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여기의 일터는 성소수자 노동자에게 안전하지 않다. 하루 중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공간에서 혐오를 받아내야 할지 모른다는 위험, 커리어가 위협받을 수도 있다는 불안은 당사자에게 정신적 부담을 지운다. 퀴어 구성원이 안전하고 편안하게 근무할 수 있는 직장은 어떻게 구축될 수 있을까. 누구나 존엄하게 노동하는 일터를 만들어갈 방법들을 짚어봤다.
내 모습 그대로 근무할 수 있는 일터

사규에 차별 금지를 명시하는 것은 보다 안전한 근무환경을 만드는 첫걸음이다. 뉴스레터를 발행하는 기업 ‘뉴닉’은 퀴어프렌들리한 일터 구축을 위해 내규 ‘레인보우 가이드’를 제정했다. 레인보우 가이드에는 ‘채용과정에서 성별이나 병역사항 등 불필요한 인적사항을 묻지 않는다’, ‘성중립적 표현을 사용한다’는 등의 내용이 담겨있다. 채용공고에 명시된 ‘성적지향·성별정체성·성별표현을 이유로 차별하지 않는다’는 원칙은 성소수자들에게 안심하고 해당 기업에 지원해도 된다는 메시지를 준다. 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행성인) 이드 활동가는 퀴어문화축제에서 화장품 기업 ‘러쉬(LUSH)’의 부스를 본 뒤 “퀴어문화축제도 나오는 회사라면 괜찮겠다”는 생각에 입사를 지원했다. 논바이너리 트랜스젠더인 이드 활동가는 면접에서 별 탈 없이 커밍아웃을 할 수 있었던 점이나 “타투를 하든 피어싱을 하든” 외모 규제에서 자유로웠던 점이 다른 여러 일터에서의 경험과 차이가 컸다며 “퀴어프렌들리를 지향하는 기업에서 일한 건 굉장한 경험이었다”고 회상했다.
직장문화를 만들어가는 구성원 모두의 노력도 중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희망을만드는법(희망법) 박한희 변호사는 “무엇보다 바꿔야할 것은 사생활을 물어보는 기업문화”라며 “남의 애인이 남자친군지 여자친군지를 물을 필요가 없다”고 지적했다. 동료의 사생활을 당연하게 묻거나 차별적 표현을 내뱉는 언행은 친밀함의 표시로 포장되곤 하지만 대개 상대에 대한 존중이 부족함을 증거할 뿐이다. 2016년 발표된 일본 ‘LGBTI 직장환경조사’에 따르면 성소수자에 대한 차별적 반응이 많은 직장에 다니는 경우 성소수자 당사자와 비당사자 모두 근속 의욕이 10%p 더 낮은 것으로 드러났다. 이드 활동가는 러쉬에서 일할 당시 “직장 안에 (정체성을 드러내는)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소속감이 아주 컸다”며 “일이 힘들어도 속을 털어 놓을 수 있는 사람이 있으면 일을 지속할 수 있고, 이는 기업에도 이익”이라고 말했다.
모두가 이용가능한 편의시설 마련의 필요성 역시 제기된다. 법적 성별과 성별 정체성, 외관으로 ‘패싱’되는 성별이 매끄럽게 일치하지 않는 사람들은 성별에 따라 구분된 화장실·탈의실에서 불쾌한 시선을 받거나 무례한 발언을 듣기도 한다. 트랜스젠더퀴어의 경우 화장실 이용의 어려움은 일상적이고, 건강권 침해로 이어지는 경우도 많다. 성중립적인 ‘모두를 위한 화장실’은 대안이 될 수 있다. 각 칸이 변기와 세면대를 갖춘 개별적 공간으로 분리돼 성별·장애 등의 구분 없이 누구나 다른 사람과 마주치지 않고 이용가능한 형태다. 성중립 공간은 비단 트랜스젠더퀴어 인권만의 문제가 아니다. 머리가 짧은 여성처럼 사회 통념에 들어맞지 않는 외형을 지닌 사람들, 성별이 다른 장애인과 활동보조인 등 직장을 구성하는 모두가 편안하게 생활하는 일터를 위해 필요한 기획이다.
