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 혁신의 꿈은 이뤄질 수 있을까

고교학점제가 마주할 현실과 넘어야 할 산

  고교학점제는 학생의 자율성에 주목한다. 학생들이 무엇을 배울 것인지 스스로 선택하며 주체적인 삶의 즐거움을 배울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고교학점제가 학교에 잘 자리 잡으 려면 고교학점제 정책을 수정하고 보완해 나가는 것도 중요하 지만, 대학입시 등 여타의 교육제도와도 서로 합이 맞아야 한 다. 입시 경쟁으로 살벌한 교육 현장에서 고교학점제가 학생 의 자율성 신장이라는 애초의 취지를 잃어버리지 않을 수 있 을까. 지금까지 고교학점제 자체의 쟁점을 살펴봤다면, 이제 우리 교육현실 속에서 고교학점제가 마주할 어려움을 보자.

교육 정책의 블랙홀, 대학입시의 굴레 

  고교학점제(학점제)가 도입되면 학생들은 학교가 제공하는 다양한 수업들 가운데 자신의 진로 적성에 맞는 교과목을 선 택해 듣게 된다. 모두가 같은 교육과정을 밟으며 대입을 준비 했던 이전과 다르게, 저마다 개별화된 교육과정 하에서 입시 를 치르게 되는 것이다. 교육과 대학입시를 떼어놓고 보기 힘 든 우리나라에서 학점제가 기존의 대입 제도와 조화를 이룰 수 있을지에 대한 우려가 존재한다. 학점제는 크게 세 측면에 서 현행 대입 체제에 도전한다. ▲성취평가제도(절대평가제) 도입 ▲고교서열화 폐지 ▲정시 선발과의 충돌이다. 

① 고등학교 내신 평가를 절대평가제로 한다고? 

  학점제는 절대평가의 한 종류인 성취평가제를 토대로 운영 된다. 학생들이 내신 등급에 신경 쓰지 않고 원하는 수업을 듣 도록 하기 위해서다. 사실 우리 교육체계에서 절대평가 방식 이 처음 도입되는 건 아니다. 김대중 정부 시절 이미 ‘수우미 양가’에 기초해 절대평가가 실시된 적이 있었으나, 내신 부풀 리기 등의 문제 때문에 다시 상대평가로 전환됐다. 이에 ’성취 평가제는 불공정한 평가방식‘이라는 오명을 얻기도 했으며, 과정 중심 평가로 내신을 산출하면 학생에 대한 공정한 평가 가 어렵다는 불신도 생겨났다. 학점제 시범학교 교사 이 모 씨 는 “이미 과거에 내신 부풀리기로 인한 입시 혼란을 겪었기 때 문에 학교 현장에서 성취평가제 도입을 우려하는 게 어느 정 도 공감이 된다”고 말했다. 

  그러나 성취평가제 자체를 부정하기보다는 성취평가제의 도입을 위한 실질적인 내실화에 힘써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 다. 미림여자고등학교 주석훈 교장은 “지금까진 성취평가제 의 구체적 가이드라인을 만들어 확실히 정착시키려는 의지가 부족했기 때문에 신뢰를 얻지 못한 것”이라고 지적하며 두 가 지 방안을 제시했다. 하나는 국제 바칼로레아(IB) 교육과정을 바탕으로 전문적인 성취평가 체계를 도입하는 것이다. IB 교 육과정은 토론·논술형으로 이뤄져있어 체계적인 과정 중심 평가를 설계하는 데 참고할 수 있다. 다른 하나는 학교에 ‘공 정성 심의위원회’를 설치하는 방안이다. 평가 결과에 대한 학 생·학부모의 신뢰를 얻기 위함이다. 권오현 교수(독어교육과) 는 “이젠 평가를 위한 교육이 아니라 교육을 위한 평가를 생각 해야 할 때”라며 평가 방식을 결정함에 있어 교육의 본질에 대한 재고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② 견고한 고교 서열화의 벽 

  학점제 전면시행을 앞둔 지금, 성취평가제 도입만큼이나 중요한 과제가 있다. 고교 서열화 폐지다. 대학과 마찬가지로 외고와 자사고, 과학고, 일반고에도 대학입시 결과에 따라 공 공연한 서열이 매겨져 있다. 학점제가 시행되면 여러 학교가 모여 공동교육과정을 운영할 수 있는데, 지금처럼 서열화된 상황에서 특목고와 일반고 간에 공동교육과정이 원활하게 운 영될 수 있을지 의문이 제기된다. 여기에 절대평가 실시가 더 해지면 학생들이 특목고와 자사고 등으로 몰릴 수도 있다.

