젠더 교과목의 순조로운 항해를 위해

젠더 교과목을 둘러싼 장애물, 어떻게 헤쳐나갈 수 있을까

  모든 학문은 저마다의 존재가치가 있다. 젠더 교과목은 남성중심적 세계관을 새로운 시각으로 살피고 그 속의 불평등을 바라볼 수 있도록 하는 학문이다. 익숙했던 불평등에 변화를 요구하는 목소리는 많아지는데, 막상 그를 가르치는 젠더 교과목의 지위는 불안하다. 젠더 교과목이 마주한 어려움과 그 돌파구를 살펴봤다.

사진 설명 시작. 서울대학교 사회과학대학 3층의 어둡고 푸른 복도다. 가까이서부터 여성연구소 게시판, 여성연구소, 게시판, 여성학협동과정 사무실, 여성학협동과정 세미나실이 늘어서 있다. 사진 설명 끝.
▲교내 여성연구소 앞 복도. 젠더 교과목에 주어진 자리는 방 세 칸 뿐이다.

시장화된 대학, 사라진 젠더 교과목의 자리

  젠더 교과목 성장의 가장 큰 걸림돌 중 하나는 학문에마저 시장가치를 매기는 대학구조다. 한국 대학은 김영삼 정부의 5.31 교육개혁 이후로 실용성이나 사회의 주목도가 낮은 학문을 폐과 및 통폐합하거나, 정원 및 강의 수를 대폭 감축해왔다. 대학·학과들 사이에 연구 및 취업 실적에 따른 서열 경쟁을 부추겨 한정된 국가 지원금을 효율적으로 분배하기 위해서였다. 

  젠더 교과목 또한 대학 구조조정의 칼날을 비껴가지 못했다. 시장화된 교육 정책하에 대학은 취업준비기관으로 변모했고, 젠더 교과목의 선호도는 취업시장에서 수요가 없다는 이유로 현저히 낮아졌다. 배은경 교수(여성학협동전공)는 “민주화·반성폭력 운동이 학생사회를 주도하던 2000년대 초만 해도 젠더 교과목은 학생이자 시민으로서 마땅히 들어야 할 기초교양으로 여겨졌으나, 2000년대 중반 이후 취업 안 되는 학문이라는 꼬리표가 붙으며 학생들의 관심이 줄어들었다”고 설명했다.

  학문의 시장성에 따라 자원을 배분하는 대학 구조 또한 젠더 교과목에 불리하게 작용했다. 젠더 교과목 개설과 연구의 중심인 여성학 전공은 국내 대학에 7곳뿐이다. 그마저도 과반수가 대학원에서 정식학과가 아닌 ‘협동과정’으로 운영된다. 여러 학과의 겸임교수들이 운영하는 협동과정은 대학의 자원 분배 체제에서 불리하다. 학과 단위로 자원이 배분되기 때문이다. 협동과정은 정식학과에 비해 할당되는 학생 정원, 강의 수, 장학금이 제한된다. 규모가 작은 만큼 구조조정의 대상으로 폐과 위기에 놓일 가능성도 높다. 홍혜은(여성학협동전공 석사과정 21)씨는 “입학 당시 (여성학 과정의) 정원이 2명이었다”며 “장학 선발도 다른 소수학과 학생들과 한데 묶여 경쟁해야 했다”고 설명했다.

  대학과 고용시장의 외면으로 만들어진 열악한 조건은 젠더 교과목의 차기 교수자 양성도 어렵게 만든다. 김민정 석사(여성학협동전공)는 “어렵게 학위를 취득하더라도 개설되는 강의 수가 적으니 부정적인 전망을 의식해 전공 진입자가 줄어든다”며 “교원 수 부족으로 젠더 교과목의 질까지 하락하는 악순환이 반복된다”고 설명했다.

  시장화된 대학에서 젠더 교과목의 입지는 좁아졌지만, 여성학 전공자들은 젠더 교과목이 대학에서 고유한 가치를 가진다고 말한다. 김민정 석사는 “대학 교육의 목적은 사회 문제를 이해하고 토론할 수 있는 시민을 양성하는 것”이라며 ”젠더 교과목은 우리 사회에 성차별이 존재함을 인식하고, 성차별을 시작으로 계급·인종 등 다양한 영역에서의 불평등을 돌아보는 기반을 마련해준다“고 강조했다. 젠더 교과목이 사라진다면 학생들은 ‘성평등’의 내용과 가치를 배우고, 우리 사회의 불평등에 대해 논의할 기회를 놓치게 된다는 뜻이다.

