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자신이 소비하는 상품을 위해 분노하고, 행동하는 사람들이 있다. 사람이 상품이자 소비자인 아이돌 산업에서는 소비 자체를 두고 복합적인 감정들이 오간다. 최근 아이돌 산업에서 팬덤의 소비 경험과 그에 대한 소회를 들어봤다.
소비자이자 사랑꾼, 팬덤

팬들의 애정이 담긴 소비목록. 앨범, 포토카드, 슬로건, 공연 티켓 등 종류도 가지각색이다.
팬들은 덕질과 관련된 소비에 다양한 욕망과 감정을 반영한다. 인터뷰에 참여한 팬들이 앨범을 사는 이유는 저마다 달랐다. 소비가 본인에게 가져다 줄 행복을 꼼꼼히 따지는 편인 신현승 씨(가명)는 “예쁘게 만들어진 앨범을 가지면 내가 기분이 좋아서 구매하는 편”이라고 말했고, 배아름 씨(가명)는 아이돌에게 보답하고 싶은 마음에서 소비를 한다고 했다. 배 씨는 “아이돌이 나를 행복하게 해주고 힘들 때마다 힘을 주는 만큼 나도 그들의 행복에 기여하고 싶다”며 “아이돌이 높은 실적을 거둘 수 있도록 음원 스트리밍(스밍), 앨범 구매, 홍보 등을 한다”고 말했다. 아이돌이 성장하는 과정을 보며 대리만족을 느끼는 경우도 있었다. 좋아하는 아이돌의 직업정신에 반했다는 김다운 씨(가명)는 “좋아하는 사람이 성실히 해서 잘 되는 걸 보니 덩달아 뿌듯하기도 하고, 아이돌이 거둘 수 있는 성공은 (나의 성공과 달리) 규모가 크기 때문에 대리만족이 되기도 한다”고 얘기했다. 아이돌의 성적은 특히 팬덤의 소비를 추동하는 요인 중 하나다. 단순히 아이돌이 높은 성적을 받아 기뻐하는 모습을 좋아하는 팬들도 많지만, 높은 성적을 목표로 소비를 하는 팬들도 있다. 최근 음원 성적 및 앨범 판매량이 아이돌의 평판을 좌우하는 지표로 자리잡으며 이런 소비 형태는 특히 두드러지고 있다. 정민재 대중음악평론가의 설명에 따르면, “(앨범 판매량 등의 성적은) 아이돌의 가요 시장에서의 입지를 보여주는 지표로, 아이돌의 몸값을 키워 더 수준 높고 넓은 무대에서 투어·공연 등의 주 수입 활동을 진행할 수 있게” 하므로, 소속사에서도 팬들의 소비를 통해 높은 성적과 수익 두 마리의 토끼를 모두 잡고자 하는 실정이다. 높은 성적 달성을 위한 팬들의 소비는 무척이나 열정적이다. 2010년대 초중반 데뷔한 아이돌의 팬덤에서는 집단적으로 음원 사이트 이용권을 구매해 좋아하는 아이돌의 노래를 재생하고 다운로드하는 것을 반복하는 ‘스트리밍(스밍)’이나 대량의 앨범 공동구매가 등장했다. 일부 팬들은 효과적으로 높은 성적을 낼 수 있게끔 팬덤 전체의 소비 전략을 기획·홍보하는 ‘총공팀’을 조직한다. 총공팀의 가장 대표적인 활동은 음원 사이트에서 높은 음원 성적을 얻게끔 구성한 재생목록인 ‘권장 스밍리스트’를 제작하고 공유하는 것이다. 한 음원을 반복 재생하면 음원 사이트에서 음원의 실제 재생 여부를 의심해 재생 횟수를 누락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총공팀은 특정 시간을 정해 집중적으로 스밍하는 ‘스밍 총공’과 음악 방송 투표 등의 움직임을 주도하기도 한다. 총공팀에서 활동하지 않더라도 1분 이상 음원을 들었다고 인증해준 사람에게 사비를 들여 선물을 제공하는 이벤트를 여는 팬들도 많다. 아이돌을 위한 팬들의 소비는 ‘입시 컨설턴트’를 방불케 할 만큼 전략적이고 열정적이다.나는 ‘감정 있는 ATM’이라고 팬덤의 열띤 소비는 코로나19 이후 공연산업의 침체에도 불구하고 아이돌 산업을 지탱해왔다. 대면 공연이나 행사가 불가능한 와중에도 케이팝 시장이 수익을 낼 수 있었던 것은 팬들을 겨냥한 굿즈 판매, 영상통화 팬 사인회, 유료 소통 어플 덕분이었다. 