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계형 교수(서양사학과)는 2022년 1학기부터 교양 과목 ‘서양사 속의 젠더’의 강의명을 ‘성과 사랑의 역사’로 변경해 운영한다. 기 교수는 “성과 사랑이라는 쉬운 용어를 강의명에 포함해 호기심을 가지고 강의를 수강하는 학생을 늘려보려고 한다”며 강의명을 바꾼 이유를 설명했다.
기 교수가 강의명을 변경한 배경에는 오랫동안 이어진 대학 내 젠더 교과목 침체가 있다. 젠더 교과목은 기존의 남성중심적 학문관에서 탈피해 젠더를 중심으로 분과학문을 새롭게 바라보거나, 고착화된 성 관념에 의문을 제기하는 내용의 수업을 의미한다. ‘서양사 속의 젠더’ 역시 젠더 교과목이다. 젠더 교과목은 낮은 수요로 인해 존립 위기에 놓여 있다. 강의명을 변경하기 전 ‘서양사 속의 젠더’의 수강생 수는 10명을 넘기기도 어려웠다. 걱정 없이 젠더 교과목을 강의하고 수강할 수 있는 날이 올 수 있을까. <서울대저널>에서 젠더 교과목 침체 현황과 그 배경을 알아봤다.
불안정한 나날 속 젠더 교과목
2022년 1학기에 서울대에 개설된 젠더 교과목은 ‘여성과 문학’, ‘페미니즘 미학과 예술’, ‘성과 사랑의 역사’, ‘젠더와 법’을 포함한 총 8개다. 매 학기 약 4천 개의 강의가 개설되는 것을 고려하면 대학 교육에서 젠더 교과목은 비중은 매우 적다. 다른 대학도 사정은 비슷하다. 2022년 1학기 기준 주요 10개 대학 중 10개 이상의 젠더 교과목이 개설된 곳은 단 한 곳뿐이다.

적게나마 열리는 강의들의 사정도 여의치 않다. 대부분의 젠더 교과목은 수강생이 10-20명에 불과하고, 최소 수강인원 5인을 채우지 못해 폐강 위기에 놓이는 경우도 적지 않다. 서울대 서양사학과 전공과목인 ‘역사 속의 여성과 여성문화’는 오랫동안 한 자릿수 수강생을 유지하다 지난해 1학기 폐강됐다. 100명이 넘는 학생들이 찾던 교양 과목 ‘페미니즘 미학과 예술’은 최근 2년간 수강생이 10명대로 급락했다.
담당 교수자 조희원 교수(미학과)는 “수강생이 대폭 줄어들면서 과에서도 압박이 들어온다”며 “한 번도 폐강을 걱정한 적이 없었는데 요즘은 대비해야한다는 생각이 든다”고 전했다. 교양과목인 ‘여성과 문학’을 강의하는 현정선 교수(독어독문학과)는 “젠더와 직간접적으로 연관된 주제를 가진 과목들 전반이 학생들의 관심을 이끌어내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평했다. 저조한 수강인원으로 인해 젠더 교과목 수강을 원하는 학생들도 불안감을 느끼고 있다. 자유전공학부 A씨는 “듣고 싶은 과목의 인원이 부족하면 학생들이 SNS에서 수강생을 구하기도 한다”며 “없어져선 안 될 강의들인데 항상 사라질까 걱정해야한다”고 말했다.
간신히 폐강을 막았더라도 수업 진행에 어려움이 따른다. 교수자들은 수업에서조차 젠더 문제를 마음껏 토론하지 못하는 상황을 우려했다. 젠더 교과목 수강생들은 젠더 문제에 관심이 많은 학생들임에도 불구하고 젠더 교과목에서 활발한 토론은 찾아보긴 어렵다. 김현서(사회 21) 씨는 “평등하고 다양한 토론을 지향하는 수업들이지만 모든 학생이 활발히 참여하고 있는지는 의문스럽다”고 말했다. 김 씨는 자신보다 젠더 의제에 더 해박할 것으로 보이는 학생들의 존재를 의식하게 돼 수업 중 발언을 하기 망설여진다고 설명했다.
