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매일 수많은 대중문화 콘텐츠를 소비한다. 그러나 방송을 제작하는 사람들의 열악한 노동환경에 대한 인지도는 낮다. 방송작가들의 존재는 예능에서 그들이 카메라 뒤에서 호명되는 짧은 순간에만 한두 번씩 가시화된다. 그들의 노동환경 역시 TV 모니터 뒤에 가려져 잘 드러나지 못했다. 방송작가유니온(전국언론노동조합 방송작가지부) 김한별 지부장을 만나 방송작가들의 노동환경에 대한 현장의 이야기를 듣고, 이들의 근로자성 인정이 필요한 이유를 물었다.

ⓒ 《런닝맨》 영상 캡처
방송작가는 어떤 일을 하나.
방송작가는 ‘방송구성작가’의 준말이다. 이들은 방송이 제작되는 과정 전반을 구성하고 기획한다. ‘작가’라는 이름 때문에 대본 쓰기 등 글 쓰는 일이 주 업무일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방송작가는 방송 제작 전반에 관여한다. 우선 어떤 내용을 담은 프로그램을 만들 것인지 인터뷰 및 자료조사를 거쳐 기획안을 작성한다. 기획안이 확정되면 촬영구성안을 짜게 되는데, 이를 위해 사전 취재를 다니며 실제 방송에 담을 인물과 콘텐츠를 정리하기도 한다.
이렇게 작가들이 완성한 촬영구성안을 바탕으로 PD들이 본격적으로 촬영을 진행한다. 작가들이 촬영 현장에 PD와 같이 나가기도 한다. 최종 영상을 만들기 위해 촬영본을 검토한 후 편집구성안을 작성하는 일 역시 방송작가의 몫이다. 편집 감독이 구성안에 따라 편집을 마치면 최종본에 자막이나 내레이션을 쓰는 것도 방송작가가 도맡는다.
중요한 건 작가들의 업무가 PD의 일과 굉장히 유사하다는 점이다. 보통 PD들은 화면에 담기는 ‘그림’을 만들고, 작가들은 ‘콘텐츠’를 만든다고 얘기되긴 하지만, 현장에선 업무 구분이 무 자르듯 명쾌하지 않다. 업무가 워낙 겹쳐 업무 배분과 관련한 논쟁이 있을 정도다. 자막 붙이는 작업을 예로 들면, 자막을 영상에 입혀지는 ‘그림’의 일부로 볼 경우 해당 작업은 PD의 몫이다. 하지만 자막을 ‘콘텐츠’라고 간주하면 작가의 일이 된다.
PD와 작가 모두 방송사의 지시·감독 아래 방송 제작의 전 과정에 관여한다는 점은 같다. PD는 방송국의 정규직 직원이지만, 방송작가는 비정규직(프리랜서)이라는 점이 다를 뿐이다. 오히려 PD의 일이 작가한테 넘어와 작가들이 더 많은 업무를 담당하는 경우가 다반사다.
업무가 같은데도 PD와 방송작가의 고용 형태가 다른 이유가 궁금하다. 방송작가는 어떻게 계약을 맺고 일을 시작하는가?
방송작가를 비롯한 방송 비정규직 스태프들은 대부분 구두계약으로 일을 시작한다. 방송사의 프리랜서 채용 기준이 따로 정해져 있지 않다 보니 PD가 자기가 함께 일하고 싶은 사람에게 ‘이번 방송 한 번 같이 해보겠냐’고 제안하는 식이다. PD는 방송사가 직접 채용하는 정직원이지만, 방송작가는 프리랜서인 이유다. 2020년에 예술인 고용보험제도가 시행되면서 계약서를 작성하는 경우가 늘긴 했지만, 구두계약 관행은 여전히 공고하다.
프리랜서 계약을 체결할 때 어떤 업무를 작가들에게 위탁하는 것인지 구체적으로 명시하지 않는 것도 문제다. 작가들이 현장에서 쓰는 계약서에는 ‘1회차 방송분에 대한 촬영구성안을 작성해서 모월 모일까지 넘긴다’가 아니라 ‘프로그램 제작 외’라고 돼있다. 사실상 방송과 관련된 모든 일을 작가들에게 시키겠다는 것과 다름없다.
