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교학점제, 그 밑에 도사린 암초들

고교학점제는 원활하게 시행될 수 있을까

  모든 정책은 목표를 갖고 있다. 정책은 구체적인 실행계획을 통해 목표를 이뤄나간다. 그러나 매번 정책이 의도한 결과만 산출되지는 않는다. 의도치 않은 결과에 대한 반성은 정책의 수정으로 이어지고, 아예 정책이 엎어지기도 한다. 정부가 2017년부터 추진해온 고교학점제도 여러 부작용을 피하지 못했다. 고교학점제 시범 운영 과정에서 제기된 문제들을 통해 우리가 배워야할 점은 무엇일까. 고교학점제를 둘러싼 쟁점들을 살펴봤다.

학생에게 주어지는 과목선택권

  고교학점제(학점제)는 학생이 진로와 적성에 따라 과목을 선택하고, 최소 출석일수와 성취수준을 충족한 과목의 학점을 취득해 졸업하는 제도다. 과목선택권과 최소 성취수준은 학점제를 이루는 두 축이다. 이 중에서도 학생이 듣고 싶은 과목을 직접 선택할 수 있다는 아이디어는 일찍부터 주목받았다. 교육부는 학생을 학업설계의 주체로 키우고, 학교를 각 학생에게 맞춤형 교육과정을 제공하는 곳으로 만들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학생의 수업선택권은 이전부터 강조돼왔다. 1997년에 발표된 제7차 교육과정부터 오늘의 학점제에 이르기까지, 학생의 자율성은 한국의 교육과정사(史)를 관통하는 하나의 흐름이었다. ‘교육을 바꾸는 사람들’ 이찬승 대표는 “매우 획일적이었던 한국의 교육시스템이 7차 교육과정 이후로는 개인의 선택을 강조하기 시작했다”고 설명했다. 배움의 내용과 방식을 학생이 직접 결정하게 해 ‘자기주도적’ 학습자를 길러내려는 목적이었다. 김포제일고등학교 김민선 교사는 “학생들의 선택권과 자율성의 확대가 흥미와 학습 동기를 기르는 데에 긍정적 영향을 미친다”고 말했다.

  학생들은 희망 진로에 따라 듣고 싶은 과목을 선택하는데 대체로 만족감을 나타냈다. 인화여자고등학교에 재학 중인 이채은 씨는 “인생계획에 대한 고민을 많이 하게 됐다”며 “내가 무엇을 할지 선택할 기회가 주어지다보니 나 스스로에 대한 공부가 많이 된다”고 말했다. 경북일고등학교의 이수경, 김민교, 박차영 씨는 “내가 배우고 싶은 걸 배우는 게 좋다”고 입을 모았다. 경북일고 김유진 교사는 “학생들이 단순히 친구나 선생님을 따라서 과목을 선택한다고 보긴 어렵다”며 실제 과목 선택은 진로와의 연계성을 고려해 이뤄진다고 강조했다. 

  학생들이 직접 들을 과목을 선택하게 되자 수업 분위기도 더욱 활발해졌다. 인화여고 전효진 교사는 “하위권 학생들이 진로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하고, 수업시간에 자는 학생들이 줄어들었다”고 교실 분위기를 전했다. 김유진 교사 역시 “학생 본인이 과목을 선택해서 (수업에) 들어오다 보니 학생들의 참여도가 높아진다”고 설명했다.

과목선택권에 취해 놓쳐서는 안 될 것들
  그러나 모든 학생이 자신의 진로를 찾아 그에 맞는 과목을 선택하는 것은 아니다. 이수경 씨는 진로를 정하지 못한 주변 학생들의 경우 과목을 선택하는 데 부담을 느끼는 경우가 많다고 전했다. 김민선 교사는 “진로 결정과 과목 선택을 어려워하는 학생이 정말 많다”고 우려를 표했다.