젠더 문제에 관심이 비교적 적은 학생들은 더 높은 심리적 장벽을 느낀다. 기 교수는 “학생들과 대화해보면 배경지식의 격차로 압박을 느끼는 것은 물론, 잘못 말했을 때의 시선을 우려해 발언을 주저한다”고 전했다. 심리적 압박감으로 인해, 의견을 표하고 상대방과 자신의 관점을 비교하는 것을 주저하게 된다는 얘기다. 조희원 교수 역시 “학생들이 발언을 해도 자신의 의견을 명확히 말하지 않는다”며 “교수자 입장에서는 학생들 사이의 의견 차가 있는지조차 확인하기 어렵다”고 전했다. 수업에서의 생생한 토론은 젠더갈등이 어디서 가장 격화되는지를 알려주는 지표지만, 토론의 부재로 학생들의 의견지형을 파악하기도 어렵다는 것이다.
남학생들의 젠더 교과목 기피도 문제다. 기계형 교수는 “수강신청을 한 남학생을 찾아보기 힘들다”며 “젠더 문제에 관심이 있는 학생이나 여학생의 문제의식은 갈수록 탄탄해지는 데 반해, 남학생들에게 젠더 교과목이 외면받는 상황은 분명히 문제적”이라고 비판했다. 남학생들이 젠더 교과목을 찾지 않으니, 남학생의 의견은 들을 수도 없다. 교수자들은 페미니즘은 다양한 존재가 있음을 말하는 학문이라고 입을 모아 말한다. 페미니즘을 다루는 젠더 교과목 운영을 위해선 다양한 의견의 공유가 필요한데, 토론은커녕 학생의 다양성조차 확보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황금기와 침체기, 넘실대는 물결 위 젠더 교과목
적은 수업 수, 늘 부족한 수강생, 사라진 남학생. 젠더 교과목이 늘 이런 상황에 놓여있던 건 아니다. 2000년대 초는 젠더 교과목의 황금기였다. 1990년대 후반 학생사회의 반성폭력 운동 흐름이 주요한 기점이 됐다. 1998년 대통령 직속 여성특별위원회 신설, 2001년 여성부 출범 등의 제도적 변화가 병행되며, 젠더 문제에 대한 사회적 관심과 학문 수요가 높아졌다. 여기에 호응해 서울 주요 24개 대학 대부분에 젠더 교과목이 신설됐다.
그러나 젠더 교과목의 황금기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사회적 관심이 사그라들며 수강생이 줄었고, 특히 남학생의 이탈이 심했다. 2000년대 중반 이후 이명박·박근혜 정권의 대학 구조조정 정책은 젠더 교과목의 침체를 더욱 가속화시켰다. ‘실용성’이 낮은 학문을 폐과하거나 강의의 수와 정원을 감축하면서, 2010년대 후반까지 젠더 교과목은 10년이 넘는 침체기를 겪었다.
2010년대 후반 젠더 교과목은 다시 관심을 받기 시작했다. 페미니즘 리부트(reboot)의 도화선으로 여겨지는 2016년 강남역 살인사건이 기점이 됐다. 그렇게 젠더 교과목의 황금기가 다시 도래하는 듯했으나, 그 기세는 몇 년 가지 못했다. 페미니즘에 대한 관심이 빠르게 식었기 때문이다. 조희원 교수는 “한 학문 분야가 지속적인 관심을 받지 못하고 사람이 죽을 정도로 큰 사고가 있을 때만 주목을 받는 것은 문제적일 뿐 아니라 안타까운 현상”이라고 비판했다.
페미니즘 백래시 현상 역시 젠더 교과목의 입지를 불안하게 했다. 페미니즘 백래시란 페미니즘에 대한 사회·정치적 반발을 뜻한다. 2019년 연세대학교는 인권·사회정의·젠더·난민 등을 주제로 하는 ‘연세정신과 인권’이라는 강의가 ‘특정 소수의 인권만 무한정으로 보장한다’는 집단적 항의를 받았다. 결국 연세대는 해당 과목을 필수과목에서 선택 과목으로 전환했다.