팬덤을 겨냥한 산업, 일명 ‘팬더스트리’의 높은 수익성을 인지한 후 업계는 팬덤을 ‘이제는 소비자가 아닌 산업 파트너’라며 추앙하고 있다. 그러나 정작 팬덤은 스스로를 ‘감정 있는 ATM’이라 지칭한다. 아이돌 산업이 자신들을 자동으로 돈이 입금되는 ‘ATM’ 취급하면서 과소비를 유도하고 있음을 비판하는 표현이다. 대표적인 것이 앨범을 이용한 상술이다. 대부분의 소속사 및 앨범 유통사들은 팬 사인회 응모 기회를 앨범 구매량에 비례해 제공하거나, 팬들이 가장 좋아하는 사은품인 포토카드(포카)의 종류는 늘리면서 원하는 포카를 선택할 수 없게 해 앨범 판매량을 늘리고 있다. 한때 포토카드를 모으는 것이 취미였다는 이수영 씨(가명)는 “시중에 유통사가 족히 10곳이 넘는데 이 유통사들마다 포카의 버전이 다르며, 예약 판매 기간에 앨범 사양을 공개할 때도 포카 사진을 흐릿하게 가려서 올려주는 곳도 있었다”며 불만을 표했다. 이 씨는 심지어 “멤버 인원 수만큼 앨범을 사면 모든 종류의 포토카드를 제공한다며 앨범을 많이 팔려는 목적을 뻔히 드러내는 곳도 있었다”며 씁쓸한 감정을 전했다. 최근 팬들 사이에서는 앨범 대량 생산으로 인한 환경파괴 문제도 대두되고 있다. 성적을 위해선 앨범을 대량 구매할 수밖에 없어 구매 후 실물 앨범은 받지 않거나 실물 앨범을 대신 처분해주는 업체를 부르기도 한다. 류정은 씨(가명)는 “케이팝 산업이 쓰레기를 대량생산하고 있다”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표지를 멤버 개인별로, 포카도 종류별로 생산하고 무작위로 증정하는 관행은 계속되고 있다”고 비판했다. 아이돌과 소통할 수 있는 유료 소통 어플도 유료 결제를 지나치게 유도하면서 팬들의 불만을 사고 있다. 유료 소통 어플 ‘Fab’의 경우, 아이돌이 올린 게시물을 보기 위해선 유료 결제를 해야 한다. 또 다른 어플인 ‘포켓돌스’도 기본 구독료에 더해 메시지당 추가 금액을 지불하면 아이돌에게 직접 답장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포켓돌스를 사용한 배아름 씨는 “아이돌과 소통하고 싶고, 답장을 받으면 들뜨는 마음에 사용했지만, (아이돌 산업의) 모든 것이 돈으로 환원되고 팬과의 대화까지 판매하는 게 기괴해 그만두게 됐다”고 말했다. 팬 대상 상품의 낮은 질에 모멸감을 느꼈다는 팬도 있었다. 아이돌 굿즈 수집을 즐기는 박윤아 씨(가명)는 “소속사에서 판매하는 공식 굿즈가 싼 가격도 아니었는데, 플라스틱 케이스도 어긋나 있고 글씨도 하나 덜 새겨져 있었다”며 “돈 내고 사는 상품의 질이라고 납득하기 어려웠다”고 비판했다. 류정은 씨는 “로고 하나 박힌 응원 도구를 2만 원에 판매하는 것을 보면 (소속사가) 팬덤을 어떤 상품이든 내놓으면 사는 집단으로 보고 ‘돈줄’로 대한다는 느낌이 강하다”며 불만을 표했다. 소비자로서의 부정적인 경험은 헌신적인 팬들의 소비도 주춤하게 한다. 이수영 씨는 “예전에는 아이돌의 성적을 올려주고 정서적 지지를 표하기 위해 소비를 했지만, 점점 애정으로 소비를 하는 건지, (상품이) 있으니까 산다는 식의 의무감에 소비를 하는 건지 허탈한 기분이 들어 적극적인 소비는 하지 않게 됐다”고 밝혔다. 류정은 씨 역시 “방치되다시피 쌓여 있는 앨범을 보면 돈을 필요 이상으로 썼구나 싶어 허탈한 마음도 들어 소비를 자제하게 된다”고 털어놓았다.상품이 된 친밀성의 양면
친밀성의 상품화도 팬덤 내에서 큰 화두가 되고 있다. 일대일 채팅을 하는 듯한 경험을 제공하는 유료 소통 어플, 일상의 사소한 모습까지 보여주는 방송 콘텐츠와 실시간 소통 콘텐츠가 친밀성을 상품화한 대표적인 사례다.