# ‘예술인복지법’이란?예술인의 직업적 지위와 권리를 법으로 보호하고 복지지원을 통해 예술인의 창작활동을 증진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에 따르면 국가는 표준계약서를 개발·보급해 문화예술용역과 관련된 계약의 당사자가 대등한 입장에서 공정하게 계약을 체결할 수 있게끔 해야 한다. 계약 당사자는 계약 금액, 계약 기간·갱신·변경 및 해지에 관한 사항 등을 계약서에 명시해 서명 또는 기명날인해 주고받아야 한다.
구두계약 관행과 프리랜서로서의 지위가 방송작가들의 노동환경에 미치는 악영향은 무엇인가?
우선 임금체불이 많이 일어난다. 서면으로 계약 내용을 확인할 수 없다 보니 제작사 측에서 돈 주기로 한 적 없다며 발뺌하는 경우가 잦다. 작가들도 증거가 없으니 문제 제기하는 게 굉장히 어렵다. 예술인복지법에 따르면 임금체불과 구두계약은 처벌 대상인데도 아직도 지켜지지 않는 경우가 많다.
부당해고의 문제도 있다. 명확한 이유를 대지 않고 ‘이번엔 여기까지만 해주면 좋겠다’며 갑자기 해고를 통보하는 것이다. 근로계약을 체결하는 노동자라면 이럴 때 노동위원회에 부당해고 구제신청을 하면 되지만, 방송작가들은 그게 어렵다. 프리랜서 계약을 체결하다 보니 근로기준법(근기법)의 적용을 받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작가들은 실질적으로 근로자처럼 일하고 있다. 근로자 개념에 대한 대법원의 판례에 따르면 사용자가 정하는 업무 내용과 업무 지시의 영향을 받는 사람이라면 근로자에 해당한다. 방송작가들은 방송사의 지휘·감독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고, PD나 방송사의 지시에 따라 일한다. 사실상 근로자임에도 프리랜서 계약을 맺고 있어 근기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것이다. 방송작가유니온이 방송작가의 근로자성이 인정받을 수 있도록 노력하는 이유다.
드디어 작년 12월 말, 152명의 방송작가들이 근로자성을 인정 받았다. 이 결정의 의의와 한계는 무엇인가?
방송작가유니온의 요구로 고용노동부가 지상파 3사의 보도·시사교양 부문 방송작가를 대상으로 근로감독을 실시했다. 그 결과 152명의 작가들이 근로자성을 인정받았다. 그동안은 작년 3월에 MBC에서 해고된 두 명의 작가들이 근로자성을 인정받은 게 전부였기에, 152명이라는 숫자는 의미가 크다.
방송작가들의 근로자성 인정은 이들의 모성권 보장이나 임금 책정 기준에 있어서도 중요하다. 프리랜서를 뽑을 때는 ‘남녀고용평등과 일·가정 양립 지원에 관한 법률’을 지키지 않아도 되기에, 결혼이나 임신을 이유로 일을 주지 않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작가들 대부분이 젊은 여성인데도 그렇다.
방송작가라는 직군이 생긴 지 30년 가까이 됐는데도 임금이 상향 조정된 적이 없다. 요즘 작가들은 실질적인 근로시간을 고려할 때 최저임금에도 못 미치는 금액을 받는다. 최저임금 역시 근기법 상 근로자에게 보장되는 권리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152명의 근로자성 인정은 방송작가들의 노동권이 진일보하는 데 기여했다는 의의가 있다.
하지만 근로감독 대상이었던 지상파 3사 보도, 시사·교양 분야의 작가 363명 중 40%만이 근로자성을 인정받았다는 점은 아쉽다. 나머지 60%의 작가들과 인정받은 40%의 작가들의 근로 환경엔 큰 차이가 없었다. 노동청에서 보수적으로 판정을 내린 측면이 있다. 앞서 말했듯 사용자가 업무 내용을 규정하고 업무 지시를 내리는지가 근기법 상 근로자 판정의 핵심적 기준인데, 노동청에선 출근을 매일 정해진 시간에 하는지 등 대법원 판례에서 부차적으로 보는 기준까지 깐깐하게 따졌다.