  정부는 외고·자사고를 2025년 폐지한다고 밝혔지만 전망 은 불투명하다. 자사고 일괄 폐지에 대한 헌법 소원이 진행되 고 있는 지금 서열화 철폐가 가능할지는 미지수다. 애초에 특 목·자사고 폐지가 올바른 방향인지에 대한 의견도 분분하다. 권오현 교수는 과거 서열화 철폐를 시도했다가 실패한 사례를 전했다. “이질적인 학생들이 한 학급에 모여 교육받았을 때 오 히려 학급 내 개별 학생 간 서열화가 심해져 ‘교실 붕괴’로 이 어졌던 경험을 기억해야 한다.” 섣부른 통합이 오히려 독이 될 수 있다는 지적이다. 

  그러나 학점제를 통해 고교서열화 문제가 대폭 완화될 수 있다는 시각도 존재한다. 서울대의 수시 전형을 설계한 김경 범 교수(서어서문학과)는 “기본적으로 고교학점제는 서열화 철폐가 아니라 새로운 서열의 기준을 만드는 제도”라고 설명 했다. 새로운 서열이란 무엇일까. 김 교수는 “지금의 서열은 대입 결과와 수능 성적”이라며 “이제는 ‘학교가 학생들에게 얼마나 좋은 수업을 제공하고 있는지’를 기준으로 고교 서열 이 짜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모든 학교가 대입 결과에 종속돼 소수의 상위권 학생만을 지도해온 관행을 넘어, 학생들이 자 신의 진로 적성에 맞게 개별화된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노력 해야 한다는 취지다.

  주석훈 교장은 “특목·자사고 폐지에만 집중할 것이 아니 라, 특정 고교만 독점하고 있있었던 학생 우선 선발권을 일반 고에게도 제공해 공교육의 상향평준화를 이뤄야 한다”고 역 설했다. 학생 선발권이 모든 학교에 제공되면, 학교는 학생 모 집을 위해 각자 차별화된 교육과정을 구축하고자 힘쓸 것이기 때문이다. 장기적으로 모든 일반고가 다양한 교육과정을 마 련할 ‘역량’을 갖출 수 있도록 지원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 다. 권오현 교수는 “일반고가 다양한 학생들의 요구를 반영하 는 과목을 모두 개설해 일반고·특목고·자사고·특성화고 역할 을 동시에 수행하기까지는 어려움이 굉장히 많을 것”이라며 “개별 학교 내에서 선택과목 다양화가 이뤄져야 학점제가 유 명무실해지지 않는다 ”고 강조했다.

③ 수능과 고교학점제의 불협화음 

  대학입시에 있어 수능의 영향력은 매우 강하다. 학생들은 수능과 상관없이 듣고 싶은 수업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을 까. 다양한 수업이 개설돼도 학생들은 사실상 수능에서 다뤄 지는 필수 과목을 선택할 가능성이 크다. 다양한 과학탐구·사 회탐구 과목 중에서 학생들이 자신의 관심 분야를 골라 들을 수 있도록 설계됐던 ‘선택형 교과 확대 교육과정’도 결국 수능 과 연관된 특정 교과에 쏠림 현상이 발생하는 등 부작용만 남 기고 사라졌다. 

  수능이 바뀐다면 어떨까. 고교학점제와 연동되는 ‘미래형 수능’이 논의되고 있다. 2028년도 미래형 수능 연구가 여 럿 발표되는 가운데 절대평가·자격고사화·논술 및 서술형 도 입 등이 긍정적으로 검토된다. 권오현 교수는 “대입제도가 학 생부 종합전형처럼 철저하게 학교 교육을 기반으로 운영돼야 한다”며 “수능과 같은 국가 수준의 표준화 시험을 절대평가로 치러 자격고사로 전환하는 방안이 가장 합리적”이라고 역설 했다. 

