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해

애덤스미스의 『도덕감정론』(1759)
도덕감정론 표지
ⓒ알라딘

  귀를 기울이지 않아도 유독 자주 들리는 이야기들이 있다. 그날 본 손익에 관한 자랑과 푸념, 어떻게 하면 경제적이고 효율적인지에 관한 논의들이다. 이 모든 이야기의 중심에는 ‘나’가 있다. 다른 누군가가 손해를 봐도 내가 이득을 본다면 경제적이다. 누군가가 불편하더라도 내가 편하다면 효율적이다. 우리는 ‘나’만을 전제로 한 이기적인 선택을 ‘경제적’이라고 말하곤 한다. 누군가는 이것이 효율성을 추종하는 자본주의의 섭리라고 한다. 허나 오해하지 말 것. 경제학의 아버지, 애덤 스미스는 개인의 이윤 극대화만을 추구하는 자본주의를 꿈꾸지 않았다.

  애덤 스미스의 『도덕감정론』은 이기심과 이윤 추구에 앞서 존재해야 할 도덕감정을 다룬 경제윤리학서다. 도덕감정이란 도덕적 행위를 판단하고 실천하게끔 만드는 원동력이다.  도덕감정의 기반은 인간이 날 때부터 타고난, 타인의 감정을 이해하는 동감 능력이다. 애덤 스미스의 인간관에 따르면 인간은 동감 능력을 바탕으로 자신의 행동이 타인에게 해를 끼치진 않았는지, 도덕적이었는지 성찰해야 한다.

  따라서 모든 경제적 선택 역시 동감 능력을 바탕으로 이뤄져야 한다. 애덤 스미스는 “자신의 이득을 위해 타인을 파멸시켜선 안 된다”며 이윤 추구 시에도 항상 이타심을 포함해야 함을 강조했다. 그 유명한 ‘보이지 않는 손’ 역시 경제 행위에서 도덕감정의 필요성을 강조하기 위해 쓰인 말이다. 애덤 스미스는 개인이 이기적인 마음을 가지고 이윤을 추구하는 행위를 해도 도덕감정의 검토를 거친다면 사회가 선순환 구조를 이룰 수 있다고 주장했다. 생산을 위해 사람들을 정당하게 고용하고, 소비자들이 만족하는 물건을 판매한다면 자본가, 노동자, 소비자 모두가 효용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즉 ‘보이지 않는 손’이란 이기적이고 자유방임적인 시장만능주의를 옹호하는 말이 아니라, ‘이상적인 자본주의란 도덕적인 경제 행위들이 모여 사회가 저절로 선순환하는 것임’을 설명하는 말이다. 그것이 경제적인 것, 효율적인 것의 본뜻이다.

  ‘경제적인 것’에 대한 지금의 용례는 애덤 스미스가 주장한 자본주의의 본질에서 멀어져 있다. 이윤에 눈먼 이들은 도덕감정이 결여된 선택을 내리며 이를 자본주의의 순리라고 얼버무린다. 그들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그들의 이기적인 행동을 두고 ‘이것이 자본주의의 폐해다’라며 자본주의에 대한 그릇된 편견을 강화한다. ‘경제적인 것’이란 말을 앞세워 이기심을 포장한 덕택에 자본주의의 본질은 곡해되고, 자본주의는 이기심이란 결함을 타고난 괴물이란 오해는 깊어지고 있다.

  『도덕감정론』의 핵심은 균형에 있다. 애덤 스미스는 이기심과 이타심 모두 인간의 본성이라고 강조한다. 진정한 자본주의는 두 본성의 균형을 통해 사회의 선순환을 이루는 것을 목표로 한다. 자본주의의 본질은 함께하는 행복이다. 다른 사람과 동감하는 것, 또 나와 다른 존재에 대한 오해를 풀고 이해하는 것, 그것이 자본주의와 경제학의 이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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