젠더 교과목에 씌워진 낙인

  

  젠더 교과목에 씌워진 부정적인 이미지도 젠더 교과목을 위축시킨다. 2019년 충북대 에브리타임에 올라온 한 게시물에서는 ‘페미니즘 철학의 이해’라는 교과목을 겨냥해, “이런 강의 들으면 취업에 불리하지 않나요?”, “페미는 모두 신고해야 한다”는 등의 공격적인 언설이 오갔다. 최근 확대된 페미니즘에 대한 적대감이 젠더 교과목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다.

 사진 설명 시작. 반으로 나눠 좌측에는 충북대
▲충북대 에브리타임에 나타난 '페미니즘 철학의 이해' 강의에 대한 공격과 한상원 교수의 반응 ⓒ한상원 교수 트위터, 파이낸셜 뉴스

  페미니즘에 대한 부정적 인식으로 인해 젠더 교과목 수강을 기피하는 학생들도 있다. A씨(인류 19)는 “젠더 교과목에는 여성의 입장만을 내세우는 사람들만 모여 생산적인 논의가 이루어지지 않을 것 같다”며 “젠더·페미니즘이란 용어가 들어간 교과목에 거부감이 든다”고 밝혔다.

  한편 젠더 교과목 수강생들은 이러한 낙인으로 인해 직접적인 피해를 입을 것을 우려했다. 김현서 씨(사회 21)는 “젠더 문제에 관심 없는 친구들에게는 젠더 교과목 수강 사실을 알리기 꺼려진다”며 “면접 지원자에게 페미니스트냐고 묻는 등 소위 ‘사상 검증’을 하는 사례가 전해지면서, 젠더 교과목을 듣고 싶어 하면서도 취업에 영향을 받을까 불안해하는 학생들도 있다”고 밝혔다. 

  대학 내에서 페미니즘에 대한 반감은 공공연하게 표출되고 있다. 익명 커뮤니티 에브리타임에서는 젠더 교과목 수강생에 대한 노골적인 혐오가 전시되는 실정이다. 충북대 에브리타임의 ‘페미니즘 철학의 이해’ 관련 글에는 “누가 수업을 듣는지 구경 갈 것”이라며 수강생들을 위협하는 댓글이 달렸다. 배은경 교수는 이러한 분위기 때문에 “수업 밖에서는 페미니스트가 아닌 척한다는 학생들이 있을 정도”라고 전했다. 젠더 교과목 수강생들이 페미니즘에 대한 적대감을 실질적인 위협으로 느끼고 있다는 얘기다. 그러나 대학 측에서 젠더 교과목과 그 수강생들에 대한 공격을 인지하고, 적극적으로 방어한 경우는 없었다.

젠더 교육에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 사회

  

  젠더 교과목이 소수학문과 부정적인 낙인이라는 이중고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대학 전체의 노력이 필요하다. 교수자들은 대학 사회가 젠더 교육 자체에 무관심해 젠더 교과목의 어려움을 해소하려는 의지조차 없는 상황을 비판했다.

  젠더와 관련된 대학 교양교과목 실태를 연구한 김민정 석사는 “(대학이) 말로는 성평등이 중요하다고 하면서도 성평등을 가르치는 젠더 교과목의 수를 늘리고, 전공자를 지원하고, 수강을 권장하기보다는 강사가 쉽고 재밌게 가르쳐 학생들이 알아서 젠더 교과목을 찾아오도록 만들면 되는 문제로 취급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젠더 교과목의 위기를 강사 개인이 해결해야 할 문제로 가벼이 여기고 있다는 것이 김 석사의 시각이다.

  김민정 석사의 연구에 따르면 많은 대학에선 젠더 교과목의 내용에 대한 관리도 미흡한 상황이었다. 강의명에 성평등을 내세우면서 차별적인 내용을 교육하는 상황이 빈번했다. 전문적으로 젠더 문제를 가르칠 수 있는 교수자를 찾지 않고, ‘여성이 담당해서 가르치면 되는 과목’ 정도로 이해하는 경우도 많았다.

  김민정 석사는 무엇보다 젠더 교과목의 수 자체가 적어 학생들이 젠더 문제를 이해할 수 있는 기회가 적은 상황을 아쉽게 여겼다. 그는 “실제로 수업을 해보면 페미니즘을 알고 싶은 학생, 반박하고 싶은 학생, 이론을 배우고 싶은 학생, 여성가족부와 군 문제 등 현실의 문제를 다루고 싶은 학생까지 다양한 관심과 수준의 수강생들이 존재한다”고 밝혔다. 부족한 수의 강의에서 강사 개인이 이 모든 수요를 충족하긴 어렵다. 김 석사는 “강사 개인에게 젠더 교과목의 개선을 전가하는 구조가 학생들의 수요를 채워주지 못할뿐더러, 학생들이 젠더 교과목에 기대와 흥미를 잃게 만든다”며 대학 사회의 무관심을 비판했다.

