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어이 가능한 세계
나와 당신 사이의 거리, ‘구역질 나는 마음의 냉정함’
죽음 이후에도 끈질기게 달라붙는 낙인, 무연고자

나와 당신 사이의 거리, ‘구역질 나는 마음의 냉정함’

토니 케이 감독의 《디태치먼트》 (2011)
학생들과 처음으로 마주하는 헨리 ©영화 《디태치먼트》 공식 스틸컷

본 기사는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교사들은 왜 교직을 택했을까. 질문에 대한 교사들의 답으로 영화는 시작한다. 이들 중 특별히 교육에 대한 열정과 사명감을 가지고 교직에 몸담은 사람은 없다. 흔히 교사는 방황하는 학생을 지혜와 희생으로 감화시키는 존재로 그려진다. 《디태치먼트》는 교육에 대한 이러한 낭만적 이상과는 사뭇 다른 냉정한 현실을 담고 있다. 영화는 교육이 일방적인 가르침이나 봉사가 아닌 인간 대 인간의 수평적인 교감일 수밖에 없으며, 또 그래야만 한다고 말한다.

서로가 서로를 포기한 교실

  미국 뉴욕의 한 고등학교. 이곳은 이른바 ‘문제아’들이 떠넘겨지는 곳이다. ‘조용히 하고 자리에 앉으라’는 교사의 외침은 한낱 소음이 돼 허공에 흩어진다. 학생이 입에 담기 힘든 욕설을 하고 침을 뱉을 때 교사의 얼굴에 번지는 모욕감을 카메라는 확대해서 보여준다. 복도와 교실은 교사와 학생들로 북적이지만 이들에게 서로의 존재는 진정한 의미를 상실한 지 오래다. 교사와 학생들은 그저 교실에서 자리만 지킬 뿐, 이들 사이에 그 이상의 소통과 교감은 없다.

  진심과 선의가 짓밟혀진 교사는 한 인간으로서 상처받고, 분노하고, 이내 무기력함을 느낀다. 상담교사 파커는 학생들과 개별 면담을 가지면서 누구보다 가까이에서 학생들을 지도하려고 애쓴다. 삶에 대한 진정한 애정을 찾아볼 수 없는 학생들 앞에서 파커는 지쳐만 간다. 앞으로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는 학생을 보며 그는 억눌렀던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얕고 끔찍한 존재”라며 “네 인생엔 희망도 열정도 없다”고 비난을 퍼붓는다. 

  헨리는 학교에 새로 부임한 임시교사다. 임시교사에겐 학생들과 친해지거나 그들의 인생에 깊이 관여할 책임이 없다. 헨리는 그저 정규교사가 올 때까지 자리를 대신할 뿐이다. 그는 학생들에게 어떠한 감정도 싣지 않은 채 철저히 거리를 둔다. 무표정한 얼굴로 처음 학생들과 마주한 그는 “여기에 있는 것이 싫다면 수 업에 오지 않아도 된다”고 말한다. 그에게 폭언을 퍼부은 학생에게 그는 담담한 얼굴로 자신은 상처를 받을 감정조차 없 는 텅 빈 가방과 같다고 대꾸한다.

  헨리의 무심한 태도와는 달리 그의 문학 수업은 그 어떤 수업보다 학생들의 마음 깊숙이 다가간다. 수업은 학생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적는 것으로 시작한다. 학생들의 글 속엔 부모의 무심함이 만들어낸 상처, 자신을 진심으로 위하는 사람이 없는 현실 등이 엿보인다. 온몸을 짓누르는 삶의 무게를 느낀 적이 있냐는 헨리의 물음에 학생들 모두 조용히 손을 든다. 이들은 아무 생각 없이 살아가는 ‘얕은 존재’가 아니었다. 고통에 잠식되지 않기 위해 몸부림치는 ‘연약한 존재’였을 뿐이다.

학생들과 처음으로 마주하는 헨리 ©영화 《디태치먼트》 공식 스틸컷

타인에게 내어줄 수 있는 마음의 공간

  장면들 사이에 삽입된 헨리의 인터뷰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그의 내면을 보여준다. 학생들과 애착을 쌓는 것을 피하는 헨리지만, 그는 아이들이 복잡한 세상을 무사히 헤쳐나갈 수 있도록 교사가 지침을 제공해줘야 한다고 믿는다. 삶이라는 혼돈의 바다에서 표류하고 있는 아이에게 교사는 보트 위에서 부표를 던져줄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교사 역시 의지할 곳 없이 파도에 하염없이 떠밀리고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카메라는 교사와 학생의 얼굴을 같은 눈높이에서 바라보며 이들을 각자의 문제를 안고 있는 동등한 인간으로 그려낸다.

