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들장애인야학(노들야학)은 1993년부터, 장애를 가졌다는 이유로 제도권 교육에서 배제된 성인 장애인들이 함께 공부하고 투쟁해온 공동체다. 올해 노들야학에선 24년간 교장으로 있던 박경석 전 교장의 뒤를 이어 김명학·천성호 교장이 취임했다. 김명학 교장은 학생으로, 천성호 교장은 교사로 지난 20여 년간 노들야학에서 함께했다. 학생과 교사로 만나 공동교장으로 취임하기까지 노들야학에서의 이야기를 김명학·천성호 교장에게 들어봤다.

성호 교장(왼쪽)과 김명학 교장(오른쪽)
작은 교실에서 시작된 배움의 불씨
김명학 교장이 처음 노들야학을 찾은 것은 지금으로부터 26년 전의 일이다. 노들야학은 아차산 기슭의 정립회관에 있는 작은 탁구장에서 시작됐다. 정립회관 안에는 장애인근로사업장인 정립전자와 200명 남짓의 정립전자 노동자들이 거주하는 기숙사가 있었다. 김 교장 역시 정립전자에 다니던 노동자였다.
고향인 전라북도 부안을 떠나 서울에 올라올 때까지 집에만 머무는 재가장애인이었던 김명학 교장은 학령기에 공교육을 전혀 받지 못했다. 당시 대부분의 장애인은 김 교장과 비슷한 상황이었다. 1990년 기준 재가장애인 90여만 명 중 무학력자 비율은 29%, 초등학교 학력은 30%에 불과했다. 노들야학은 교육의 기회를 받지 못한 장애인들에게 배움의 장이 됐다. 탁구장 중간에 세워져있는 칸막이를 기준으로 초등반과 중등반 교실이 나뉘었다. 배움에 대한 열망으로 37세에 야학을 찾은 김 교장은 검정고시 수업을 통해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 학력까지 취득했다.
해를 거듭할수록 정립전자 밖에서도 공부를 하기 위해 노들야학을 찾는 학생들이 늘어났다. 초기 노들야학의 학생들이 공장식 노동이 가능하거나 혼자 이동할 수 있는 정도의 경증장애를 가졌다면, 1999년 정립회관과 밖을 오가는 봉고차가 운행되기 시작하면서 이동이 어려웠던 중증장애인들이 야학에 입학하기 시작했다. 봉고차는 하룻밤 사이 관악구, 양천구, 노원구를 모두 돌면서 학생들을 싣고 날랐다. 천성호 교장은 “수업이 끝난 밤 10시부터 봉고차 운전을 하면 새벽 2-3시가 돼야 끝났다”고 설명했다.
천성호 교장은 1994년 구로섬돌야학 활동을 시작으로, 20여 년간 야학에 몸을 담아왔다. 노들야학과의 연을 맺은 것은 2010년, 자원활동 교사를 해보지 않겠냐는 박경석 전 교장의 제안을 통해서였다. 천 교장은 2년 간의 교사 활동 후 대학원에서의 교육학 공부와 전국야학협의회 활동에 전념했고, 대학원을 졸업한 2018년부터 노들야학 상근활동가로 활동하고 있다.
‘도시 속의 섬’을 벗어나 대학로로
노들야학 학생들이 학교를 잃을 뻔한 위기도 있었다. 2008년, 노들야학이 위치하던 정립회관이 공간 및 운영비 부족을 이유로 야학의 퇴거를 요청했기 때문이다. 노들야학은 새로운 야학 공간 마련을 위해 교육부에 지원을 요청했지만, 교육부는 노들야학이 ‘초중등교육법 상의 학교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지원을 거절했다.
노들야학의 구성원들은 이대로 학교를 포기하지 않았다. 매서운 바람이 불던 겨울, 노들야학은 대학로의 마로니에 공원에 천막을 치고 수업을 계속해나갔다. 김명학 교장은 “발전기를 돌리다 천막에 불이 나기도 하고, 눈이 왔을 땐 천막이 무너질까 천막에 쌓인 눈을 계속 쳐서 떨어트려야 했다”며 당시의 상황을 회상했다.
대학로에서 천막 대신 노들야학이 들어갈 건물을 찾는 것은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노들야학은 휠체어를 사용하는 학생들을 위해 지하철역과 가까울 뿐만 아니라 배리어프리해야 했다. 입구에 계단이 있거나 엘리베이터가 없는 건물은 선택지에서 곧바로 지워졌다. 대학로의 높은 임대료도 큰 부담이었다. 야학은 교육청의 장애인 교육기관 지원금을 증액하고 지원금을 임대료로 사용할 수 있도록 요구했고, 달력과 엽서를 팔며 야학 홍보활동과 모금을 펼쳤다. 기나긴 노력 끝에 2008년 3월, 야학은 천막수업을 끝내고 현재의 건물에 자리를 잡았다.
노들야학이 새로운 터전으로 대학로를 선택한 이유는 “장애인도 눈에 띄지 않는 곳이 아니라 도시 중심부에 살 수 있어야한다”는 김명학 교장의 생각에서 드러난다. 정립회관은 가까운 지하철역에서 걸어서 30분이 걸렸고, 그중 10분은 가파른 언덕을 올라야하는 ‘도시 속의 섬’이었다. ‘섬’에서 내려와 북적거리는 대학로에 야학을 세운 것은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 어우러져 살아가는 공간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천막수업을 끝내던 해단식에서 박경석 전 교장의 발언은 그 가능성을 말한다. “장애인이 대학로를 자유롭게 돌아다니며 교육을 받고 문화를 즐길 수 있다면, 단절과 배제로 점철된 장애 문제를 자연스럽게 풀어나갈 희망이 될 것이다.”
