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성범죄는 끝나지 않았다

프로젝트 리셋(ReSET) 활동가들에게 디지털 성범죄의 오늘과 내일을 묻다

  작년 3월, ‘N번방’ 사건으로 대표되는 텔레그램 성착취 사건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수사당국은 ‘디지털 성범죄 특별수사본부(특수본)’을 설치하고 집중 수사를 통해 3,575명의 디지털 성범죄 관련 사범을 검거하고, 그중 245명을 구속·송치했다. 텔레그램 ‘박사방’ 운영자였던 조주빈은 징역 42년의 형이 확정됐다.

  약 2년의 시간이 흐른 지금, 프로젝트 리셋(ReSET)의 활동가들은 디지털 성범죄가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고 말한다. 리셋은 2019년부터 성착취 범죄를 지속적으로 모니터링하고 증거를 채집해 왔다. 리셋은 법무부 디지털 성범죄 전문위원으로 활동하며 디지털 성범죄 예방 정책 제안에 참여하는 한편, 강연과 피해자 연대 활동도 진행한다. 리셋의 활동가들에게 디지털 성범죄의 실태와 대응 방안을 물었다.

대략 2년 간의 시간 동안 바뀐 것과 여전히 미비한 것들을 짚어보자면.

  최서희: 근 2년간 주목할만한 유의미한 변화라면 ‘신설’된 모든 것들이라 할 수 있다. 여전히 부족하고 허점이 많지만 디지털 성범죄의 양형기준이 생겨났다. 소위 ‘N번방 방지법’이라 불리는 입법안 중 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일부개정을 통해 성착취물의 소지와 시청에 대한 처벌법을 제정한 것, 아동·청소년 피해자를 대상으로 한 ‘온라인 그루밍’ 사건을 처벌할 수 있게 된 것 등 모든 변화에 주목해야 한다.

  그러나 여전히 디지털 성범죄를 전담으로 맡아 수사하는 기관이 없어 부서 간의 사건 떠넘기기가 발생하고 있다. 피해자들은 자신이 어떤 도움을 받을 수 있는지 경찰의 형식적인 안내에만 의존하거나 인터넷에서 파편화된 정보들을 검색해 알아내야 한다. 따라서 경찰청 국가수사본부 산하 수사국 내 ‘디지털 성범죄 수사과’ 신설, 디지털성범죄 피해지원 원스톱 관리체계 구축, 성착취물의 즉각적 삭제를 위한 ISP 사업자들과의 협의가 확충돼야 한다. 커뮤니티 사이트 ‘디시인사이드’에서는 올해 초 제출한 투명성보고서에 ‘신고된 불법 촬영물이 0건’이라고 기재했다. 하지만 리셋이 모니터링한 디시인사이드의 현실은 매우 다르다. 범죄 예방을 위해 ISP 사업자들의 책무를 다하게 할 추가적 보완이 절실히 필요한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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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셋이 지난 10월 배포한 텔레그램 성착취 사건 관련 카드 뉴스 ⓒ프로젝트 리셋

디지털 성착취 사건 공론화 이후 지금까지 법, 제도적인 차원에서 어떤 변화들이 의미와 실효성을 갖췄나.

  최서희: 가장 의미 있었던 변화로 경찰의 아동·청소년 성착취 대상 위장잠입 수사가 가능하게 된 것을 꼽고 싶다. 5분에서 2~3시간 가량 짧게 운영되는 게릴라성 단체방이나 신원인증을 요구하는 성착취단체방 등 활동가들이 잠입하기 어렵거나 채증하기 어려운 환경에서의 디지털 성범죄를 해결하기 위해서라도 위장잠입수사는 꼭 필요하다고 리셋에서도 여러 차례 주장해왔다. 변화하는 디지털 성범죄 행동 양상과 기술에 발맞춰 볼 때 아동‧청소년 대상 사건 뿐 아니라 성인 피해자 사건까지 위장잠입수사의 대상으로 포함해야 할 것이다.

피해자의 회복을 돕는 지원 체계의 개선은 있었나. 재판 과정에서 2차 가해가 빈번하게 일어나기도 했는데, 사법 체계가 피해자 친화적으로 변화한 부분은 있나.

