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윤태은(미학 14 졸업) ty269@cornell.edu
젠더연구자, 번역가, 그리고 곧 박사과정생
영국으로 석사 유학을 결심했을 무렵, 젠더·퀴어이론을 공부하는 젠더퀴어라고 스스로를 밝히면 꽤나 많은 사람들이 아이돌이나 팬픽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나는 우스갯소리로 한국에서 이 공부 하면 아이돌 퀴어 착즙으로 먹고 살아야 할 것 같아서 유학간다고 대답하고는 했는데, 이 질긴 질문은 뜻밖에 유학 중에도 계속해서 나를 따라다녔다. 전공 수업 세미나 첫 시간 내가 한국에서 태어났다고 스스로를 소개하면, 인종과 국적을 불문하고 정말 많은 사람들이 나에게 BTS를 좋아하느냐고, 그들이 정말 퀴어하지 않느냐고 물었다.
나는 그들이 몇 명인지 누가 누구인 줄도 모르는데, 아무쪼록 이제 제발 그만 물어봤으면 싶었다. 그즈음 런던에서는 BTS를 주제로 한 학회가 열렸고, 몇 명의 동기들이 나에게 같이 가지 않겠냐고 물었다. ‘A의 퀴어함’으로 점철된 주제들이 마음에 들지 않아 싫다고 했다. 단지 이 아이돌 그룹에 국한된 일도 아닌 것이, 미술 비평에서부터 대중문화 담론의 장에서 A가 퀴어하다는 선언은 매우 흔히 목격된다. A라는 인물이나 그의 퍼포먼스가 이러저러해서 퀴어하다는 결론은 결국 A의 대단함을 더 뿌듯하게 되새기는 계기가, 심지어는 A에 대한 사랑을 지적으로 정당화하는 근거가 된다. 퀴어라는 형용사가 모욕으로 여겨지던 역사가 무안할 만큼, 동시대 한국 문화 담론의 장에서 ‘퀴어하다’ 는 동사는 꽤나 메달처럼 수여된다.
나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사실 세상이 퀴어를 꾹꾹 짓눌러대는 마당에 긍정의 선언이 꽤나 대수인 시대라는 데 이의는 없다. 자기 눈에 퀴어하다는데 내가 뭐 어쩌겠는가 싶기도 하고, 나는 이들의 최애가 정말 퀴어인지 아니면 퀴어한지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다. 실로 퀴어링(queering)은 많은 퀴어 비평가들이 이성애중심주의적 문화에서 퀴어나 퀴어함을 읽어내며 재전유하는 방식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동시에, 나는 이 손쉬운 전복의 선언이 그 안의 우글거리는 불화와 꽤나 배치된다는 불편한 감각을 지울 수 없었다. 팬픽이든 아이돌이든, 최애가 퀴어하다고 선언하는 행위는 퀴어라는 복합적인 실천, 수행, 정체성, 문화를 무조건 전복적이며 따라서 대단한 것으로 단순하게 이상화한다. 그래서 학문으로 퀴어이론을 한다는 사람이 온갖 자기가 좋아하는 것이 ‘퀴어하다!’고 추켜세우는 건 왠지 좀 눈꼴시린 일이라고 생각했다. 대체 왜 최애를 사랑하는 방식이 꼭 퀴어라는 메달을 걸어주는 것이어야 하는지 말이다.
이 뭉툭한 불편함의 감각을 다시 환기한 것은 예상치 못한 코로나19의 등장이었다. 석사학위 코스웍이 끝나고 논문 집필에 본격적으로 들어갈 무렵 팬데믹이 터졌다. 2020년 3월 즈음에는 런던도 상황이 꽤나 나빠졌고, 인종차별의 수위와 빈도가 높아졌으며, 논문 지도가 전면 비대면으로 돌아갔다. 코로나가 잠잠해질 때까지 한두 달만 한국에 있다 오자고, 짐을 반만 싸서 급히 귀국했다. 나는 일주일에 한 번은 미술관을 가거나 콘서트를 가거나 연극을 보거나 해야 정신건강을 유지할 수 있는데, 런던이고 서울이고 온갖 공연들이 취소됐으며 사랑하는 문화공간들이 임시 휴업에 들어갔다. 풀타임으로 논문을 쓰는 와중에 점점 메말라가는 기분이 들었다. 이 이상한 우연들이 겹친 와중 어떤 성악가를 아주 좋아하게 되었다. 아주 아주 아주 폭닥 빠졌다. 석사논문 집필 외의 거의 모든 시간을 이 사람의 음악을 듣고 사진을 저장하고 없는 돈을 털어 일주일에 한 번씩 공연을 가고 마음을 다해 그의 클래식 레퍼토리를 공부하는 데 썼다. 내 사랑의 방식은 동일시 기반의 유사연애도 대상화 기반의 RPS도 아니었다. 그는 내게 상쾌한 도파민 제공처였다고 하는 편이 가장 가깝겠다.