건강보험과 경조사비, 신혼휴가와 같은 복리후생제도가 성소수자 구성원을 포용할 수 있도록 설계돼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다. 기업이 복리후생의 차원에서 트랜스젠더퀴어 직원에게 트랜지션을 지원하는 것 역시 가능하다. 트랜지션은 자신의 성별정체성에 맞게 사회적 성별을 변화시키는 과정으로, 복장 등 외모의 변화, 수술 등을 통한 신체적 변화, 법적 성별 정정을 포함한다. 회사가 트랜지션을 지원하는 데는 대단한 비용이 들어가지 않는다. 누군가 법적 성별과 다른 성별의 옷을 입었다는 이유로 불이익을 주지 않는 것, 트랜지션을 거친 사람의 회사 내 관련 정보를 수정하는 것 등 작은 조치로도 일터는 전혀 다른 공간이 될 수 있다. 박한희 변호사는 “이런 공간을 만드는 데 어마어마한 조치가 필요한 건 아니다”라며 “임원이 무지개 에디션 애플워치를 차고 다닌다든가 하는 작은 상징으로도 ‘여기가 안전한 공간’이라는 메시지를 줄 수 있고, 그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차별금지법이 그려나가는 세상
포용적인 직장문화 조성은 종착역이 아닌 출발지다. 개별 직장 차원의 노력만으로 모든 성소수자 노동자에게 안전한 노동환경이 마련되지는 않는다. 4대보험 등 기본적인 안전망도 갖춰지지 않은 일터에서 저임금·불안정노동을 이어가는 많은 트랜스젠더퀴어들은 여전히 안전망 바깥을 배회한다. 행성인 슈미 활동가는 “대기업이나 외국계 기업만이 아니라 모든 평범한 일터에 퀴어프렌들리한 문화가 뿌리내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모든 평범한 일터’를 안전하고 편안한 공간으로 구축할 가장 현실적인 방법은 법을 바꾸는 것이다. 청년정의당 오승재 대변인은 “몇몇 기업의 선의에 기대는 것으로는 부족하기 때문에 법이라는 체계가 중요하다”고 말했다. 법으로 고용상의 차별이 규제되면 모든 직장은 ‘선의’의 유무와 상관없이 차별 철폐 방안을 마련할 의무를 갖게 된다. 차별을 겪는 이들에게 실효성 있는 구제 방안을 제시하기 위해, 나아가 공적 공간에서 쉽게 무시되던 이들에게 자신을 보호할 언어를 제공하기 위해 포괄적 차별금지법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14년째 이어지고 있다.
현행 제도는 개별적 입법을 통해 피해자를 보호한다. 박한희 변호사는 “현행법으로도 트랜스젠더가 고용차별을 받거나 괴롭힘을 당하면 법적으로 구제는 받을 수 있다”고 말문을 열며 “해석적으로는 그렇다”고 덧붙였다. 직장에서 트랜스젠더라는 이유로 괴롭힘당할 경우 개정 근로기준법이 규율하는 ‘직장 내 괴롭힘’으로 해석이 가능하다. 남녀고용평등법의 ‘직장 내 성희롱’ 조항도 현행법상 구제 방안 중 하나다. SOGI법정책연구회는 2018년 펴낸 ‘성소수자 친화적 직장을 만들기 위한 다양성 가이드라인’에서 ‘특정한 성별표현을 강요하거나 이를 이유로 차별하는 행위, 성소수자이거나 그렇게 보인다는 이유로 행해지는 성희롱은 남녀고용평등법에 따라 금지되는 행위’라고 해석했다. 개별적 차별금지법보다 차별 사유들을 다양하게 규정하는 국가인권위원회법(인권위법)은 국가인권위원회(인권위)의 운영을 위해 만들어진 조직법이다. 인권위법에 따라 인권위는 성별 정체성을 이유로 하는 차별을 조사하고 시정을 권고할 수 있다.
문제는 법이 존재해도 실질적으로 작동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는 점이다. 인권위법에 따른 구제는 실효성이 부족하다. 인권위 권고는 법적 구속력이 없어 피진정자가 권고를 이행하지 않아도 추가적인 조치를 취하기 어렵다. 인권위는 지난 2월 육군에 故 변희수 전 하사의 전역처분 취소를 권고했으나 육군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근로기준법이나 남녀고용평등법이 적용될 경우 법적 구속력을 갖지만, 노동위원회나 법원에서 트랜스젠더의 해고 등을 근로기준법 위반으로 판정·판결한 사례는 전무하다. 박한희 변호사는 “소송을 하려면 당사자가 커밍아웃해야 하고 상당한 돈과 시간이 소모돼 현실적으로 많은 이들이 문제제기를 포기한다”고 말했다.
