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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처 다 아물지 못한 상처를 봉합하지 못한 채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그 아픔에 파묻혀 한없이 가라앉은 채 살기도 하지만, 때론 그 상처를 원동력 삼아 나아가기도 한다. 한강의 『작별하지 않는다』는 제주 4·3 사건의 생존자이자 유가족인 부모님의 생을 좇는 경하와 인선을 따라가면서, 봉합되지 않은 상처를 붙들고 삶을 살아내는 일의 지난함을 이야기한다.
제주 4·3 사건은 이데올로기 대립이 한반도 현대사에 남긴 끔찍한 상흔이다. 1947년 3·1절 기념 집회에서 시작된 경찰과 좌파 진영 사이의 대립은 끊임없는 무력 충돌을 낳았다. 미군정은 모든 소요 사태의 원인이 남로당을 비롯한 좌익세력의 선동에 있다며 이들을 척결하는 데 주력한다. 두 진영이 무력 충돌하며 1948년 4월 3일 이후 제주에선 수년간 끔찍한 학살의 시간이 이어진다.
인선의 어머니와 아버지는 제주 전역에 계엄령이 선포됐던 1948년 겨울, 군경의 강경 진압 작전으로 가족을 잃는다. 이후 반세기에 이르는 시간 동안 인선의 부모는 1948년이라는 세계에 멈춰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동시에 1948년을 지워버리려 하는 세계에 살아왔다. 이들은 ‘심장 깊은 곳에서 무엇인가가 이미 떨어져’ 나갔다고 느끼며 모순된 두 세계 사이에서 분열된다.
인선은 4·3에 대해 말하지 않는 세계에서 태어났다. 인선의 엄마는 밤마다 인선에게 ‘도와주라. 나 구해주렌.’이라며 애원하고, 악몽을 못 이겨 ‘들고양이처럼 이상한 소리를 내면서’ 살아간다. 인선은 그런 엄마를 ‘살아서 이미 유령인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시간이 지나 어른이 된 인선은 4·3을 단편영화로 기록하게 된다. 인선은 영화 촬영을 위해 엄마가 모아둔 신문 기사를 읽으며 비로소 엄마의 섬망이 4·3의 고통과 작별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음을, 그때 잃은 가족들을 찾겠다는 의지 때문이었음을 깨닫는다. 엄마의 상처를 이해하고 받아들이게 되면서 인선은 1948년의 세계에 발을 들인다.
한때 혐오했던 엄마를 이해하게 된 인선은 1948년의 세계와 1948년을 잊은 세계를 이어줄 존재로 경하를 떠올린다. 경하는 광주민주항쟁에 대한 작품을 쓴 경험이 있다. 글을 쓰며 희생자들의 세계에 이입한 경하는 악몽에 시달리며 5·18을 외면하게 됐다. 하지만 인선으로부터 4·3에 대해 듣게 된 경하는 상처를 외면하는 것이 삶을 계속해 나가는 방법이 아님을 깨닫는다. 목숨을 잃은 가족들을 위해 4·3의 진상을 밝히려는 과정 자체가 인선 모녀를 살게 했음을 알게 됐기 때문이다. 그들은 오히려 1948년의 그 세계를 잊지 않으려고 노력했기 때문에 생의 의지를 지켜낼 수 있었다.
1948년을 잊지 않기 위해 부모님의 기록을 기억하려는 경하와 인선의 여정이 매듭지어지고, 아물지 않은 1948년의 상처를 들여다보는 일은 독자의 책임이 된다. 『작별하지 않는다』는 4·3을 지우고 살아가기보다, 그 고통의 세계를 기록하고 기억하는 것이 우리를 살게 할 것이라고 말한다. 4·3을 기억하지 않는 세계에서 『작별하지 않는다』가 우리에게 던지는 묵직한 메시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