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어이 가능한 세계

글을 쓰고 싶어서 저널에 들어왔는데 기사는 그간 써 온 글과 너무 달랐다.선명한 차이 중 하나는 이 글이 어떻게 읽힐지 더 고민하고, 더 조심스러워졌다는 점이다.얼굴 모를 독자들뿐 아니라 구체적인 독자를 떠올린다.기사를 쓸 때는 불가항력처럼 취재원을 생각하며 쓴다.전전긍긍 생각한다.시간 내어 경험과 지식을 나눠준 이들에게 실례되는 글을 내보이게 된다면 스스로가 너무 부끄러울 것 같아서다.

  글을 쓰고 싶어서 저널에 들어왔는데 기사는 그간 써 온 글과 너무 달랐다. 선명한 차이 중 하나는 이 글이 어떻게 읽힐지 더 고민하고, 더 조심스러워졌다는 점이다. 얼굴 모를 독자들뿐 아니라 구체적인 독자를 떠올린다. 기사를 쓸 때는 불가항력처럼 취재원을 생각하며 쓴다. 전전긍긍 생각한다. 시간 내어 경험과 지식을 나눠준 이들에게 실례되는 글을 내보이게 된다면 스스로가 너무 부끄러울 것 같아서다.

  트랜스젠더퀴어의 노동을 다룬 이번 기사는 신중하게 써야한다는 생각이 유독 컸다. 내가 얹는 한 움큼의 말이 지난 죽음들의 의미를 왜곡하거나 글 속의 사람들을 객체화할까 겁이 났다. 부원들과 커버기사 아이템을 선정하던 날은 故변희수 하사 사망 보도를 접한 바로 다음 주였다. 내게 주어진 네 쪽짜리 지면에서 이 일을 얘기하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겨우 내가 무슨 말을 할 수 있을지 망설여졌다. 커버팀이 꾸려지고 인터뷰를 준비하며 우리가 가장 많이 나눈 말은 ‘누구도 타자화하지 않는 글을 쓰자’는 것이었다. 꼼꼼히 호칭을 정리하고 서로 질문지를 검토했다. 취재를 마친 지금, 조금은 기우였다고 적는다. 애초에 당신과 나는 분리가능한 대상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각자의 정체성과 경험은 서로 다르지만 우리가 겪는 차별의 원인구조는 맞닿아 있다. 공고한 성별 규범을 잣대로 ‘정상적인 몸’을 규정하는 신화가 가둬온 몸은 트랜스젠더퀴어의 몸만이 아니다.

  한 꼭지의 인터뷰를 마칠 때마다 친구들을 붙잡고 “저널에서 사욕을 채우고 간다”고 수군댄다. 취재는 때로 나를 위한 일이기도 하다. 더 나은 세계가 올 거라는 확신을, 신뢰할 만한 이들의 입으로 듣고 싶다는 욕망의 발로다. 내가 사는 세계는 닭들이 토막나 접시에 오르고 거리에서 여자들이 시체로 발견되고 내 존재를 건 현수막이 예사롭게 난도당하는 공간이다. 무력감은 분노로 이어져서, 나는 곧잘 가시를 세웠다. 기사를 쓰러 나선 취재에선 따뜻하고 저항적인 사람들을 만났다. 잘못된 걸 잘못됐다 또박또박 말하면서도 세상을 다정히 바라보는 시선을 마주했다. 내가 전해받은 온기를, 자꾸 가시가 늘어나 걱정일 이들에게 전하고 싶다는 마음으로 썼다.

  다정한 시선을 지닌 취재원들은 더 나은 사회가 도래할 거라고 또렷이 말했다. 정면으로 혐오를 마주해 온 이들이 희망을 확신하는 것을 들을 때마다 나는 가만히 놀란다. 희망을 믿는 수많은 사람들이 일구는 변화를 바라보면서, ‘사회는 이미 변화하고 있다’고 기사를 맺는다. 기사가 그리는 차별 없는 일터, 포용적인 공동체는 더 이상 상상에 불과하지 않다. 머잖아 기어이 가능한 세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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