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데르센의 동화 ‘성냥팔이 소녀’ 속 소녀는 아버지에게 떠밀려 추운 겨울 길거리에서 성냥을 판다. 사람들은 소녀를 불쌍히 여기나 연민의 눈길을 던지고 지나칠 뿐이다. 소녀는 성냥을 켜며 크리스마스 만찬과 화목한 가정을 상상하지만, 이는 성냥불 속 일렁이는 환영에 불과하다. 여기 핀란드 헬싱키에 성냥팔이 소녀와 비슷한 삶을 살아가는 소녀, 아이리스가 있다.
성냥팔이 소녀와 성냥공장 소녀
영화는 기계의 소음과 함께 성냥의 생산 과정을 보여주면서 시작한다. 성냥 생산은 검수의 연속이다. 크기와 무게가 불량인 성냥은 기계에서 걸러지고, 정상적인 형태의 성냥들만이 성냥갑에 들어간다. 아이리스는 성냥공장에서 성냥을 검수하는 일을 한다. 아이리스는 계부와 어머니를 위해 성냥공장에서 기계처럼 일하고, 집에 돌아와서는 식사를 준비한다. 하지만 계부와 엄마는 아이리스를 인간적으로 대하지 않는다. 공장에서 월급을 받은 아이리스가 드레스를 사자, 이를 알아챈 계부와 어머니는 아이리스의 뺨을 때리고 드레스를 환불해오라고 명령한다.
아이리스는 부모의 명령을 거부한다. 대신 드레스를 입고 댄스클럽으로 향한다. 아이리스는 종종 로맨스를 기대하며 댄스클럽에 방문해왔다. 그러나 춤을 권해오는 사람 없이 쓸쓸히 돌아올 따름이었다. 하지만 드레스 덕분인지, 아이리스는 그날 아르네라는 남자와 춤을 추고 그의 집에서 밤을 보내게 된다. 하지만 아르네는 아이리스에게 화대를 지불하고 매몰차게 관계를 끊는다. 뒤늦게 자신이 임신했음을 깨달은 아이리스는 아르네를 붙잡지만, 돌아온 것은 아이를 지우라는 말과 낙태 비용이라며 건넨 수표뿐이었다.
동화 ‘성냥팔이 소녀’에서 소녀는 추위를 견디기 위해 성냥을 켜고, 성냥불 속에서 따뜻한 난로와 크리스마스 식탁, 돌아가신 할머니의 환영을 본다. 성냥의 불빛을 닮은 붉은 드레스는 아이리스에게 사랑이라는 환영을 보여줬다. 하지만 드레스를 벗는 순간, 환영은 사라지고 매춘부 취급을 받는 현실만이 남는다. 댄스클럽에서는 “새가 아닌 나는 이곳의 포로 신세, 꿈속에서만이 축복받은 그곳을 볼 수가 있네”라는 가사가 흘러나온다. 오직 환영 속에서만 희망을 느낄 수 있는 아이리스의 삶에 대한 노래다.
성냥공장 소녀는 누구인가
감독의 필모그래피를 살펴보면 아이리스가 누구를 대변하는 인물인지 알 수 있다. 아키 카우리스마키 감독은 블랙 코미디 전문 감독으로, 자본주의의 비인간적 면모를 독창적으로 묘사한다. 《천국의 그림자》, 《아리엘》, 《성냥공장 소녀》로 구성된 프롤레타리아 3부작으로 가장 잘 알려져 있다. 프롤레타리아 3부작은 헬싱키 공장지대 배경을 바탕으로 1960년대 핀란드의 산업화에 따른 자본주의의 유입과 그로 인한 인간 소외를 꼬집는다. 《성냥공장 소녀》 역시 공장의 부품으로 전락한 노동자의 비극을 가감 없이 그려낸 작품이다.