  문제는 진로교육의 부족에 있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학교에서 이뤄지는 진로교육만으로 학생들의 진로 고민을 해결하기엔 역부족이라는 것이다. 김민선 교사는 “학생들은 고등학교 1학년 때 진로 과목을 듣지만 대체로 4차 산업혁명이나 유망직종을 배우는 것에 그친다”고 지적했다. 학생 본인이 진로를 고민하고 탐색해볼 시간은 상대적으로 부족하다. 김유진 교사는 “학생이 이미 희망 진로를 정한 경우에는 해당 직업과 관련된 과목을 소개해주긴 하지만, 진로교육이 학생의 진로 탐색 자체를 많이 도와주진 못한다”고 말했다.

▲현재 학교에서는 각 과목 관련 학과 등을 소개하고 있지만 내실 있는 진로지도까지는 갈 길이 멀다. 

  당장 학생들부터 학교의 내실 있는 진로지도를 요구하고 

나선다. 이채은 씨는 “진로를 탐색해볼 기회가 많았으면 좋겠다”며 “중학교 때부터 진로 탐색에 대한 확실한 지원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학교 현장에서 진로가 곧 진학으로 취급된다는 점도 지적된다. 안동대학교 이상은 교수(교육공학과)는 “그동안 한국 학교에서 진로지도는 입시지도에 가까웠다”며 “학생 개개인이 무엇을 잘하고 좋아하는지를 파악해서 체계적인 진로지도를 해줄 수 있느냐가 학점제 성공의 관건이 될 수 있다”고 진로지도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학생들이 과목 선택에 어려움을 겪는 원인이 부실한 진로

교육뿐만 아니라 번잡한 과목 편성에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이상은 교수는 “학점제를 시범 운영하는 연구학교는 지원금을 받기 때문에 업적을 내야 하는 상황”이라며 “여러 과목을 보여주기식으로 개설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고 지적했다. 현재 고등학교의 과목 수는 300개가 넘는다. 고려대학교 홍후조 교수(교육학과)는 “선택지가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는 생각으로 주당 1~2시간 정도의 ‘조무래기’ 과목을 만들다 보면 오히려 학생들이 더 혼란스러워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홍 교수는 진로에 따라 과목 편제를 재구성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진로별로 여러 과목을 모아 단위수가 큰 하나의 과목으로 만드는 방법이다. 홍 교수는 해당 과목이 어느 진로 분야에 해당하는지(인문용·사회용·이과용·예술용·체육용)을 드러냄으로써 학생들에게 과목 선택의 가이드라인을 제공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학생의 자율성만 강조하다 자칫 교육이 ‘쇼핑’으로 치부되

지는 않을지 우려가 제기된다. 김민선 교사는 “자신의 진로에 필요한 과목만 들으면 되는 것 아니냐는 생각을 경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학생들의 전인적 성장을 위해선 다양한 분야의 지식을 접하는 과정이 필요한데, 학점제로 인해 자칫 학생들이 한정된 분야에 갇힐 수 있다는 지적이다. 이상은 교수는 교육의 가치를 경제적으로만 바라봐선 안 된다고 말한다. 이 교수는 “경제 활동에서는 물건의 장단점을 알고 판단할 수 있지만, 수업은 다 배워보기 전에는 미리 그 가치를 알 수 없다”고 강조했다. 당장의 흥미만으로 배우고 싶은 걸 고르다 보면 진정으로 배워야 할 것을 놓칠 수 있다는 것이다.

  필수과목은 학생들이 해당 시기에 꼭 배워야 할 내용을 담고 있어 선택과목 못지않게 중요하다. 우리교육연구소 이현 대표는 “한국은 이미 적은 필수과목 비중을 더 줄이려고 한다”며 “급변하는 사회에서는 보편적인 지적 능력과 폭넓은 안목을 키우는 게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이상은 교수는 “어떤 학생에게는 고등학교가 공식 교육의 끝일 수도 있는데, 재미없다는 이유만으로 필수과목을 제대로 가르치지 않고 내보내서는 안 된다”며 기존 필수과목 수업의 개선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필수과목과 선택과목의 비중을 둘러싼 논쟁이 치열한 가운데, 교육부는 학점제 시행 4년차이자 전면 도입을 3년 앞둔 지금까지도 필수과목과 선택과목 비율을 발표하지 않았다. 현재로서는 내년에 있을 2022 개정 교육과정 발표와 함께 필수·선택과목 비율이 공개될 예정이다. 교육부의 발표가 너무 늦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현 대표는 “필수·선택과목 비율을 아직도 결정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교육부가 학점제를 본격적으로 시행할 준비가 됐는지 의문을 품게 한다”며 교육부의 무책임한 태도를 꼬집었다.

