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계 위에서 적는 의미

  저널에 들어왔을 적 나는 언어에 대한 큰 회의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내가 어떤 말을 해도 그것이 진실을 포착할 수 없다는 아득함, 심지어 내가 나에 대해 말하는 것조차도 쉽게 거짓이 되어버리는 허탈함. 그리고 내가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는 단 한 문장도 제대로 쓸 수 없다는 당연한 사실까지. 무력감이 머리를 덮쳐 왔었고 내 언어를 찾기 위해 바쁘게 기웃거리다 저널에 들어왔다. 그로부터 일 년이 지난 지금까지 저널에서의 활동은 예상하지 못한 또 다른 어려움에 부딪히는 과정이었다. 그러나 고민의 영역을 다른 방향으로 가져가게 된 시기이기도 했다. 

  하나는 불균질한 이야기들을 풀어내는 방식에 관한 것이었다. 처음에는 몰랐지만 들여다보면 볼수록 하나로 설명될 수 없는 일들이 대부분이었다. 글을 쓰고 고치는 과정에서 어떤 이야기들은 생략될 수밖에 없고 큰 줄기들로 봉합되기도 했다. 하나의 완결된 글을 쓰는 일의 어려움과 함께, 내가 알게 된 것을 다 담아내지 못하는 상황에 대한 두려움이 매번 공존했다. 다른 하나는 다른 이의 이야기를 전한다는, 너무나 기본적인 기사의 특성에 관한 것이었다. ‘전달하는 자’를 자처하면서 납작하게, 결국에는 나의 방식대로 타인의 이야기를 축소하거나 왜곡시킬까 우려가 됐다. 그만큼 전전긍긍할 때가 많았지만 내게 기꺼이 언어를 나눠준 사람들, 함께 치열하게 고민해주는 동료들 사이에서 용기를 얻었다. 타자라는 위치를 정확하게 인지하고 그 거리를 마주하는 일, 거리를 좁히기 위해 노력하면서 나의 제한된 자격을 돌아보고 경계하는 일이 중요하다는 마음도 갖게 됐다. 

  이번 특집 기사에서는 부담보다는 유독 에너지를 많이 얻었다. 취재하는 전 과정에서 자주 달려 나가는 것에 대해 생각했다. 숨이 차오르도록 뛰어가는 감각을 떠올리며 힘을 얻었고, 마음이 든든해졌다. 정작 기사는 한 글자도 쓰지 못했는데도 그랬다. 매 인터뷰가 즐거웠다. 인터뷰 말미에는 꼭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게 됐다. 어렸을 때 달리기를 잘했던 것, 수영을 오래 했던 것, 농구 하다가 발을 크게 삔 것까지. 잊고 있었던 기억을 꺼내고 마주 보며 웃음을 나눴다. 그래서인지 인터뷰를 마치고 나서는 또 다른 상상을 마음껏 했다. 축구를 하는 나, 복싱을 하는 나… 경험해보지 않은 일들에 마음껏 나를 맡겼다.

  나의 경험이면서 다른 이들의 경험인 것. 그러니까 분명 다르고 하나로 포섭될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분명하게 공유하고 있는 어떤 지점들을,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문장으로 풀어내고 싶었다. 잘 보이지 않았던 것을 보이도록 하는 게 목표였다. 이렇게 결심은 수없이 했는데 결과물은 다른 때처럼 부끄러움에 머물러 있다. 한계를 여실히 느낀다. 하지만 아쉬움을 저편에 두고, 정말 변화하고 있는 나를, 내 세계를 발견한다. 나를 막고 있는 것들을 뛰어넘으며 달려가는 상상으로 썼기 때문일까. 내 몸의 반경을 넓히는 것처럼, 글도 그렇게 천천히 움직이고 있다는 생각을 한다. 

  달리기 연습을 할 때 “걷는 것보다 속도가 느리더라도 달리는 걸 멈추지 말라”는 말을 기억한다. 오로지 달린다는 것 하나만을 생각하며 몸을 땀에 푹 적시고 나면, 달리기 전의 나와는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을 느낀다. 그렇게 조금씩 변화하는 마음으로 적어 내려간 글이 다른 사람의 마음에도 천천히 도착했으면 좋겠다. 물론 나를 넘어서는 글이라는 목표에는 한참 못 미치는 부분적인 말들이다. 그렇지만 글이라는 건 한계를 타인에게 드러내는 일이며, 한계 위에서 의미를 만들어나가는 작업이라고 믿는다. 여전히 미완성인 글이 읽는 사람에게 가 닿아서, 각자가 느끼는 한계를 각자의 이야기로 새롭게 채워 나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기사를 썼다. 그것이 내가 저널에서 얻게 된 가능의 언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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