개별적 차별금지법이 한정된 영역에만 적용된다는 점도 한계로 지목된다. 단일한 사유로만 이뤄지지 않는 다양한 차별을 포괄적으로 다루지 못하기 때문이다. 지난해 포괄적 차별금지법 제정안을 대표발의한 정의당 장혜영 의원은 “모든 사람들은 복합적인 정체성을 지니고 있다”며 “차별 또한 다양하고 복합적인 정체성만큼이나 복합적으로 이뤄지며, 이러한 ‘복합차별’은 개별적 차별금지법으로 온전히 다루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각각의 차별 행위들을 개별적 차별금지법에 따라 규율하는 것은 사법적 구제절차의 비효율성을 낳기도 한다. 차별 행위가 발생했을 때 이를 어떤 법령에 근거한 차별행위로
포괄적 차별금지법은 대안이 될 수 있다. 21대 국회에서 발의된 포괄적 차별금지법은 ▲고용 ▲교육 ▲재화와 용역의 제공과 이용 ▲행정서비스 등 네 영역에 있어 성별·장애·연령·학력·출신 국가·성적 지향·성별 정체성 등 23가지의 사유로 인해 발생하는 부당한 차별을 법적으로 금지한다. 현행법과 달리 포괄적 차별금지법은 성별 정체성과 성적 지향 등 보다 구체적인 차별 금지 영역들을 포함하고, 차별 사유가 얽혀있는 복합차별을 포섭한다. 차별의 경험을 더 폭넓게 다루면서 실질적인 예방 및 구제 수단을 제공할 수 있는 것이다.
포괄적 차별금지법의 제정은 선언적인 의미를 지니기도 한다. 박한희 변호사는 “실제로 권익을 구제하는 (법의) 기능도 물론 중요하지만, ‘이런 행위는 문제적’이라고 국가 차원에서 선언하는 효과도 매우 중요하다”고 지적한다. 국가규범의 권위를 근거로 혐오를 문제삼는 것 자체가 혐오세력을 위축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소송을 하려고 정체성을 드러내면 피해받을 수 있다는 걱정에 문제제기를 포기하고 피해를 감내했던 사람들도 안전하고 평등하게 법의 보호를 요청할 수 있게 된다. 장혜영 의원은 “포괄적 차별금지법이 제정되면 일상적으로 만연해 ‘차별’로 인식되지 못하는 차별 행위를 차별로 명명할 수 있게 된다”며 “이러한 제도적·사회적 지지 기반을 마련하는 것이 포괄적 차별금지법의 가장 큰 역할”이라고 말했다.

법 제정은 문제해결의 종료가 아닌 새로운 시작이다. 장혜영 의원은 차별금지법은 “개개인이 행했거나 경험했던 차별들에 대한 인식을 확장하는 마중물”이라며 차별금지법의 제정이 차별과 다양성에 대한 사회적 대화를 촉발하는 계기가 될 거라 전망했다. 장 의원은 “우리는 우리가 안다고 생각했던 차별에 대해 더 많이 이야기하고, 어떻게 행동하는 것이 서로를 존중하는 것인지에 대해 인내심을 가지고 대화할 준비를 해야 한다”고 말했다. 박한희 변호사는 차별금지법의 마련이 매우 기본적인 과제라고 언급하며 “차별금지법이 마련되고 나면 동성결혼 법제화 등 더 적극적인 의제들도 논의될 수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인식 변화에 따라 법이 바뀌기도 하지만, 법의 변화를 통해 인식의 변화가 도출되기도 한다. 개정 근로기준법(직장내괴롭힘법)이 대표적 예시다. 직장 내 괴롭힘은 불과 몇 년 사이에 새로 생긴 개념이다. 이전까진 소위 ‘갑질’로 불리며 개인의 일탈로 치부되던 행위가 직장 내 위계에서 비롯된 구조적인 폭력이자 사회적 차원에서 다뤄야 할 문제로 인식되기 시작한 건 직장 내 괴롭힘에 대한 법적 논의가 이뤄지면서다. 성소수자에 대한 편견과 고정관념이 만연한 한국사회에서 개인이 차별을 인식하는 일이 늘 쉽지는 않다. 포괄적 차별금지법 제정은 사람들이 어떤 행위가 차별이 될 수 있는지 인지하고 서로를 위해 자신의 편견과 고정관념을 성찰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
안전하게 학교 가고 평등하게 교육받을 권리
노동할 권리는 교육받을 권리와 밀접하게 연결된다. 장혜영 의원은 “교육과 노동은 생존의 문제”라 말한다. 교육은 노동시장과 직결되고, 노동은 생계를 유지하는 데 필수적인 활동이다. 양질의 교육을 받을 기회가 차단되면 그만큼 ‘선택’의 폭이 좁아져 열악한 노동환경에 내몰릴 가능성이 크다.