아무튼 이 사람이 아이돌은 아니지만, 그 덕분에 최애에게 뭐라도 걸어주고 싶은 그 마음을 나도 대충은 알게 됐다. 내 최애의 퀴어함에 대한 선언을 내가 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어쩌다 보니 그런 논지의 글도 써서 기고했다. 그래도 메달을 걸어주고 싶어서 쓴 글은 아니었다. 오히려 나는 A가 “젠더 이분법으로 설명되지 않는 퀴어한 존재다”라고 말하면서 계속해서 그의 음악에서 이성애자 남성성만을 읽어내는 팬덤의 경향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다시 말해 A가 수행하는 퀴어한 여성성에 대한 대중의 이성애중심적 거부에 대해 짜증이 나서 쓴 글이었다. 그러니까 나는 ‘A가 퀴어하다’는 선언 자체보다는 왜 그렇게 말하는지, 그 선언의 효과는 무엇인지가 궁금했고 이 경우 결과적으로 퀴어 선언이 이성애중심적 남성성을 대단하다고 재확인하는 데 그친다는 점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이 시간을 통해 나는 내 최애가 퀴어한지 아닌지보다, A가 퀴어하다고 선언하는 호명의 과정에 대해 더 많이 생각하고 말하고 쓰고 싶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무엇에서 퀴어함을 찾아서 퀴어하다고 결론짓는 데 그치지 않고, 무엇이 퀴어하다고 한다면 이 호명이 어떤 차원에서 이루어지는지가 궁금하다. 그 호명의 동기와 이면의 정상성에 대해, 또 퀴어라는 호명의 효과와 결과에 대해 앞으로도 꾸준히 고민하고 싶다. 때로 이 호명은 호명하는 사람을 더 안전하게 만들거나, 특별하게 만든다. 최애를 퀴어하다고 부름으로써 호명자는 손쉽게 논의를 종료해버리거나, 최애의 특별함을 다시금 상기하며 행복해지거나, 심지어는 자신을 퀴어함을 이해하거나 읽어낼 수 있는 특별한 존재로 만들며 뿌듯해진다. 극단적으로는 퀴어의 불모지에서 퀴어함을 처음 발견한 식민지의 탐험가 같이 행세하는 경우까지 있는데, 찝찝하지 않을 수 없다.
‘퀴어함’ 에 자주 수반되는 위험은 왜 논의에서 누락되는지, 또는 퍼포먼스의 장에서 상연되는 퀴어함은 왜 때로 더 안전한지, 하물며 퀴어한 것은 언제나 전복적이며 대단한지, 그렇다 쳐도 대체 누구 눈에 무엇에 대해서 전복적이라는 것인지에 대해서 더 말해야 한다. 이 물음들 끝에서도 여전히 최애에게서 퀴어함을 읽어낸다면, 그 독해는 어떤 위치와 맥락에서 이루어져야 가장 선명하게 공유될 수 있을지 역시 함께 고민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내 최애가 퀴어하다’는 선언은 그저 최애를 공유하는 사람들끼리만 맞장구칠 수 있는 수준에 그칠 것이다. ‘퀴어하다’ 는 어떤 지점이 구체적으로 언제 어떤 맥락에서 누구에게 대체 왜 퀴어한지에 대한 논의의 시작이지 논의의 결론이 아니다. 퀴어함이 메달에 그치지 않고 문화를 독해하고 비평하는 방식으로 살아있었으면 좋겠다.
열렬히 그 성악가를 사랑한 것도 1년 반이 다 되어갈 무렵 나는 천천히 탈덕을 했다. 백신과 위드코로나의 등장과 함께 선택할 수 있는 문화적 여가의 폭도 다시 넓어졌거니와, 그냥 자연스레 애정이 좀 식었다. 우습게도 이 글을 마무리하는 오늘 나는 출국을 다시 앞두고 있고, 유종의 미를 거두자는 마음으로 그의 공연을 보러 간다. 여전히 그의 음악을 가끔 듣지만 더 사랑할 기력은 없다. 그래도 공연이 좋았으면 좋겠다. 사랑하든 아니든 퀴어하기는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