말했다.
성찰과비전위원회의 조직 구조 점검 이후 정의연은 이사회를 개편함으로써 조직의 체계화를 추구했다. 이나영 이사장은 “기존 협의체에 속해있던 단체 대표들이 모두 이사진이었기 때문에 이사 수가 너무 많았다”며 “위기 시에 이사회가 실질적으로 작동하기 어려운 구조였다”고 설명했다. 이 이사장은 “젠더·역사·법·홍보 등 영역별 전문가 중심의 이사진으로 구성했다”고 말했다.
정의연의 올해 계획은 무엇일까. 정의연은 기존 사업을 그대로 이어가는 한편 나비기금의 확대도 계획하고 있다. 나비기금은 전시성폭력 피해자들을 지원하고 연대하기 위해 조성된 것으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의 문제 재발 방지에 대한 뜻을 이어 만든 것이다. 이나영 이사장은 “아시아의 전쟁 피해 여성을 지원하는 단체들과 연대해서 나비기금을 체계적으로 확장하려고 한다”고 설명했다. 로힝야족과 팔레스타인 여성 등이 내전과 분쟁에 휘말려 심각한 성범죄에 노출되고 있어서다. 국제적 연대를 향한 정의연의 포부는 ‘여성·인권·평화 운동의 국제적 플랫폼으로서의 역할’을 강조했던 성찰과비전위원회의 활동결과 보고에도 드러난다. 정의연은 교육사업 확대와 뉴미디어국 신설 역시 계획 중이다. 이 이사장은 “기존 자료를 잘 정리해 시민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유용한 콘텐츠를 개발하고 공유하고자 한다”고 말했다.
지금까지 정의연이 밟아온 길을 이나영 이사장은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이 이사장은 “도덕성에 큰 타격을 입은 지난해가 가장 큰 위기였다고 감히 평가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그는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게 해준 동력은 결국 시민의 힘이었다고 강조했다. “그저 이해해주고 잘하고 있다며 응원해주는 시민이 있다는 사실 덕에 갖은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다.”
경상남도 창원시, 미국 샌프란시스코, 서울시 마포구. 각자의 자리에서 세 사람이, 그리고 지면에 적지 못한 수많은 이들이 이어온 운동은 일본군 ‘위안
부’ 운동에 다채로운 결을 만들고 있었다. 문제 발생 시점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곳에서 터져 나온 목소리들과 이어져 온 움직임은 서로 연결되고 누적돼왔다. 지금, 이 순간에도 어딘가에서 운동을 이어가는 이들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