방송작가들이 취재 섭외를 자유롭게 할 수 있다는 점을 들어 업무에 재량권이 있다며 노동청에서 근로자성을 인정하지 않은 사례도 있다. 그러나 취재 섭외 업무는 작가들의 근로자성에 배치되는 증거가 아니다. 오히려 작가들이 글 쓰는 업무 외의 많은 일을 현장에서 담당하고 있다는 방증에 가깝다. 방송 ‘작가’라는 직군의 명칭 때문에 노동청이 ‘작가가 어떻게 노동자야?’라는 인식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 게 크다고 생각한다.
# ‘남녀고용평등과 일·가정 양립 지원에관한 법률’이란?고용에서 남녀의 평등한 기회와 대우를 보장하고 모성을 보호해 남녀고용평등을 실현하는 것을 하나의 목적으로 한다. 특히 사업주가 근로자에게 성별, 혼인, 가족 안에서의 지위, 임신 또는 출산 등의 사유로 합리적인 이유 없이 채용 또는 근로의 조건을 다르게 하거나 그 밖의 불리한 조치를 하는 경우를 ‘차별’로 규정하고 있다.

방송작가유니온은 부당해고 구제신청을 접수하고 기자회견을 열었다. ⓒ방송작가유니온
방송작가들이 담당하는 업무를 줄이는 것과 이들의 근로자성을 인정하는 것 중 무엇이 더 본질적인 해결책인가?
방송작가유니온은 그동안 사회가 작가를 근로자로 바라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근로자성 인정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모든 작가가 근로자일 필요도 없고, 모든 작가가 프리랜서일 필요도 없다. 노조가 강조하는 것은 프리랜서로 계약을 할 거라면 프리랜서한테 요구할 수 있는 업무만 요구하고, 그 이상을 요구할 것이라면 근로자로 채용하라는 것이다.
노조의 업무가 막중해보인다. 방송작가유니온으로 활동하면서 겪는 어려움과 목표가 있다면.
어떤 사회 문제가 전국적인 의제로 떠오르는 데에는 방송이 중요한 매개체로 기능하는데, 방송작가유니온은 방송계 내부의 문제를 고발하는 일을 하고 있다보니 언론의 힘을 빌릴 수 없다는 점이 어렵다. 프리랜서들은 물리적으로 흩어져서 일하고, 각자도생하는 분위기라서 작가들을 결집시키는 것 역시 힘들긴 하다.
하지만 10년 전과 지금을 비교하면 변화가 눈에 보여서 효능감도 느낀다. KBS의 경우 이제 막 취업한 막내작가들과 앞으로 무조건 근로계약을 맺겠다고 약속했다. 그런 점에서 방송작가 지망생들이 너무 겁먹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도 있다. 작가들이 자신의 권리를 찾아갈 수 있도록 방송작가유니온은 계속 노력할 것이다.
방송 제작진의 노동권에서 출발하는 ‘건강한 방송’
김한별 지부장은 방송사가 언론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 지부장은 “시사고발 프로그램의 단골 주제인 노동권을 방송사가 그들의 직원에게 보장하지 않는 것은 언론에 대한 신뢰성과 직결되는 문제”라며 방송사의 변화를 촉구했다. 덧붙여 “정책적으로 방송사의 권력을 견제할 수 있는 근거들을 마련하고, 예술인복지법 등 이미 만들어진 법을 잘 지키게끔 강제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방송계의 노동환경 개선은 TV 화면 뒤 노동자만의 문제가 아니다. 방송을 만드는 사람들의 노동권이 제대로 보장되지 않으면 우리의 일상을 즐겁게 해주는 프로그램들은 계속될 수 없다. 방송작가들의 근로자성 인정과 건강한 노동환경 보장이 우리 모두에게 중요한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