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끄러운 이야기지만, 항상 기사를 쓰기도 전에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미리 정하곤 했다. 현장의 목소리를 객관적으로 전달해야 할 기자에게는 좋지 않은 습관이다. 그만큼 하고 싶은 말이 많았고, 해야 할 말이 많았다고 변명하고 싶다. 그렇기에 기사를 쓰는 시간이 나름 즐거웠다고 말하고도 싶다.

  하지만 이번 호를 작업할 때는 전혀 달랐다.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할 말 없음’ 상태였다. 수술을 받고, 시험을 준비하고, 코로나에 걸리고, 오랜 친구와 고별하고, 새로운 직장에 적응하고, 입원한 가족의 간병인 생활을 하는 등 지난 몇 주간 내 앞에 몰아치는 태풍을 견디느라 주위를 둘러볼 여력이 없었다고 핑계를 대도 될까.

  이유야 어찌 됐든, 할 말이 없다는 것 역시 기자로서 부끄러운 일인 것은 마찬가지다. 할 말이 없었기 때문에 남의 말에 귀를 기울이다 못해 의지하게 됐다. 나를 잘 아는 사람이라면 그런 내 모습을 보고 놀랐을 테다. 남한테 부탁하는 걸 자존심 상해하고, 하고 싶은 건 바로 해야만 직성이 풀리던 내가 드디어 철이 든 건지도 모르겠다.

  기자는 다른 이들의 말을 널리 알리는 사람이다. 그 일을 잘 해내려면 그들의 세계에 완전히 들어가야만 한다. 나는 여태 그걸 하지 못해서 내 말만 해왔던 것 같다. 하지만 이번 호를 작업하는 동안 내게 몰아친 태풍을 피하느라, 다른 사람의 세계로 들어가 안기는 법을 터득할 수 있었다. 겨우 들어간 그곳은 꽤 따뜻하고 편안했다.

  태풍이 지나가고 일상으로 돌아가도 그 감각을 잊지 않고 싶다. 소중한 목소리를 들려준 취재원들, 함께 기사를 작성하는 기자들, 온 힘을 다해 174호를 준비한 데스크, 그리고 태풍 속에서 지친 내게 따뜻한 피난처가 돼 준 모두에게. 고맙다는 말밖에 할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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