교사가 부족합니다

  선택과목 비중이 얼마나 돼야 할지에 대한 고민은 잠시 미뤄두더라도, 학생의 과목선택권을 충분히 보장할 수 있으려면 우선 교사 수가 충분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학생들이 원하는 과목을 개설하기 위해서는 그만큼 많은 교원이 필요하다. 그러나 일선 학교의 교사 수는 현저히 부족한 상황. 여러 개의 과목을 개설하느라 교사들은 격무에 시달린다. 전효진 교사는 “학점제를 시행한 지난 학기에는 3과목을 맡는 교사도 많았다”고 설명했다. 보통 교사들은 많으면 두 개 정도의 과목을 맡는데, 학점제 이후 과목 수가 늘어났다는 얘기다. 초과근무 횟수가 많아졌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김민선 교사는 “출근 시간보다 2시간 일찍 출근하고 퇴근 시간보다 4~5시간 늦게 퇴근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털어놨다.

▲고교학점제 연구학교 교사들이 학점제로 인한 교원의 업무 부담 증가를 지적하고 있다.  ⓒ고교학점제 TV 유튜브 캡쳐

  한편 교사가 새로 맡게 되는 과목 중에는 한 번도 가르쳐보지 않은 낯선 과목도 포함된다. 인화여고 서영진 교사는 “원래 수학교사인데 저번 학기에 갑자기 심리학 과목을 맡게 돼 부담스러웠다”고 설명했다. 문제가 터지자 교육부는 현직 교원을 대상으로 새로운 과목에 대한 복수전공·부전공 과정을 상시 운영하겠다고 밝혔지만, 김민선 교사는 “업무량이 과도한 상황에서 교육부가 교원들을 더욱 짜내겠다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교사의 과도한 업무량 문제는 결국 교원 수가 부족한 데서 비롯된다. 교육부는 교원 부족을 의식해 ▲여러 학교가 함께 수업을 개설하는 공동교육과정 ▲교과목 순회교사제도 ▲임용체제 개선 ▲사범대 복·부전 활성화 등의 대책을 내놓았다. 다만 임용체제 개선이나 사범대 복·부전 활성화는 장기적 계획이어서 단기간에 효과를 내긴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공동교육과정을 위해 여러 개의 학교가 함께 수업을 개설하고 운영한다. ⓒ강원도교육청

  이중 공동교육과정은 이미 여러 시범학교에서 시행 중이

다. 현장에서는 운영상의 어려움이 있을 뿐 아니라 교원수급 문제를 해결하기엔 부족하다는 반응이 많다. 서영진 교사는 “학교에 따라 학생 관리 시스템이 다르다 보니 (공동교육과정을) 조율하기가 쉽지 않다”고 말했다. 학교 간의 교원 품앗이를 이뤄내겠다는 교육부의 당초 취지가 왜곡되기도 한다. 교사 수가 이미 부족한 탓에 기존 교사에게 수업을 맡기는 대신 외부 강사를 채용하는 경우가 다반사다. 서 교사는 “학교 측에서 강사에 대해 완벽하게 파악하고 초빙하지는 않기 때문에 강사의 질이나 학생 만족도 관리 측면에서 더 많은 고민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외부 강사나 여러 학교를 돌며 수업하는 순회교사로 부족

한 교원 수요가 채워지면서, 현장의 교사들은 채용 업무로 또다시 골머리를 앓는다. 전효진 교사는 “이번 학기의 경우 개학 직전인 3월 1일까지 강사분들과 계약서를 썼다”며 “2월에도 채용 관련 업무를 하느라 다른 일을 거의 하기 어려웠다”고 털어놨다. 김민선 교사 역시 “윤리 과목 교사들이 모여 있는 단체 대화방에서 2월부터 지금까지 기간제 교사를 구한다는 공고가 끊이지 않고 있다”고 전했다.