경남대 장민지 교수(미디어영상학과)는 친밀성이 높은 상품 가치를 갖게 된 배경이 미디어 환경의 발전이라고 분석한다. “연예인의 과거, 실시간, 일상까지 노출되는 미디어 환경에서 일반인처럼 평범하고 친근한 모습이 대중의 호응을 얻기 시작했다”는 것이 장 교수의 설명이다. 장 교수는 특히 아이돌 산업에서는 “완벽하기보단 조금은 부족하고 인간적인 아이돌의 성장을 (팬으로서) 함께 할 수 있다는 감각을 자극해 팬들의 몰입감을 강화한다”고 강조했다.

아이돌과 팬이 친밀감을 공유하는 유료소통 어플의 예시
*위 사진은 인터뷰이들의 실제 채팅 내용을 기반으로 제작된 가상의 채팅입니다.
팬들의 반응도 뜨겁다. 걸그룹 아이즈원의 유료 소통 어플 ‘버블’을 사용했던 윤나리 씨(가명)는 “멤버의 개인적인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는 게 새로웠다”며, “다른 멤버랑 카페에서 뭘 먹었다는 소소한 이야기를 해주니 친구와 이야기하는 기분”이었다고 경험담을 풀어놨다. “아이돌이 나를 호명할 때 사용할 닉네임을 직접 설정할 수 있는 것도 좋았다”고 덧붙였다. 강유진 씨(가명)도 “아이돌과의 소통 창구가 공식 팬카페나 SNS뿐이었을 때는 (공개적인 곳이다 보니) 개인적인 애정 표현을 하기 부담스러웠는데, 유료 소통 어플이 등장한 뒤에는 내가 무엇이 좋았고, 어떤 면에서 고마웠는지 사적으로 전달할 수 있게 된 것이 좋았다”고 호평했다.
양고은 씨(가명)는 아이돌이 선보이는 다양한 콘텐츠 중 일상을 공유하는 콘텐츠를 가장 좋아한다. 양 씨는 “숙소 이야기를 하거나 멤버들이 자기들끼리 노는 모습에서 성격이 보여서 먼 나라 사람 같던 아이돌과 가까워지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며 일상 콘텐츠를 즐겨보는 이유를 밝혔다. 중소 기획사의 보이그룹을 좋아하는 김다운 씨도 친밀성 상품에 대해 “친밀성은 아이돌이 V라이브, 소통 앱 등을 통해 충분히 노력하면 채울 수 있는 부분이기에 자본이 부족한 중소 아이돌도 어필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 같다”며 긍정적으로 평했다.

*포토이즘과 KCON Premiere의 콜라보 프레임을 기자가 직접 체험한 사진입니다.
한편 친밀성이 상품이 되자 돈을 냈음에도 정서적 보상을 받지 못하는 데서 서운함을 느끼게 됐다는 팬들도 있었다. 박윤아 씨는 “다른 멤버 혹은 다른 그룹은 팬들과 소통을 얼마나 하는지 비교할 수 있다 보니 같은 돈을 내고도 내가 좋아하는 멤버가 메시지를 보내지 않으면 부당한 기분을 느낀다”고 말했다. 배아름 씨도 “버블을 결제했는데 한 달 동안 아이돌이 메시지를 보내지 않아 환불을 받는다고 한탄하는 경우를 자주 봤다”며, “환불받는다 해도 솔직히 누가 기분이 좋겠냐”고 덧붙였다.
아이돌의 친밀성이 소비자가 돈을 낸 대가로 마땅히 주어져야 한다고 여기는 것에 대한 우려도 크다. 장민지 교수는 “친밀성이 상업화되면 연예인과 팬 사이의 거리감이 좁혀지고 공사의 경계가 흐려져 (팬이나 대중이) 자신도 연예인에게 어느 정도 수준의 요구를 할 수 있는 사이라고 착각하게 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연세대학교 커뮤니케이션연구소 강보라 전문위원은 “돈을 주고 연예인과의 친밀한 관계를 사는 문화 속에서 연예인은 돈을 주면 무엇인가를 해줘야 하는 존재이자 나의 지적을 받아들여야 하는 존재가 된다”며, “최근 유튜브 등에서 아이돌의 자질을 평가하는 영상 및 댓글이 증가한 것도 친밀성이 상품화된 결과와 무관하지 않다”고 꼬집었다.
