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유정(정치외교학부 정치학 전공 17)
전공 빼고는 모든 곳에 관심이 많다고 착각해, 몇몇 연극단을 배우, 조연출, 연출 등으로 전전하며 예술에 대한 욕망을 풀다 나보다 난리 난 러시아문학을 부전공하며 철이 드는 중일 것이라고 믿었다. 생각보다 더 전공을 사랑하고 있었음을 휴학 후 깨닫는 중이다. 러시아 문화를 영업하려고 글을 기획했는데 더 영업하기 어려운 국가가 된 현세의 국제정치를 바라보며 러시아 초콜릿 ‘알룐까’만을 씹고 있다.

잊고 있었다. ‘국뽕’ 중 제일은 영국이었다.
‘K-국뽕’이 범람하는 오늘날, 이에 대한 독자들의 생각은 어떠한가? 필자 역시 K-국뽕이 마냥 반가운 것은 아니다. 그 주력 콘텐츠가 수많은 혐오 논란과 여성 지우기 등으로 이뤄지고 있기에 더욱 그렇다. 그러나 감히 서브컬처 마니아로서 말하건대, K-국뽕은 영국과 일본, 제국주의의 그것에 비하면 귀여운 수준이다. 한국의 그것은 그저 우리의 것이 세계에 알려질 수 있고, 먹힐 수 있다는 것에 집중하지만, 이 제국주의자들은 자신의 과거의 영광을 다시금 확인하고픈 욕망을 스크린과 텍스트, 모니터에 드러낸다. 그들이 누구보다 강력했던 제국임은 당연히 알려져 있는 역사적 사실이며, 그 속의 착취와 학살은 교묘하게 숨겨지거나 정당화된다. 본고는 영화 《킹스맨: 퍼스트 에이전트》(킹스맨)를 소개하며 제국을 너무나 자랑스러워 하지만, 누구보다 평화를 사랑하기 위해 제국을 앞세우고 러시아와 독일을 적으로 돌리는, 기막히는 전치극의 ‘무해한 정치적 음모’를 파헤치려 한다.
퇴색된 시리즈의 본질, 그러나 그래도 봐야하는 요소가 있다면
매튜 본 감독의 킹스맨 시리즈답게 이번 작품 역시도 킬링 타임물로서 꽤나 괜찮은 역할을 한다. 이중적 의미의 킬링이다. 시간 때우기에도 좋고, 진짜 ‘죽이는 시간’의 향연이 30분 넘게 이어지기 때문이다. 이번 시리즈는 킹스맨 세계관의 서사적 프리퀄로서 훌륭한 기반을 마련함과 동시에, 1편부터의 킹스맨의 모순적 정체성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그야말로 프리퀄의 정석이다. 다만 아쉬운 점이 있다면, 1편에서 혁신적으로 다가온 박진감 넘치는 액션과 희화화된 각종 죽음은 1편 이후로 명맥을 잇지 못한다는 것이다. 영국인 작곡가 엘가의 ‘위풍당당 행진곡’이 흐르며 이뤄지던 대량 살상 신의 카타르시스는 더이상 없다. 이제는 그저 영국판 역사 국뽕용 ‘라이트 노벨’의 시각화에 주력을 하는 것인가? 세계사의 팩트에 따르면 제1차 세계대전에서 우리가 카타르시스를 느낄 법한 살상이 없었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영국이 평화라는 대의를 위해 킹스맨이라는 조직을 만든다는 설정부터 아프리카 대륙을 들쑤신 세계사의 팩트와는 거리가 멀기에, 어차피 날조할 것이었다면 재미를 더 챙겨줬으면 하는 아쉬움은 매우 크게 남는다.