  외부 강사와 순회교사에 의존하다간 교사의 비정규직화 문

제가 심화될 것이란 우려도 나온다. 김민선 교사는 “학점제로 인해 기간제 교사를 계속 채용하는데, 학생들이 선택하는 과목에 따라 필요한 교사가 늘기도 줄기도 하니 기간제 교원들의 불안정성 역시 커지는 상황”이라고 분석했다. 이어 김 교사는 “교육부가 정규 교원을 더 채용하는 방향의 대책은 내놓지 않으면서 비정규직을 양산하려는 꼼수를 부리고 있는 셈”이라며 “학교에는 훨씬 더 많은 교사가 필요하다”라고 호소했다.

최소 성취수준은 책임교육을 실현할 수 있을까

  학점제의 과목 선택에는 많은 관심이 집중되고 있지만, 최소 성취수준에 대한 논의는 턱없이 부족한 상황이다. 최소 성취수준을 달성하지 못한 과목은 미이수로 처리되며, 미이수과목이 많아지면 유급이 돼 졸업이 늦어질 수 있기 때문에 최소 성취수준은 학점제 운영에서 매우 중요한 사항이다. 이상은 교수는 “연구학교들이 최소 성취수준에 대해 문의할 땐 교육부가 명쾌한 답을 주지 않다가 2월에 와서야 기준을 발표했다”고 지적했다. 교육부는 올해 2월 과목 이수기준을 수업 횟수 3분의 2 이상의 출석과 학업성취율 40% 이상으로 하겠다고 발표했다. 교육부의 발표 전까지 연구학교 교사들에게는 부족한 분량의 연수만이 제공됐다. 전효진 교사는 “과목선택권의 경우 여러 시도를 해본 학교가 많은데, 최소 성취수준과 관련해서는 연구학교들도 이제야 시작하는 실정”이라고 말했다.

  한편 최소 성취수준의 필요성 자체에 대해선 찬성하는 목소리가 적지 않다. 이찬승 대표는 “그동안 학점제는 과목선택권 부여로 많은 주목을 받았지만 사실 학점제의 중요한 목표는 출석일수만으로 졸업자격을 줬던 무책임한 교육을 바꾸는 데 있다”고 설명했다. 학생들의 역량을 최소 성취수준에 맞게 끌어올릴 책임을 학교에 부여함으로써, 학생들을 경쟁시키고 떨어뜨리는 교육이 아닌 모든 학생을 책임지고 데려가는 교육을 시작할 수 있다는 것이다.

  최소 성취수준이 40%보다 높아져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이찬승 대표는 “교육과정 목표의 40%만 달성하면 졸업자격을 주겠다는 나라는 세계에서 한국이 유일하다”며 “이렇게 성취수준을 낮게 잡는 것은 책무성을 방기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비판했다. 이 대표는 궁극적으로 최소 성취수준을 60%까지 올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누가 최소 성취수준 충족 여부를 판단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갈렸다. 이상은 교수는 “국가나 시·도교육청의 표준화된 시험으로 달성 여부를 결정하기보다는, 현장에 있는 교사들의 판단에 맡겨야 한다”고 말했다. 반면 이현 대표는 “현장에서 평가의 난이도 조절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최소 성취수준 충족 여부가 얼마든지 갈릴 수 있다”며 대비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최소 성취수준으로 인한 학생들의 부담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나왔다. 이채은 씨는 “학생들이 최소 성취수준으로 너무 많은 부담을 느끼지 않도록 어떤 과목을 대상으로 지정할지에 대해 고민이 필요하다”는 의견을 전했다. 예체능 계열 학생 등 다양한 진로를 고민하는 학생들을 고려해 모든 과목에 일괄적으로 최소 성취수준을 적용하진 않아야 한다는 얘기다.

  고교학점제는 학생의 자율성을 존중함과 동시에 최소 성취수준을 둬 모든 학생을 책임지려는 시도다. 우리는 한국 교육의 문법이 바뀔 수도 있는 갈림길 앞에 서 있다. 하지만 고교학점제의 거대한 목표 아래에는 충돌을 조심해야 할 암초들이 도사리고 있다. 고교학점제가 전면 시행 단계에 다다를 때까지 무사히 순항할 수 있을지, 그 귀추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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