  부실한 젠더 교과목 수업의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한국 사회의 젠더 문제에 대한 무관심이다. 조희원 교수(미학과)는 “학생들은 물론 대학 관계자들까지 젠더 문제에 대해 고민할 틈을 전혀 주지 않는 사회 속에서 살아왔기에 젠더 교과목에 대한 거부감을 느끼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학생들이 대학에 오기 전 가장 오랜 시간을 보내는 초중등학교에서도 젠더 교육이 미흡한 상황이다. 교육연구정보원에서 파견 근무 중인 교사 이정미 씨는 “일부 교사나 외부 강사에 의해 진행되는 성폭력 예방 수칙 교육이 학교 현장에서 시행되는 젠더 교육의 대부분”이라고 밝혔다. 이 씨는 “교육부가 주도하는 성평등 연수나 전문 교사단 지원, 인권 동아리 우수 표창과 같이 젠더 교육을 적극적으로 장려할 수 있는 방법은 많지만, 실제 움직임을 찾아보긴 어렵다”고 비판했다.

모든 분야에서 젠더 관점이 필요하다

젠더 교과목의 부흥을 위해서는 사회 전체에 젠더 문제가 우리 삶의 모든 영역과 관련됨을 인식시키는 것이 중요하다. 젠더 교과목 교수자들은 모든 부처의 정책이 성평등한 가치를 수용할 수 있도록 검토하는 ‘성주류화’ 정책처럼, 모든 학문에서도 젠더를 고민할 수 있음을 강조하는 전략을 취하려 하고 있다. 배은경 교수는 “보편적으로 인식되는 성차별, 역사와 문학 속의 여성의 모습을 넘어 모성 건강, 여성친화적 건축 기술, 디지털 기술 등 젠더 관점이 결합할 수 있는 분야는 무궁무진하다”며 “성평등적 가치는 세상을 바라보는 기초적인 관점부터 전문 분야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활용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젠더 교과목의 성주류화 시도는 학생들이 자신의 전공 분야와 젠더 문제의 연관성을 실감하게 하는 교육 과정을 통해 실천되고 있다. ‘성과 사랑의 역사’를 강의하는 기계형 교수(서양사학과)는 수강생들이 젠더·섹슈얼리티·사랑과 자신의 전공 분야를 연계해 만든 이미지들을 전시하는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있다. 기 교수는 “의학을 전공하는 학생이라면 근대 의학의 영향으로 남성중심적으로 해석돼온 인간 몸에 반례되는 몸의 예시를 보여줄 수도 있고, 철학을 하는 학생이라면 역사 속 다양한 시각자료를 이용해 모성이 사회적으로 구성된 것은 아닌지 의문을 제기하는 이미지를 제작할 수도 있다”고 예시를 들었다. 

  한국예술종합대학교의 필수 교양 과목 ‘예술가의 젠더연습’도 성주류화 전략을 이용한 젠더 교과목이다. 해당 강의는 예술활동과 젠더의 관계를 고민하게 하는 수업이다. 학생들은 등장인물의 성별에 국한하지 않고 배우를 선택하는 젠더프리 캐스팅 공연을 선보이는 등 창작 활동에 젠더 관점을 적용할 기회를 얻는다.

  

  한편 여성학 전문가들은 앞으로 젠더 교과목의 항로가 어둡지만은 않을 것이라 예측한다. 홍혜은 씨는 “녹록치 않은 상황이지만, 국사학과·영문학과·교육학과 등 다양한 분야에서 젠더 관점의 연구를 수행하고 싶어 여성학 전공 수업을 수강하는 학생들도 있다”며 “대학 내에서 여건만 마련된다면 젠더를 전공하고자 하는 학생들은 점점 늘어날 것”이라며 긍정적인 전망을 제시했다.

  젠더 교과목의 순조로운 항해는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분야에 젠더가 관련돼있음을 이해하고, 진정한 성평등을 이루려는 노력이 수반될 때 가능하다. 젠더 교과목은 학생들이 성평등에 대한 고민과 실천의 첫발을 내딛는 곳이다. 젠더 교과목의 부흥은 페미니즘에 대한 인식을 개선하고, 사회 구성원 모두가 성평등한 사회에서 살아가기 위한 기반을 다지는 일이다.

댓글 댓글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

Previous Post

다큐멘터리 《교대》에 관한, 기록에 대한 기록으로

Next Post

들어야만 선택할 수 있는 세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