  최서희: 여성가족부 내 디지털 성범죄 피해자 지원 관련 예산이 일부 증가된 점과 각 지역에서도 피해자 지원에 힘쓰는 분들이 증가한 점은 긍정적이다. 인천디지털성범죄예방대응센터와 경기도디지털성범죄피해자원스톱지원센터 등이 신설됐다. 그러나 사법 체계와 관련해선 아직 갈 길이 멀다. 피고인과 검사를 당사자로 하는 형사재판에서는 피해자의 발언권이 제대로 보장되기 힘들다는 문제점이 있다. 2년 만에 개선되기는 힘든 부분이었던 것 같다. 일부 판사들은 아직까지도 가해자를 좋게 해석해 주거나 공감해주면서 납득이 어려운 양형 이유를 들고 있다. 그러나 디지털 성범죄에 대응해야 한다고 생각한 법관들이 ‘현대사회와 성범죄연구회’를 조직하는 등 법원 내에서도 사회의 변화에 발맞추려고 하는 분들이 있어 사법 체계가 더 나은 방향으로 점차 변화할 수 있을 것이라 확신한다.

양형기준, 특히 양형의 감경인자가 꾸준히 지적되고 있는데, 현재 디지털 성범죄 가해자에 대한 처벌 수준(확정된 형량)에 대해서는 어떻게 보고 있나.

  정세지: 현재 디지털 성범죄 가해자에 대한 처벌 수준은 사건의 심각성에 견주어 볼 때 터무니없이 낮다. 가해자가 진정성 있게 반성하고 있음을 보여줄 수 있는 방법은 달게 벌을 받는 것 외에는 없다. 반성문이나 디지털 성범죄 관련 단체나 기관에 후원금을 전달하는 것은 형량을 낮춰보려고 애쓰는 시도에 불과하다. 이를 고려한 양형의 감경은 범죄의 심각성을 희석할뿐더러 다른 가해자들이 안심하고 가해를 저지를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최서희: 조주빈에게 42년이라는 중형이 대법원에서까지 선고된 것은 유의미한 성과다, 그러나 박사방과 N번방이 아닌 다른 텔레그램 성착취 단체방의 주동자들은 그 죄질에 비해 가벼운 형량을 받았다. 재판부가 보여주기식 판결을 내리고 있다는 얘기다. ‘디지털 성착취 가해자 릴레이 엄벌 탄원’을 주도해온 입장으로서 재판부에 피해자와 시민들의 엄벌 의지는 닿지 않는 것 같다고 느낀 적이 잦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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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셋째 주 ‘더 리더’의 일부. 수치로 보는 디지털 성범죄라는 제목으로 디지털 성범죄의 10대 피해자와 피의자 수를 다루고 있다. ⓒ프로젝트 리셋

텔레그램 성착취 사건 이후 오히려 다크웹 접속자가 증가세를 보이고 있다고 알린 바 있다. 그 원인은 무엇이라고 보나.

  정세지: 수많은 가해자에 대한 제대로 된 검거나 처벌이 이루어지지도 않았고, 사회적 인식이 크게 발전하거나 법적·제도적 측면이 충분히 보완·강화되지 않은 상태에서 특수본이 종료됐다. 오히려 가해자들에게 죄질이 매우 ‘심각한’ 수준이거나 가해자 본인의 개인정보가 노출돼 검거가 쉬운 경우가 아니라면 잡히지 않을뿐더러 잡히더라도 사회가 가해자를 감싸주어 약한 처벌을 받을 것임을 알려준 것이나 다름없지 않을까 생각한다. 

  최서희: 한국 사회가 ‘디지털 성범죄가 범죄다’라는 당연한 명제에 합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소라넷 사건과 정준영 단톡방 사건 및 텔레그램 성착취 사건까지 여러 굵직한 디지털 성범죄 사건이 일어났지만 일부 사회구성원의 사고방식은 변하지 않았다. 