  이러한 미래형 수능 논의와 별개로, 현 정부는 정시 선발 확대를 기조로 삼고 있다. 엄격한 서열화를 통해 대학에서 공 정하게 학생을 선발하자는 국민적 요구를 반영한 것이다. 그 러나 수능이 담보하는 공정성에 대한 인식부터 재고해봐야 한 다는 지적이 나온다. 김경범 교수는 “우리 교육에서 공정이라 는 개념은 그 실체를 잃어버린 지 오래”라며 “해방 이후 우리 나라의 교육은 언제나 학생들을 줄 세워왔기 때문에 오로지 서열화를 통한 선발만이 입시의 유일한 공정이라 믿는 것일 수 있다”고 지적했다.  ‘

  권오현 교수는 “정시와 수시를 일대일로 비교해서는 공정 성에 대한 제대로 된 논의가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수능은 절 차의 공정함을 강조한다. 다 같이 오지선다형 객관식 시험을 치르면 누군가의 주관이 개입되지 않은 순수한 능력치가 드러 날 것이라는 전제다. 그러나 수시는 시험 결과뿐만 아니라 학 습 과정도 본다. 교육의 목적이 학생 개인의 성장에 있다는 점 에 주목해, 학생이 어떤 발전 가능성을 지녔는지를 살펴보겠 다는 것이다. 수능이 가장 공정하다는 믿음은 결국 교육의 목 적이 대입과 학생 선발에 있다는 신념에서 비롯된다. 이는 공 정성이 절차상의 엄격한 서열화를 통해서만 실현될 수 있다는 생각을 낳았다. 

  학점제는 수능의 줄 세우기 방식과는 거리가 멀다. 모든 학생이 각기 다른 교육과정에 따라 학습하기 때문에 애초에 줄 세우기가 불가능하다. 학점제와 현행 대입 제도의 조화를 이 루기 위한 고민이 필요한 이유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학점제 와 대입 간의 갈등이 미래 교육 현장에서까지 핵심 쟁점으로 남진 않을 것이라 예측한다. 학령인구의 감소 때문이다. 김경 범 교수는 “저출생으로 학생 수가 계속 줄고 있기 때문에 앞으 로 대학입시의 판도도 크게 변할 것”이라고 분석했다. 김 교 수는 “2025년 이후에는 전체 대학 중 단 15% 정도만이 선발 이 필요한 입시를 치르게 될 것이고, 대부분의 대학은 학생 충 원만으로도 급급한 상황을 마주하게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지금과 같이 모든 학생이 오로지 대학 ‘입학’만을 위해 공부하 는 상황은 자연스럽게 해소될 것이란 전망이다. 김 교수는 “현재 대입제도와의 균형 역시 섬세하게 고려해야 하나, 지나치 게 근시안적 사고에 빠져 미래 교육에 정말 필요한 질문을 놓 쳐서는 안 될 것”이라 말했다. 대학 진학을 목표로 하는 소수 만을 위한 교육이 아닌, 사회 구성원으로서 자신만의 진로 적 성을 찾아나갈 모두를 위한 교육이 무엇인지 고민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고교학점제 시범학교인 경북일고의 한 시간표 ⓒ정예림 기자

고교학점제와 사회 불평등? 