아이리스는 어떤 일이 있어도 성냥공장에 출근한다. 계부에게 폭행을 당해도, 아르네에게 버림을 받아도 다음날 어김없이 성냥을 검수한다. 영화는 공장에서 노동하는 아이리스를 여러 차례 담아낸다. 아이리스는 공장에서 일하는 내내 침묵한다. 카메라는 아예 아이리스의 얼굴을 잘라내고 성냥을 검수하는 손을 클로즈업한다. 공장에서 아이리스는 감정을 가진 인간이 아니다. 그는 작업을 수행하는 하나의 부품으로 여겨진다.

성냥공장 소녀의 복수
동화 ‘성냥팔이 소녀’의 결말부에서 소녀는 할머니의 환영이 사라질까 두려워 가진 모든 성냥에 불을 붙인다. 할머니의 환영은 밝은 빛을 내며 소녀를 끌어안은 채 하늘로 올라간다. 다음날 아침, 사람들은 길에서 미소를 띤 채 숨을 거둔 소녀를 발견한다. 하지만 <성냥공장 소녀>의 결말은 소녀의 조용한 죽음이 아니다.
아르네에게 버림받은 아이리스는 이성을 잃은 채 거리를 걷다 교통사고를 당해 아이를 유산한다. 계부는 다친 아이리스를 돌보기가 부담스러워 내쫓는다. 아이리스는 혼자 멍하니 앉아 담배를 태운다. 그가 처음으로 직접 성냥에 불을 붙이는 장면이다. 담배를 피우던 아이리스는 뭔가 결심한 듯 잡화점으로 향한다. 아이리스는 점원에게 쥐약의 용도를 묻는다. 쥐를 잡는 데 사용한다는 점원의 대답에 수긍하는 아이리스의 태도는 의미심장하다. 아이리스는 자신에게 고통을 준 모든 ‘쥐’들에게 쥐약을 먹인다. 아르네, 계부와 어머니, 술집에서 자신에게 추근댔던 낯선 남자에게까지. 복수를 마친 다음날, 아이리스는 성냥공장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일을 계속한다. 그러나 곧 형사들이 들이닥치고 아이리스는 연행된다.

하지만 영화는 쥐약을 먹은 이들이 쓰러지거나 구역질하는 장면을 보여주지 않는다. 아이리스의 복수가 성공했는지는 알 수 없다. 영화에서는 계부와 어머니가 보는 뉴스를 통해 천안문 사태의 모습을 보여준다. 천안문 사태는 독재에 저항하는 시민들을 정부군이 무력으로 탄압한 사건으로, 수백 명이 사망한 정치적 참극이다. 뉴스에서는 비무장 학생 운동가들이 한 대의 탱크를 포위했지만, 정부군이 이들에게 무차별 총격을 가했다는 보도가 흘러나온다. 아이리스의 복수는 천안문 사태의 저항처럼 완수되지 못했다.
하지만 아이리스의 복수가 의미 없는 것은 아니다. 아이리스는 부조리에 익숙해진 나머지 눈물을 흘릴 줄도 몰랐다. 그런 아이리스가 과감한 행보를 보이는 것은 홀로 담배를 태우면서부터다. 기계처럼 성냥을 검수하기만 하던 아이리스가 성냥을 사용해 ‘자의로’ 불을 붙인다. 아이리스의 복수는 그가 자신을 옥죄는 부조리를 자각하고 자신의 의지로 행한 저항이었다. 성냥팔이 소녀는 성냥불에서 환영을 봤지만 아이리스는 현실을 응시한다.
복수 후 연행되는 장면에서, 아이리스는 형사를 마주하고 말없이 일을 멈춘다. 그리곤 수갑을 채우기도 전에 형사들을 앞질러 출구로 향한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아이리스가 근무시간 중 공장을 이탈하는 장면이다. 아이리스는 더 이상 공장의 부품이 아니다. 공장을 떠나는 아이리스의 뒷모습은 그가 주체성을 획득한 존재로서 새로운 삶을 살아갈 것임을 암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