  국가인권위원회에 따르면 ‘불법촬영물 시청자를 처벌해야 한다고 보는가’라는 질문에 반대한 남성이 45%나 된다. 이런 인식이 만연한 이상 디지털 성범죄가 근절될 길은 요원하다. 오히려 언론을 통해 확대재생산 된 자극적인 가해 사실들이 디지털 성범죄를 범죄로 보지 않는 이들에게 범의를 유발하게 되었다. 누구나 성착취물을 쉽게 구할 수 있고 다크웹 접근마저 용이해진 현 디지털 공간의 특성과 결합하여 범죄자들이 증가했다. 

  이미 디지털 성범죄가 너무 많이 발생하고 있기에 수사력이 따라갈 수 없고, 경찰에서 공들여 가해자들을 검거하더라도 집행유예나 기소유예 등 솜방망이 처벌에 그친다. 이런 상황들이 맞물려 디지털 성범죄가 증가하는 것은 예측 가능한 수순이었다.

N번방, 박사방 사건 공론화 이후에 디지털 성범죄의 양상에 변화가 있었는지. 

  정세지: 공론화 이후 디지털 성착취가 이뤄지는 공간이 다크웹, 상위방 등 가해 정황이 포착되기 어려운 곳으로 옮겨갔다. 상위방 입장 조건도 까다로워졌다. 남성임을 인증하기 위한 성기 사진 전송, 불법촬영물 제작 및 유포, 불법촬영 피해자에게 대한 온라인 언어 성폭력 가해 등으로 입장 조건을 설정해 하여 활동가와 경찰의 접근을 막으려 한다. 혹은 짧게는 5분에서 길게는 2~3시간 동안 성착취물을 대량 유포한 뒤 증거 폐기를 위해 채널을 일부러 폭파하는 경우도 있다. 

  최서희: 디지털 성범죄가 일어나는 공간이 확장됐다. 일례로 지난 3월, 국내 최대 커뮤니티라 자부하는 ‘디시인사이드’에 N번방과 박사방 등에서 유포된 아동·청소년 성착취물과 다크웹 발 ‘고어물’이 업로드됐다. 구글 검색에 피해자나 성착취물이 노출되기도 한다. 아동·청소년 성착취물을 아무런 문제의식 없이 캡처해 기사에 첨부한 경우도 있었다. 디지털 성범죄가 자행되는 공간과 ‘일반적인’ 디지털 공간의 경계가 무너지고 있는 것이다.

디지털 성폭력을 근절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리셋이 주목하는 변화의 지점은.

  차여름: 교육의 변화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2010년 이후 출생한 세대는 디지털 기술 관련 교육을 아동·청소년기에서부터 접하고 있지만 디지털 윤리에 대한 교육이 병행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당장 법과 제도를 개선한다 해도, 사람들의 교육 수준이 그에 미치지 못한다면 그저 이상적인 수단 정도로 남을 가능성이 크다. 

  최서희: ‘강간문화’라는 말이 있다. 우리 문화에는 여성에 대한 폭력적인 태도를 장려하는 요소가 있다. 이는 남성 청소년들이 쉽게 폭력 행위를 저지르도록 심리적으로 부추긴다. 이런 행위가 비도덕적인 행위라는 것을 알려주기는커녕, 범죄라는 것조차 인지하지 못하게 만든다. 실제로 작년 초 텔레그램 성착취 사건이 알려지자 자신의 주변 남학생이나 남동생이 박사방·N번방에 있었다거나 성착취물을 봤다고 자랑했다는 제보가 쏟아졌다. 이런 행위가 범죄라는 인식을 사회구성원 모두가 공유하고 이를 제지하려 행동에 나설 때 디지털 성범죄가 근절될 수 있을 것이다.

  송하진: 가장 중요한 건 사소한 연대다. 활동하면서 내면의 슬픔보다 밖으로 내보이는 분노와 연대가 문제 인식과 해결에 큰 도움이 된다는 것을 느꼈다. 연대라는 단어 자체가 굉장히 무겁고 어려워 보이지만, 자신의 시간 10초 정도를 청원에 할애하는 것도 연대고, 누군가의 이야기를 공유하는 것도 연대이며 아닌 건 아니라고 바로 말할 수 있는 것 역시 연대다. 그러한 짧은 경험이 누적되어 강력한 변화를 이끌어낸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이미 그 변화를 경험했다. 현재도 변화는 일어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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