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은 말하기 가면입니다. 고통보다 질긴 생명이 있는 꽃장식으로 우리가 살아있다는 것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가해자는 장례를 치르고, 그동안 말하지 못했던 우리가 죽음과 침묵에서 다시 살아나 말하는 축제입니다.”

27일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망자들의 축제’가 열렸다. 검은 복장에 화려한 해골 가면을 쓰고 손에 꽃을 든 사람들이 한국성폭력상담소 등 3개 단체가 주최한 친족성폭력피해자 생존기념축제 ‘죽은 자가 돌아왔다!’에 모였다. 40여 명의 집회 참가자들은 친족성폭력 피해를 증언하고 친족성폭력 공소시효 폐지를 요구하며 광화문에서 종각까지 행진했다.
참가자들은 “언제든 생존자가 나서면 사건을 수사하고 공소할 수 있어야 한다”며 친족성폭력 공소시효 폐지를 요구했다. 친족성폭력 공소시효는 최장 10년이며, DNA 등 죄를 입증할 과학적 증거가 있으면 20년까지 늘어난다. 그러나 친족성폭력 피해자들이 피해 사실을 알리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는 경우가 많아 공소시효가 지나기 쉽다. 이들은 “아동청소년에 대한 신체적·정서적 폭력은 흔히 ‘사랑’이나 ‘부모 노릇’으로 포장된다”며 “피해자는 가족이라는 폐쇄적 집단에서 폭력을 폭력으로 인식하지 못한다”고 말했다.
피해생존자 루나 씨는 “친부인 가해자는 이번 달에 협박죄로 유죄를 선고받았지만 성폭력에 대해선 공소시효가 지났다는 이유로 아무 처벌도 받지 않았고, 이에 기고만장하며 나를 조롱하고 있다”며 “(가해자는) 반드시 처벌받아야 한다”고 말했다. 또 다른 피해생존자 풀 씨는 “가장 안전한 공간에서 빼앗긴 성적 자기결정권은 나의 입을 막아버렸다”며 “10년이 지나서야 범인을 지목할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집회 참가자들은 발언자들을 향해 “연대합니다”라고 잇달아 외치며 지지와 격려를 보냈다.

참가자들은 축제 선언문에서 “가족은 대한민국에서 사실상 치외법권 지대였다”며 “가족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가해자 구제에만 열을 올리고, 피해자의 안전과 삶은 보장하지 않았다”고 비판했다. 국가와 사법 체계가 가족 보호를 내세워 가해자를 두둔하거나 솜방망이 처벌을 내리고 있다는 것이다.
현재 국회에는 친족성폭력의 공소시효를 폐지하거나 연장하는 내용의 성폭력처벌법 개정안이 발의돼있다. 올해 1월 무소속 양정숙 의원이 친족성폭력의 공소시효를 폐지하는 성폭력처벌법 개정안을, 6월엔 국민의힘 이종배 의원이 친족성폭력의 공소시효를 10년 늘리는 개정안을 발의했다. 두 법안 모두 국회에서 계류 중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