대학로에서 노들야학이 걸어온 길은 한국 장애운동의 역사가 됐다. 노들야학에선 시위나 집회현장에 참가하는 것도 교육의 일환으로 생각해, 야학 학생들은 장애인권운동가로도 활동한다. 도심 한복판에서 휠체어 탄 장애인들이 버스를 타고 이동하는 시위는 「교통약자이동편의증진법」을 통과시켰고, 그 결과 저상버스·장애인 콜택시·지하철 엘리베이터가 설치됐다. 장애인 탈시설 투쟁은 탈시설장애인을 위한 자립생활임대주택 제도를 만들었다. 장애인 콜택시, 지하철 엘리베이터, 활동보조서비스 등이 제도화되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김명학 교장은 “장애는 개인의 불행이 아니라 국가가 책임져야 할 사안”임을 깨달았다.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 살아가는 사회를 위해선, 장애를 극복할 것이 아니라 장애인이 살아가는 사회를 변화시켜야 한다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해방의 교육공간을 꿈꾸는 이들
1997년부터 2020년까지 24년간 교장직에 있던 박경석 전 교장의 뒤를 이어, 올해 2월 김명학·천성호 교장이 공동교장으로 취임했다. 김 교장과 천 교장 모두 처음에는 교장직을 사양했다. 교육과 투쟁의 공간인 노들야학을 책임질 수 있으리라는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천 교장은 “명학 형도 저도, 한 명이 교장을 해야하는 상황이었다면 못했을 것”이라며 함께여서 가능했다고 말했다.
인터뷰에서 김명학 교장과 천성호 교장은 서로를 ‘성호’, ‘명학 형’이라고 불렀다. 김 교장은 “교장으로 취임한 이후 야학 사람들이 (저를) 교장선생님이라고 부른다”며 “그럴 때마다 이전처럼 명학이 형이라고 불러달라고 한다”고 말했다. 교장선생님이라는 호칭이 낯설고 부담스럽다는 이유였다. 김 교장은 “교장이 됐지만 이전과 달라진 것이 없다”고도 덧붙였다. 교장이 된 후에도 여전히 김 교장은 수업을 들으며 야학에서의 일상을 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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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야학의 내부모습. 벽에 붙어있는 여러 신문기사들은 장애인 교육권, 장애인 활동지원서비스 등 다양한 주제를 담고 있다.
교장 취임 후 반년이 지난 지금, 김명학 교장은 외부 투쟁활동에, 천성호 교장은 야학 안에서의 학생 지원에 초점을 맞춰 활동을 해나가고 있다. 천 교장은 김 교장을 “바위 같은 사람”이라고 표현했다. 바위처럼 자신의 자리를 굳건히 지키는 김 교장의 모습이 천 교장을 흔들리지 않게 하는 버팀목이 된다는 의미다. 김 교장 역시 “등을 기댈 곳이 있어 든든하다”며 천 교장에 대한 신뢰를 표현했다.
‘배움·노동·투쟁의 노들야학 공동체 건설’이라는 교장선거 표어에는 장애인교육권에 대한 두 교장의 비전이 녹아있다. 김명학 교장은 “장애인교육권이 장애인의 학력 취득만을 목적으로 해서는 안 된다”며 노들야학의 정체성이 배움에 그치지 않고 노동과 투쟁으로 나아간다고 설명했다. 학력 취득 후에 장애인이 접근할 수 있는 일자리를 만들어내는 것 역시 장애인교육권의 일환이라는 것이다. 두 교장은 국가가 성인 장애인의 배움에 대해 큰 책무성을 가져야 한다고 입을 모아 강조했다. 천성호 교장은 “공교육에서 배제된 성인 장애인이 양질의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적절한 공간과 예산을 지원하는 의지를 보여야 한다”고 덧붙였다.
노들야학의 수업은 학생들의 검정고시 합격만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 노들야학에선 장애인들이 자신의 생활을 자립적으로 해나가기 위해 필요한 지식을 배울 수 있도록 수업을 구성한다. 수학 과목에서 수의 개념을 배우더라도 장애인 활동지원서비스 시간 배분처럼 일상생활과 밀접한 소재를 활용해 자신의 생활계획을 짤 수 있도록 하는 식이다. 연극, 음악, 장애학, 철학 등과 같이 정규교육과정에 편성되지 않은 과목들도 있다. 학생들의 장애 경험을 바탕으로 인문학을 공부하면서, 학생들의 상처를 치유하고 삶을 지지하기 위해서다. 보다 적극적인 자립지원을 위해 학생들이 수업으로 중증장애인 공공일자리에 참여하기도 한다.
천성호 교장은 “노들야학이 장애의 유무와 상관없이 모든 사회적 약자들이 힘을 얻어가는 해방의 공간이 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천 교장의 말은 노들야학의 출입문 왼편에 적힌 다음의 구절과 통한다. “만약 당신이 나를 도우러 여기에 오셨다면, 당신은 시간을 낭비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나 만약 당신이 여기에 온 이유가 당신의 해방이 나의 해방과 긴밀하게 결합돼있기 때문이라면, 그렇다면 함께 일해봅시다.” 노들야학의 사람들은 오늘도 당신과 나의 해방을 함께 일궈나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