  학교 안에서 냉정함과 여유를 유지하는 헨리는 학교를 나와서는 매일 밤 길거리를 정처 없이 방황한다. 헨리가 학생들과 거리를 유지하려 하면서도 이들이 가진 상처를 예리하게 포착할 수 있는 건 그에게 어린 시절의 상처가 남아있어서다. 7살에 엄마의 자살을 목격한 헨리는 그 원인이 할아버지가 어린 시절의 엄마를 성적으로 학대했기 때문이라고 의심한다. 병원에서 죽어가는 할아버지를 위로하면서 헨리는 죽은 엄마를 떠올린다. 엄마의 자살로 인한 트라우마, 어린 시절부터 자신을 키워준 유일한 가족인 할아버지에 대한 복잡한 감정은 헨리가 다른 사람에게 마음을 내어주는 것을 막는다. 

  그런 그에게 에리카, 메레디스의 만남은 잔잔한 파동을 불러온다. 길거리를 방황하던 헨리는 에리카를 만난다. 에리카는 성매매로 생계를 유지하는 학교 밖 청소년이다. 어린 시절부터 성적으로 착취당한 에리카를 보면서 그는 엄마를 떠올린다. 에리카를 차마 외면하지 못한 헨리는 자신의 집에서 음식과 잠자리를 내어준다. 한 번도 가족이란 걸 제대로 가져본 적 없는 그들은 그날부터 서로의 가족이 된다. 비어있던 냉장고가 채워지고, 적막했던 집에 온기와 웃음소리가 흐른다. 헨리는 자신에게 어떠한 기대도 하지 말라고 선을 그으면서도, 에리카의 상처를 치료해주고 병원에서 검진을 받게 돕는다. 검진이 끝나고 들른 문구점에서 에리카가 헨리의 세 번째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주는 순간, 헨리는 자신에게 특별한 의미를 갖는 타인이 생겼음을 어렴풋이 느낀다.

문구점에서 서로를 위해 산 선물을 교환하는 헨리와 에리카 ©영화 《디태치먼트》 공식 스틸컷

  헨리를 향한 메레디스의 애착은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다. 집과 학교 중 어디에서도 제대로 이해받지 못하는 메레디스는 카메라로 사람들의 얼굴을 유심히 관찰하고 사진으로 남기는 취미가 있다. 어쩌면 그는 자신이 카메라를 통해 다른 사람의 감정을 알아보듯이, 누군가도 그렇게 자신을 알아봐 주기를 바란 것일지 모른다. 메레디스는 학교를 거니는 헨리의 얼굴을 카메라에 담는다. 슬픔과 공허함이 느껴지는 얼굴이다. 수업에서 세상의 절망을 얘기하는 헨리가 자신이 느끼는 삶의 비참함을 이해해줄 수 있을 거라 기대했던 것일까.

  헨리는 메레디스의 슬픔을 이해한다. 하지만 상처를 치유하는 것은 상처를 알아보는 것보다 더 큰 마음의 무게가 필요하다. 표류하는 자신에게 부표가 돼줄 것을 기대했던 메레디스에게 헨리는 의도치 않은 상처를 준다. 게다가 헨리와 메레디스의 사이를 오해한 동료 교사의 추궁은 할아버지에 대한 헨리의 해묵은 감정을 터뜨린다. 헨리는 에리카와의 관계 역시 사람들로부터 매도될 것이라는 생각에 견디지 못한다.

  제대로 애정을 받은 적도, 준 적도 없는 헨리는 자신이 에리카에게 필요한 것을 줄 수 없다고 느낀다. 울며 매달리는 에리카를 청소년 보호시설로 보낸 헨리는 학생들에게도 작별인사를 하며 타인에게 잠시 내주었던 마음의 공간을 다시 비울 준비를 한다. 이전의 삶으로 돌아가려는 헨리를 붙잡는 건 메레디스가 자기 자신을 지키기 위해 내린 마지막 선택이다. 두 번째로 죽음을 눈앞에서 목격한 헨리는 누구에게도 마음을 허락하지 않는 텅 빈 마음을 갖는다는 것의 의미를 실감한다. 그는 자신이 형체가 없는 껍데기와 같다고 읊조린다.

무의미한 존재로 홀로 남겨지지 않도록

  헨리는 자신의 상처를 극복하지도, 학생들에게 변화를 만들지도 못했다. 그러나 영화는 암울한 현실을 지적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메레디스를 지키지 못한 헨리는 학생들이 무너져내리지 않도록, 무의미한 존재로 홀로 남겨지지 않도록 지켜줘야 한다고 말한다. 그의 말을 통해 우리는 존재함의 의미를 되묻는다. 타인과 분리되어 홀로 존재하는 것은 곧 존재의 의미를 상실한 것과 같다. 청소년 보호시설에 찾아가 에리카와 재회하는 헨리의 뒷모습은 그가 더 이상 과거의 트라우마에 갇혀있지만은 않을 것임을 암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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