그래도 이번 영화는 러시아 제국의 등장, 그리고 이미 게임 ‘저스트 댄스’를 통해 더욱 유명해진 라스푸틴의 등장으로 재미 포인트는 확실히 챙겼다. 사실 노어노문학과 부전공 과정을 마친 필자의 입장에서, 이 둘의 등장은 근대 역사물의 ‘치트키’와 같다고 생각한다. 전설 속의 인물, 라스푸틴이 청산가리를 먹고도 살아남아 러시아 전통춤을 추며 공격을 선보이는 시퀀스는 영화관에서 홀로 폭소를 터트리게 하는 명장면이었다. 영국의 정예 기사 셋이 겨우 달라붙어 저지하는 동안, 라스푸틴은 러시아풍 왈츠에 맞춰 춤을 추며 전투를 즐긴다. 저격수 한 명이 더 들러붙어서야 라스푸틴은 전설 속 그대로의 죽음을 맞이한다. 두 발의 총상을 입고도 쓰러지지 않다가 물속에서야 익사한 그 전설대로 말이다.
다만 러시아가 아닌 영국을 위한 영화여서 그런지 니콜라이 2세와 라스푸틴이 서 있고, 노동자들이 4월 테제를 외치던 러시아 제국의 궁전은 비루하기 그지 없었다. 에르미타주의 가장 작은 방보다도 비좁은 공간에서 국정과 가문을 논하는 황가, 혁명을 논하는 노동자는 몰입감을 완전히 깨버리는 장면이었다. 역시 영토가 좁은 영국은 상상할 수 없는 규모였나보다. 그래도 세계사의 비주류로 남아 불곰, 보드카, 소비에트 연방으로나 등장하면 다행인 러시아가 라스푸틴과 함께 등장한다는 것은 소소한 감동 포인트였다. 이 재밌는 것을 우리만 알 수 없다는 마음이 컸기 때문이다.
한편, 2편에서는 기존 인기 캐릭터들의 목이 허무하게 날아가 버린 전적이 있다. ‘갤러해드’ 역할이던 록시가 사라졌을 때 필자는 분노할 수밖에 없었다. 안 그래도 벡델 테스트도 통과하지 못하는 킹스맨 속에서 하층민이던 에그시를 챙겨주던 유일한 엘리트 여성인 록시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킹스맨의 여성 캐릭터, 욕을 좀 먹고 나서 변했을까? 전혀 아니다. 그냥 이번엔 죽지 않을 뿐이다. 남성의 한심함을 지적해주고 커버하며 “역시 남자는 안된다니까요” 라는 말을 뱉는 여성 캐릭터가 들어가면 유머러스하면서도 통쾌한 젊은 남성 감독의 면모가 보여질 것이라는 클리셰, 혹은 착각이 문화계에 단단히 박혀있는 것인가? 그렇지 않아도 현실의 남성들은 이미 말도 못하게 한심한 짓을 저지르고 있고, 일일이 딴지를 걸기도 지친 여성들은 이제 남성 자체를 ‘불매’한지 오래다. 멋있고 능력도 있는, 아이 캔디에 그치지도 않는 복장의 여성 캐릭터 폴리는 결국 철저히 조연에 그치고 만다. 중간에 최고급 캐시미어 생산지이자 최종 전투지인 어둠의 조직 위치를 선뜻 알려주는 여성 캐릭터의 역할 역시도 불분명하다. ‘그냥 바보가 아닌가?’라는 생각과 ‘왜 하필 이 캐릭터는 또 여성인가?’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그렇게 밝혀진 세계평화를 해치는 어둠의 조직의 보스는, 다름 아닌 스코틀랜드 출신 인물이었다. 영화에서 이것이 밝혀지자마자 당시 한국사능력검정시험을 이미 치렀던 필자는 분노에 휩싸였다. 감히 누가 평화를 지키고, 또 해치는 역할로 날조된 것인가? 스코틀랜드의 평화는 오롯이 영국에 의해 파괴되지 않았나? 