트랜스젠더퀴어인 아동과 청소년은 학교라는 공간에서 자주 배제되고, 이는 마땅한 교육 기회의 박탈로 이어진다. 지난해 인권위가 발표한 ‘트랜스젠더 혐오차별 실태조사’ 결과에 따르면 트랜스젠더 대다수가 교육 현장에서 자신의 정체성으로 인해 차별과 혐오를 경험한 것으로 나타났다. 따돌림과 괴롭힘 끝에 학교를 떠나는 트랜스젠더 청소년들은 학습권을 박탈당할 뿐만 아니라 노동시장 진입을 위해 필요한 자격이나 학력을 얻을 기회를 잃는다.
성소수자 학생에게 안전한 학교는 어떻게 만들어질 수 있을까. 박한희 변호사는 “사전 예방교육을 할 수 있는 시스템이 갖춰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교육과정에 성소수자 인권을 비롯한 다양한 인권 담론이 포함돼야 한다는 것이다. 포용적인 교육환경을 만들기 위한 노력도 요구된다. 대만은 2004년 성평등교육법을 제정해 성소수자 학생 보호를 명시하고 편견과 혐오를 가르칠 수 없도록 규정했다. 대만 인권운동가들은 2019년 대만에서 동성결혼 법제화가 이뤄진 배경엔 성평등교육법의 기여가 컸다고 평가한다. 성평등교육법이 시행되는 학교에서 교육받은 세대가 이제 성인으로 성장해 포용적인 사회를 일구는 데 앞장서고 있다는 것이다.

사회는 이미 변화하고 있다
최근 석 달 사이 커밍아웃한 트랜스젠더들의 부고 소식이 잇따랐다. 차별금지법이 있었다면 이같은 ‘사회적 타살’이 줄어들 수 있었을 거라는 목소리가 높다. 무력감에 내몰릴 법한 시기임에도, 현장에서 싸워온 사람들은 희망적 미래에 대한 곧은 확신을 간직하고 있다. 지난 4월 7일 치러진 서울시장 보궐선거 결과를 두고 박한희 변호사는 “(성소수자 인권 문제가) 정치적 의제가 됐다는 것 자체가 하나의 의미있는 성과”라 짚었다. 인권 문제가 중요한 의제가 될수록 더 많은 논의의 가능성이 열린다. 박 변호사는 2000년대 초반에 비해 퀴어의 존재가 훨씬 가시화됐다며 “갈 길이 남았지만, 발전해 나가는 과정인 것 같다”고 말했다.
사회는 변하고 있다. 장혜영 의원은 “더 나은 사회를 만들어 갈 책무를 지닌 정치인들이 과대대표된 반대의 목소리와 ‘사회적 합의’라는 말 뒤에 숨어 혐오와 차별을 방관해 온 것이 현실”이라 지적하면서도 “사회 구성원들의 인식은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확신을 표했다. 지난해 6월 인권위가 발표한 ‘혐오차별에 대한 국민인식 조사’ 결과 응답자의 88.5%가 차별금지법 제정에 찬성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응답자의 73.6%가 동성애자와 트랜스젠더 등 성소수자도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존중받아야 하고 동등한 대우를 받아야 한다고 답했다.
학교현장에선 이미 변화의 바람이 일고 있다. 지난 4월 1일 서울시교육청이 발표한 제2기 학생인권종합계획(2021~2023)은 처음으로 ‘성소수자 학생’을 호명하고 이들에 대한 구체적인 보호 및 지원 방안을 담았다. 서울시교육청관계자는 〈한겨레〉와의 인터뷰에서 ‘시민단체 등을 통해 성소수자 학생들에 대한 차별·혐오 사례가 꾸준히 보고되는 상황에서 이 학생들의 고통을 더 이상 외면할 수는 없다는 판단 아래 관련 내용을 넣게 됐다’고 설명했다. 시민들은 무지와 편견, 차별로 인한 희생이 발생하지 않는 사회를 꾸준히 요구해왔다. 학교와 기업들은 이미 변화의 궤도에 올랐다. 장혜영 의원은 “이제 정치가 응답할 차례”라 강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