  모든 교육문제는 사회 불평등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학점 제 역시 사회 불평등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일각에서는 학점제를 시행하면 오히려 지역과 소득 수준 격차에 따른 교 육 불평등이 심화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된다. 농촌 지역의 교육 인프라는 수도권에 비해 매우 부실하다. 모든 학교가 다 양하고 내실 있는 교육과정을 제공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춘 것 은 아니라는 뜻이다. 그러나 오히려 학점제가 불평등을 감소 시킬 수 있다는 의견도 있다. 권오현 교수는 “도농 격차로 인 한 교육 불평등을 줄이려면 모두에게 평등한 학습 기회를 제 공해야 한다”며 “학점제는 선택과목을 운영하고 이수하는 방 식에서 학교 간 공동교육과정이나 온라인 교육을 이용하는 등 기존보다 유연성이 크기 때문에 오히려 학교 간 편차가 줄어 들 수 있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학점제에 있어 ‘온라인 아카이브’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온라인 학습플랫폼을 구축해 기초부터 심화 수준까 지 상세한 설명이 담긴 교수학습 자료를 공유할 수 있는 ‘수업 아카이브’를 만들자는 제안이다. 주석훈 교장은 “온라인 아카 이브를 활용해 학교 간 온라인 공동교육과정을 운영한다면 교 육 접근성이 떨어지는 중소도시의 학생들도 양질의 학습 콘텐 츠를 접할 수 있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권오현 교수는 소규 모 학교들이 학점제에 적응할 수 있도록 교육청 소속 교사를 학교에 파견하는 교육청 교사 파견제도도 함께 고려해야 한다 고 주장했다. 

  그러나 지역 격차가 해소되더라도, 소득 수준 격차에 따른 지금의 사회 불평등이 교육 불평등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온 전히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우리교육연구소 이현 대표는 “학 점제가 추구하는 교육과정의 다양화가 오히려 불평등의 재생 산을 강화할 수도 있다”고 설명했다. 사교육을 통한 선행학습 이 잘 돼 있는 학생들만 심화 교과를 수강하고 그렇지 못한 학 생들은 기초 교과를 선택하며 교육과정 자체의 서열화가 생길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대표는 “학점제 하에서 학교는 불평등 의 원인을 해당 교과를 선택한 학생의 책임으로 돌리기 때문 에 더욱 문제가 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그것이 학점 제 도입을 전면 부정해야 하는 이유일 수는 없다. 김경범 교수 는 “단일 정책으로 세상이 바뀌고 모든 사회 불평등이 해소될 수는 없다”며 “결국 교육, 정치, 사회 모든 영역이 조화를 이뤄 하나의 정책적 방향성이 형성되고, 각 영역이 순차적으로 발 전해 나갈 때 사회가 변한다”고 힘줘 말했다. 

지금, 우리가 교육 혁신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 

  지난해 6월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이 고교 교사 조합원 1,387명을 대상으로 고교학점제 인식 설문조사를 실시한 결 과 절반 이상이 고교학점제로 학생의 과목 선택권이 늘어나 는 것에 반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아직 학점제에 대한 보편 적 공감대가 마련돼 있지 않음을 방증하는 결과다. 권오현 교 수는 “학점제의 성공을 위해서는 교사의 역할이 중요하다”며 “교사가 학점제의 취지를 명확하게 파악하고 교육과정을 바 르게 수행할 수 있도록 정부에서 순회교사 채용, 업무 보조인 력 배치, 다과목 연수 제공 등의 제도적 장치를 병행해야 한 다”고 말했다. 주석훈 교장은 학점제의 안착을 위해선 교사뿐 만 아니라, 학생, 학부모, 지역사회를 아우르는 모든 교육 주 체가 학점제의 취지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바탕으로 협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주 교장은 “학점제를 처음 도입할 땐 교사와 학생들 모두 어색하고 힘들어했지만, 학생의 성장이 교육의 중심이 돼야 한다는 공감대를 형성하며 성공적으로 변화를 만 들 수 있었다”고 말했다. 

  학점제는 단순한 교육 정책이 아니라, 자율성이 강조되는 미래 사회에 대응하기 위한 고등교육 체제 개편의 큰 틀에 가 깝다. 교육 전문가들이 입을 모아 “고교학점제는 도입 자체가 목적이 아닌, 결과로서 달성해야 하는 교육의 방향성”이라고 말하는 이유다. 고교학점제가 변화의 유일한 정답은 아닐 순 있지만 모든 학생이 주체적인 삶을 꾸려가는 사회를 만들자는 취지만큼은 오답일 수 없다. 지금, 우리가 학점제 속 교육 혁 신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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