서울대의 젠더 교과목 역시 백래시로 인한 수강생 감소를 경험했다. <서울대저널>에선 ‘페미니즘 미학과 예술’, ‘페미니즘의 이해’, ‘서양사 속의 젠더’(기계형)를 중심으로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의 수강생 수 추이를 살펴봤다. ‘페미니즘 미학과 예술’의 수강신청자 수는 2017년 87명, 2018년 83명으로, 강의 정원 60명보다 많은 인원이 수강신청을 했다. 정원 외 수강신청 요청이 있었을 정도로 해당 교과에 대한 수요와 관심이 높았다. 그러나 2019년 해당 과목의 수강생 수는 48명으로 줄었고, 2020년 24명, 2021년 10명으로 급락했다.

‘페미니즘의 이해’도 비슷한 수순을 밟았다. 2017년과 2018년 해당 과목의 수강생 수는 정원의 80% 정도였다. 그러나 2019년부터 수강생이 감소해 2020년과 2021년엔 정원의 절반을 간신히 채웠다. 오랫동안 낮은 수강생 수를 기록한 ‘서양사 속의 젠더’는 2021년, 4명이 수강신청을 한 데에 그쳤다. 2022년부터 ‘서양사 속의 젠더’는 ‘성과 사랑의 역사’라는 강의명으로 변경해 수강생 수를 늘리려 하고 있다.

대학에는 젠더 교과목이 필요하다
일각에서는 젠더 교과목 강의와 수강생 수가 줄어드는 것은 대학 내에서 경쟁력을 상실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대학의 신자유주의적 흐름에 따라 ‘실용성’이 떨어지는 학문은 퇴출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젠더 교과목 교수자들은 젠더 교과목의 위기가 한 학문의 위기에서 그치지 않는다고 단언했다. 양시내 교수(독어독문과)는 자신의 수업을 “여성의 학계에서의 위상, 여성으로서의 삶과 사회생활의 양립 등 현실적으로 당면한 문제에 대한 고민을 안은 학생들이 찾아오는 수업”이라고 설명했다. 젠더 교과목의 위기가 고민거리를 가진 학생들의 고립을 불러올 수 있다는 것이다. 조희원 교수 역시 “성별 이분법에 맞아떨어지지 않는 자신과 그로 인한 폭력 등을 경험한 학생들이 수업에 많이 찾아온다”며 젠더 교과목의 위축으로 인해 젠더 문제로 고민하는 학생들이 공감받을 기회를 잃을 것을 걱정했다.
젠더 문제가 사회의 주요한 이슈로 여겨지는 지금, 대학의 젠더 교과목을 통해 정제된 지식을 얻는 것이 중요하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배은경 교수는 “페미니즘에 대한 편향된 정보들이 많이 떠돌아다니고 있다”고 지적하며 “대학은 올바른 정보를 기반으로 학생들의 사고의 역량을 키워주는 주체가 돼야한다“고 강조했다. 페미니즘에 대한 백래시가 극심한 상황에서 대학의 젠더 교과목이 페미니즘 인식 개선의 이정표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젠더 교과목이 페미니즘에 대해 서로 다른 관점을 가진 학생들 간 소통의 계기가 될 수 있다는 주장도 있다. 배은경 교수는 “현재 한국 사회는 유사한 정치적 신념을 가진 사람들끼리만 집단을 추구하는 경향이 강하다”고 평하며 “젠더 교과목은 정치적 신념이 다른 사람들이 함께 소통하는 장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기계형 교수 역시 “젠더 교과목은 다른 이들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는 기회”라며 “다른 관점의 생각을 통해 인식의 지평을 넓힐 수 있다”고 설명했다.
여성학 전문가들은 대학엔 젠더 교과목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아 말한다. 황금기와 침체기의 반복 속, 젠더 교과목은 가장 낮은 골에서 다시 올 부흥을 준비하고 있다. 타자에 대한 배척을 넘어, 평등한 공존을 가능케 하기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