그것도 스코틀랜드에서 힘겹게 자라 영국에서 어느 정도의 입지를 가질 정도로 똑똑한 엘리트가 사실 세계평화의 숙적이었다는 설정은 ‘날조도 정도가 있지’라며 혀를 차게 만들었다. 1편과 2편은 신사의 나라 영국과 대조되는, 그러면서도 상스러운 문화를 퍼트리는 패권국 미국에 대한 신랄한 비판이었기에 그저 ‘겨 묻은 개’와 ‘똥 묻은 개’들의 싸움으로 볼 수 있었다. 그러나 강약의 구도가 명확한 세계사를 이런 식으로 주류 문화에 날조 및 편입하는 것은 참을 수 없다. 당장 우리 역사로 치환하면, 일본 제국이 세계 평화를 지키기 위해 결성한 자경단이 발견한 악의 축이 자국 내의 식민지인, 예컨대 윤동주 시인과 같은 인물이었던 셈이다. 과연 윤동주 시인이, 혹은 그 비슷한 인물이 “육첩방은 남의 나라”라고 외치며 일본뿐 아니라 세계를 멸망시키려 들고, 또 실제로 위력을 발휘했는가? 세계 평화의 파괴를 자행해온 한 세기의 역사를 덮어쓰고 ‘평화 지킴이’마저 되고 싶은 제국의 욕심까진 백번 양보해서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적수로 자신들이 착취해오고 탄압해온 국가를 둔다는 것은 도를 지나쳤다는 생각에 이 시리즈 전반에 대한 정이 떨어지는 계기가 됐다.
킹스맨, 앞으로도 지켜봐야 할까?

이번 프리퀄은 기존의 킹스맨 시리즈에 대해 명확히 인식하고 킬링타임이라는 목적을 상기하며 생각없이 보다가도, 끝도 없는 모순과 역사 날조에 헛웃음이 나는 영화였다. 역시 영국은 유럽의 일본과 크게 다를 바 없는 생각을 가진 나라인 것일까? 세계사를 정치학 수업 n개로 귀동냥한 ‘알못’(알지도 못하는 사람)이 평화주의에 감히 한 마디를 얹게 할만큼 기가 막힌 영화였다. 전쟁으로 잃어버린 영국인 주인공의 아들 하나와 죽어가는 수많은 식민지, 적국의 민간인을 교환하는 이 영화는 완전 비탄력적인 영국의 한계효용함수를 잘 보여준다. 게다가 영화를 보는 내내, 매력없는 주인공과 영국이라는 국가에는 관심이 전혀 가지 않는다. 자국을 위한 ‘라노벨’의 시각화로서는 꽤 괜찮은 역할을 할지도 모른다. 다만 전세계적으로 진행되는 정치적 우경화 속에서 이 영화가 가짜뉴스의 역할을 하는 것은 아닐지 걱정도 된다. 자발적으로 노동권과 시민권을 지키기 위해 일어난 사회주의 혁명의 배후에도 주동 세력이 별개로 존재한다는 설정도 세계사에 대한 존중이 전혀 드러나지 않는다. 차기에 제2차 세계대전을 다룬 한 편의 프리퀄이 더 예정되어 있다는 ‘카더라’ 소식이 있다. 해당 전쟁은 명백하게 독일과 일본의 과오가 세계적으로 알려져 있는 터라, 앞으로 킹스맨 시리즈에서 영국의 평화지킴이 노릇이 정당화될 생각을 하면 이만 이 영화를 지켜보는 것을 멈추고 싶다. 홀로코스트를 자행하는 독일인, 혹은 히틀러와 그 수하를 무참히 살해하는 장면이 새로운 카타르시스를 가져다줄 생각을 하면 기대되는 측면도 있지만, 이번 프리퀄을 통해 그 카타르시스의 전달 주체가 영국일 것이라는 생각을 영영 지울 수 없게 된 개인으로서, 영화관에서는 더이상 킹스맨 시리즈를 만날 생각이 없다. 이 영화에서 남는 것은 비루한 러시아 궁정 고증과 사실상 최종보스여야 했을 듯한 라스푸틴 말곤 없다.

《킹스맨:퍼스트 에이전트》의 주인공 옥스포드 공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