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위선 떤다’는 표현을 자주 듣습니다. 인권이니 평등이니 하는 실속없는 말들은 결국 도덕적 우월감을 얻으려는 욕심에서 나온 것이라고요. 이렇게 말하는 이들은 위선을 어리석음과 연결짓습니다. 세상을 겪어보지 않아서, 누군가의 전략에 휘둘려서, ‘머릿속이 꽃밭이라서’ 위선에 불과한 말들을 늘어놓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이들의 논리에 따르면 장애인 이동권 시위를 지지하는 사람은 위선자입니다. 비장애인이 받는 ‘피해’는 생각하지도 않고 무조건적으로 시위자들을 지지하니까요. 비건도 위선자입니다. 자기도 완벽하지 않으면서 남에게 까다롭게 구니까요. 선을 말하는 행위는 모두 위선입니다.

  위선이 없는 세계를 상상해봅니다. 모든 선이 위선이라면 그 세계는 순수한 악의 세계일 것입니다. 어떤 폭력과 부조리도 통제되지 않을 겁니다. 개인의 이익을 좇는 것이라면 어떤 행위든지 용인되고, 강자가 아니라면 도태되는 것이 당연합니다. 비정하지만 적어도 거짓은 없는 세계입니다. 위선 없는 세계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냉소뿐입니다. 냉소는 날카롭지만 힘이 없습니다. 움직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입에서 내뱉으면 그뿐입니다.

  

  하지만 위선은 움직입니다. ‘도덕적 우월감’을 얻기 위해선 남에게 보여줘야 하니까요. 제대로 위선을 떨려면 행동하고 결과를 만들어야 합니다. 원칙을 세우고 지켜야 합니다. 원칙이 작동하는 체제를 갖춰야 합니다. 그렇게 만들어진 게 문명, 질서, 사회규범입니다.

  세상에 완벽한 선은 없습니다. 그렇기에 누군가가 위선자라 손가락질하는 이들은 스스로 선의 기준을 찾습니다. 자신의 선을 찾기 위해 헤메고, 숙고하고, 대화하고, 때로는 싸웁니다. 위선이 있는 세계는 치열합니다. 그래서 피곤하지만 동시에 아름답습니다.

  이번 호는 선에 대한 신념을 이야기합니다. 갈등을 조장하며 소수자를 배제하는 기성 정치를 비판하고, 비건 실천을 위해 노력하는 이들의 목소리를 담았습니다. 반전과 평화를 외치는 작품들을 소개했습니다. <서울대저널> 역시 위선을 떤다고 평하는 이가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달갑게 받아들일 것입니다. 위선이라도 있는 세계가 훨씬 살아갈 법 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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