유료 소통 어플 사용은 이미 아이돌의 성실성을 평가하는 척도로 이용되고 있다. 양고은 씨는 “트위터에서 유명한 홈마가 ‘얘는 내가 돈을 이만큼이나 썼는데 성의를 보이지 않는다’며 소통을 자주 하지 않는 멤버에 대해 공격적인 어조로 글을 쓴 것을 본 적이 있다”고 증언했다. 장민지 교수는 “상호호혜적이지 않은 팬과 아이돌 관계에서 친밀성을 돈으로 사게 만드는 케이팝 산업의 구조는 팬들이 ‘내가 너를 위해 이렇게까지 하는데 감사하다는 말 한 마디 해주는 것이 어렵냐’는 생각을 들게 한다”고 지적했다.
친밀성의 상품화에 대한 문제의식은 팬덤 내에서도 커지고 있다. 김다운 씨는 “사생활을 침해하는 수준으로 아이돌을 따라다니는 팬들도 많고 팬들과의 소통을 강요하는 등 팬들이 아이돌의 일상과 자율성에 개입하는 것이 팬덤 내에서 자연스러워진 것 같다”며 우려했다. 전문가들은 지나친 상술과 아이돌에 대한 팬덤의 과도한 요구 등이 개선되지 않은 채 친밀성을 사고파는 행위가 계속된다면 팬덤과 아이돌, 케이팝 산업 간의 감정의 골이 더욱 깊어질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애증의 케이팝, 오래오래 즐기고 싶다
팬덤은 이미 이러한 아이돌 산업의 문제에 대해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고 있다. 아이돌 그룹 및 팬덤 간의 경쟁을 부추기는 케이팝의 ‘줄 세우기’ 문화를 비판하는 팬들도 많다. 배아름 씨는 “최근 들어 음반 시장은 앨범의 하루치 판매량까지도 그래프로 기록하고, 음원 사이트는 5분 단위의 음원 차트나 음원별 이용자 수를 공개하는 등 팬덤 간의 경쟁을 부추기는 요소가 많아지고 있다”고 우려했다. 배 씨는 “상황이 이렇다 보니 성적이 잘 나오는 그룹은 다음에 성적이 떨어질 것을 걱정하고, 잘 안 나오는 그룹은 또 그들대로 스트레스를 느낀다”고 전했다.
과소비로 인한 환경파괴에 대응하고 대안 모색을 촉구하는 팬들도 있다. 기후위기에 대응하는 케이팝 팬들이 모여 결성한 네트워크 ‘케이팝포플래닛’은 2021년 과잉 생산된 앨범을 아이돌 소속사에 전달하며 케이팝이 환경에 미칠 영향을 고려하라는 메시지를 보내는 퍼포먼스를 진행했다. 최근 빅톤, 청하, NCT DREAM 등 일부 아이돌은 앨범은 디지털화하고 포카만 발송하거나 친환경 소재로 앨범을 제작한 사례를 보여 긍정적인 반응을 얻고 있기도 하다.
팬덤이 자정의 움직임을 보이는 만큼 기획사 등 업계의 행보도 중요하다. 정민재 대중음악평론가는 “업계가 중복구매를 유도하는 상술을 사용하는데 넘어가지 않을 팬이 어디 있겠냐”며 “각종 음원 사이트의 ‘순위 예측’ 기능이나 앨범 버전을 지나치게 다양화해 판매하는 관행이 팬들에게 경마 경주를 시키는 상황”이라고 꼬집었다. 정 평론가는 과소비 조장과 그로 인한 환경 파괴 문제에 대해 “시스템적인 변화 없이는 아무리 케이팝 시장이 커져도 자랑스러운 문화가 될 수 없다”며, “친환경적인 재료 사용, 수량 등 앨범 제작에 관련한 법 조항이 제정되거나, 수익이 떨어질 걸 각오해서라도 음반사, 기획사가 합심해 구조를 바꿔나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탈케합니다(탈케이팝합니다)’라는 말이 있다. 케이팝 산업을 향유하며 겪은 부정적인 경험 때문에 케이팝을 그만 좋아하겠다는 의미를 담은 신조어다. 그러나 인터뷰에 참여한 팬들은 정말 ‘탈케’하는 사람은 드물다고 입을 모은다. 그만두기에는 이미 케이팝을 너무나 사랑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케이팝 산업이 팬덤의 허탈함과 윤리적 고민을 등한시한다면 ‘탈케’는 말뿐만이 아닌 현실이 될 수 있다. 지속가능한 케이팝 산업을 위해 팬덤과 아이돌 산업의 변화가 시작돼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