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지 않는 것을 보기 위해

 저널에 있는 1년 동안 제가 냈던 기사와 사진, 영상에는 항상 아쉬움이 남았습니다. 사진과 영상은 담아낼 수 있는 것이 많은 도구임에도 불구하고, 모든 피사체와 구도를 담아낼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촬영을 할 때는 최선의 피사체와 구도를 선택해야만 합니다. 즉, 어떤 것들은 선택되지 못하고 버려지기 마련입니다. 뷰파인더에 눈을 대고 프레임 안으로 피사체를 넣다 보면, 다른 한 쪽 눈에는 선택되지 못한 피사체들이 프레임을 빠져나가는 게 감긴 눈 사이로 희미하게 보입니다.

 저는 현장의 ‘공간’을 카메라에 있는 그대로 담아 독자에게 전달하고 싶었습니다. PD로서 사명감이나 책임감보다는 영상이라는 매체의 목적을 생각해보면 당연히 그래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2차원 평면 사진에 3차원 공간을 담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당연한 결과는 ‘당연히’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현장의 모든 구도와 피사체를 담지 않고서야 카메라에 공간을 담을 수는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카메라에는 마땅히 공간이 담겨야 한다는 생각에, 사진에 글을 써서 카메라의 화각을 넓히고자 했고, 영상에 음악을 넣어 날 것의 영상에 색을 칠했습 니다. 이렇게 하면 프레임 밖으로 빠져나간 피사체와 구도를 되찾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공간을 평면으로 옮기느라 사라진 하나의 차원을 다시 불러들일 수 있다고 본 것이죠.

 이런 저의 노력들은 대부분 실패했고, 제 희망은 헛된 것이었습니다. 사라진 차원을 다른 것으로 대체할 수는 없었습니다. 영상을 찍으면 공간의 한 축이 사라지고, 사진을 찍으면 시간의 흐름까지 없어집니다. 평면에 공간을 넣기 위해 소멸되어버린 축은 글과 편집으로 다시 살아날 수 없었습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려고 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저는 무망한 취재와 편집을 반복하면서 저널 생활을 했습니다.

 저널에서의 생활을 마무리하고 나가는 선배의 “네가 저널을 하는 즐거움은 뭐야?”라는 물음에 저는 “그냥 하는 거죠 뭐…”라고 맹물보다 싱거운 답을 했습니다. 싱거운 답이었지만 제 생각과 다른 답은 아니었습니다. 카메라에는 마땅히 공간이 담겨야 한다고 생각해서 ‘그냥’ 셔터를 누르고, 글을 쓰고, 편집을 했습니다. 그것이 할 수 없는 일이더라도 말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저는 글에 생각을 담는 불가능한 일을 하고 있습니다. 제 문장이 너무나 가벼워서 힘없이 흩날리고 있지만, 글에는 생각이 담겨야 하므로, 얄팍한 제 손끝으로 겨우 붙잡고 있습니다. 저널에서의 마지막 글을 쓰는 지금처럼, 무력하게 셔터를 눌렀던 이전처럼, 저는 이제 저널을 나가서도 계속 무망하게 살 듯 합니다. ‘나’라는 평면 위에 새로운 축을 세워 공간을 만드려고 하겠지요. 화각을 넓히고 채색을 하는 가망 없는 입체화를 할 것입니다.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지만, 프레임 밖으로 빠져나가 희미하게 보이는 삶의 구도까지 담기 위해, 무망한 입체화를 계속할 생각입니다. 지금의 그 과정을 함께 해준 저널에게 감사를 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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